15. 황혼 (3)
약 두 시간 전, 마야는 도서관을 향해 힘없이 걷고 있었다.
마야의 힘이 없는 이유는 이번 학기 내내 해 온 고민 때문이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할까, 내 목표는 뭘까.
국경 없는 의사회에 들어갈 거라고 말하는 손민국이나, 경기장에서의 공연 이후 뮤튜브에서 점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코피와 히메나는 자신과 다르게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괜히 더 초조해졌다.
친구들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았던 적도 있지만, 속 시원해지는 해답은 결국 얻지 못했다.
그래서 마야는 지난 학기와 똑같이 수업을 듣고, 과제를 열심히 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고민은 해소되지 않았고, 마야의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쌓여갔다.
만약 노팅엄 FC의 홈 경기라는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없었더라면 마야는 진작 휴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노팅엄은 원정 경기만 다니고 있었고, 마야는 원정까지 따라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최근 급격히 피로해진 마야는 기분 전환이라도 해 볼 생각으로 경기장에 늘 입고 나가는 알렉산더의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왔다.
마야는 오전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수업이 없어 과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마야의 눈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
한 잔디 운동장에 카메라 몇 대와 학생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경기장에서만 보던 선수들이 셋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들인 로드와 알렉산더가 포함돼 있었다.
과제 하나 정도는 재껴도 된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마야는 방향을 틀어 운동장 옆 벤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선수들과 학생들이 이것저것 하는 걸 구경했다.
축구공이 나가지 않게 만들어진 그물벽에는 <트렌트 대학교와 함께하는 노팅엄 FC 선수단과의 깜짝 만남>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걸 하는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와서 구경하는 건데. 깜짝 만남이라고 SNS에 공지 하나 안 올리다니. 치사하다.
마야는 아쉬워하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선수들을 눈에 담았다.
선수들은 대학생들에게 프리킥 차는 법, 크로스 올리는 법, 헤딩하는 법, 태클하는 법, 수비하는 법 등 이것저것을 알려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이어서 대학생들은 선수들과 함께 가볍게 미니게임을 했다.
마야는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었다.
미니게임이 끝나자마자 사회자가 나와 다음 행사를 안내해줬다.
“지금부터 골포스트(골대) 챌린지를 진행하겠습니다! 골포스트를 가장 정확하게 맞춘 참가자 세 명에게 선수와의 1:1 트레이닝 10분과 그 선수의 애장품을 드립니다!”
하고 싶긴 했지만, 마야는 운동신경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고 불려 나가 공을 찼고, 그 공이 우연히 구석에 딱 맞는 바람에 얼떨결에 1등이 되어버렸다.
1등이라고 외치는 사회자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공을 엉망으로 찬 후 부끄러워 주저앉았던 마야 앞에 큰 키의 무뚝뚝한 사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내, 알렉산더가 손을 내밀었다. 마야는 알렉산더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세 명의 선수 중에 누굴 고를지 짓궂게 묻는 사회자에게 답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알렉산더를 고를게요.”
*
알렉산더와 로드 모두 똑같이 좋아하는 선수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다만, 굳이 둘을 비교한다면 알렉산더가 조금 더 좋았다.
알렉산더의 유니폼만 입고 다니다 보니 더 익숙해져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마야도 잘 몰랐다.
아무튼, 그런 알렉산더를 앞에 두고 마야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만 해도 알렉산더를 이렇게 가까이서 만날 줄은 몰랐기에 마음의 준비 따위 되어있지 않았으니까.
알렉산더의 ‘뭘 배워보고 싶습니까?’라는 물음에 ‘패스요.’라고 짧게 대답했기 때문에 마야는 알렉산더와 짧은 패스를 주고받고 있었다.
통, 통 소리와 함께 공만 오가니 결국 알렉산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제 유니폼을 자주 입고 다니십니까?”
“경기장에는 매번 입고 가요. 평소에는 안 입는데··· 입고 오길 잘한 거 같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대화 단절이 시작되려고 했지만, 마야는 알렉산더가 먼저 말을 먼저 걸어준 덕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경기장이나 인터뷰, 노팅엄 TV에서의 이미지대로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면 공만 차다가 10분이 다 지나버릴 거다.
그래서 마야는 용기를 냈다.
“저기··· 끝나고 이 유니폼에 사인 해 줄 수 있으세요?”
“예, 쉽습니다. 그런데 자주 입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걱정하는 알렉산더에게 마야는 당당하게 말했다.
“한 벌 더 있거든요. 지난 시즌 거요. 이번 시즌 거 새로 사도 되고요.”
“아···.”
알렉산더는 잠깐 당황하다가, 이윽고 웃어주면서 말했다.
“차에 새 유니폼이 몇 장 있으니까 행사가 끝나면 거기에 사인해 드리겠습니다.”
예상외의 횡재에 마야는 정말로 기뻐서 말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확실히 나아졌다. 마야는 대화를 잇기 위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행사 끝나고 준다는 애장품은 뭐예요?”
“이 팀에서 처음으로 찼던 주장 완장입니다.”
“아하··· 예?”
알렉산더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마야는 뒤늦게 당황했다.
마야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런 귀한 추억이 있는걸···.”
“괜찮습니다. 혹시 싫으십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알렉산더의 상징인 노란 완장, 그것도 처음으로 찬 완장이라면 노팅엄 골수팬들이 침을 흘리며 탐낼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누가 받을지도 몰랐던 행사에 가지고 왔다니.
마야는 잠깐 당황스러웠지만, 그걸 자신이 받는다는 사실에 들떴다. 집에 가져가면 액자에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패스 말고 다른 건 안 궁금합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프로 선수에게 1:1로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마야에게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저 축구 정말 못하거든요··· 아까 슛한 거 봤죠? 공 제대로 차본 게 열 번도 안 돼요··· 그러니까 딱히 뭘 알려달라고 해야 할지···.”
“기본적인 드리블이나 슈팅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대로 패스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요.”
“이야기요?”
딱히 축구를 잘하고 싶은 건 아니었기에, 마야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문득, 이번 학기 내내 해왔던 고민이 떠올랐다.
알렉산더는 주장이니까, 자신보다 나이도 열 살 넘게 많으니까, 이런 고민도 많이 듣고, 조언해줬었겠지.
그렇게 판단한 마야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 고민 좀 들어주세요.”
“네, 편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마야를 향해 천천히 공을 패스해준다. 마야는 발로 공을 잡고, 알렉산더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로 고민입니까?”
“네.”
마야의 고민이 귀엽다고 생각한 건지, 알렉산더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자서 끙끙대 봤자 답이 나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제가 그동안 구단 사람들을 봐온 바로는···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최고 같았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현장에서 일해보세요. 잡일이라도 괜찮습니다. 현장에서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게 보이거든요.”
알렉산더는 성실하게 조언해줬다.
“그게 힘들다면, 마야 씨가 생각하고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는 방법도 있죠. 무슨 과에 다니고 있나요? 도와드릴 수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단장에게 부탁하면 어지간한 사람과는 다 연결해줄 수 있을 겁니다.”
마야는 알렉산더를 그동안 무뚝뚝하지만, 우리 선수는 잘 챙기는 주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심지어 좋은 사람이기까지 했다.
마야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학과가 의학과라고 말했고, 알렉산더는 자신이 아는 팀닥터나 포르투갈의 부상을 전문으로 치료해주는 의사를 소개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던 도중, 마야의 한 질문에 알렉산더의 입이 멈췄다.
“축구선수를 택한 걸 후회하지는 않나요?"
알렉산더는 어색한 침묵이 몇 초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질문을.”
“그냥요. 맞다고 생각한 길이 아닌 경우도 있잖아요? 저는 제가 나중에 이 길을 왜 선택했지? 하고 후회하는 게 가장 무서웠거든요. 이번 시즌 선수 생활을 끝내는 캡틴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알렉산더의 미묘한 반응에 마야는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알렉산더가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어때 보입니까?”
마야가 알렉산더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행복할 것 같아요. 한 팀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있었고, 많은 팬이 사랑해주고, 인정해주고 있잖아요.”
알렉산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을 생각하는지 머뭇댔다. 마야가 알렉산더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닌가요?”
“그 부분은 정말 행복하긴 합니다. 하지만··· 선수 개인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쉬운 부분이요?”
“1부 리그에서 한 번도 뛰어본 적 없고, 우승컵도 하나 없고···.”
말이 계속될수록 알렉산더가 점점 우울한 얼굴을 했다. 마야는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준 알렉산더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알렉산더는 노팅엄 팬들에게 있어 앨런이나 워커보다 더 대단한 선수잖아요.”
마야의 말에 알렉산더가 마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야는 자신이 생각한 걸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노팅엄을 응원한 지 2년도 안 되는 팬이지만··· 축구를 본 지 2년도 안 되지만··· 그런 괴물 같은 선수들보다 알렉산더가 더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알렉산더가 있어서 지금의 노팅엄이 있는 거잖아요. 5부 리그로 내려갔을 때, 알렉산더가 이 팀을 2부 리그로 돌려놓겠다고 했던 약속이 아니었더라면 팀은 해체됐을 거예요. 알렉산더는 노팅엄 그 자체라고요. 팀 그 자체인 선수가 이 세상 어디에 있어요?”
마야의 쏟아지는 말에 알렉산더는 주고받던 패스를 처음으로 실수했다. 공은 사회자에게 갔고, 사회자는 농담을 던지며 알렉산더에게 공을 돌려줬다. 알렉산더는 사회자의 농담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야를 빤히 보며 멍청한 대답을 할 뿐.
“팀 그 자체인 선수는 몇 있습니다. 로마에 프란체스코 토티라는 선수가 있었고···.”
마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됐어요. 저 축구 본 지 얼마 안 됐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노팅엄의 팬들한테는 토닌지 토틴지 모를 선수보다 캡틴이 최고라고요. 그리고.”
마야가 이어 말했다.
“1부 리그에서 뛰는 것보다 더 큰 명성을 가져올 기회가 있잖아요. 우승컵도 가져올 수 있잖아요.”
“그게 무슨···.”
“이번 시즌, 주장으로서 3부 리그에서 우승해요. 그럼 우승컵도 생기고, 낭만적인 약속을 지킨 선수라고 어중간한 1부 리그 선수보다 훨씬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난 이미 나이가···.”
이렇게 기운 없는 알렉산더는 마야가 아는 알렉산더가 아니었다.
마야는 성큼 앞으로 나가서 알렉산더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전 젊은 캡틴이 뛰는 건 못 봤어요. 제가 아는 건 나이 든 캡틴이 뛰는 모습뿐이었어요. 그 캡틴은 충분히 할 수 있었어요. 자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팀원의 힘을 다 끌어냈었죠. 그러니까, 내 앞의 캡틴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알렉산더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마야는 알렉산더의 얼굴을 보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울어요?”
“남자가 30대 후반이 되면 가끔 이렇습니다. 몸이 고장 난 거죠.”
알렉산더가 눈물을 훔치며 변명하듯 말했다.
마야가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안 둘 사이에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 자. 아쉽겠지만, 시간이 끝났습니다.”
어느새 트레이닝 시간이 끝나버렸다.
알렉산더는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마야는 황당했다. 자신의 고민을 말하다가 어느새 알렉산더를 위로하는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
행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마야는 알렉산더의 애장품인 첫 번째 주장 완장을 선물로 받았다. 애장품을 받는 순간, 로드가 부러워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야는 직원을 따라 주차장으로 먼저 이동했다. 사인 유니폼을 받기 위해서였다.
주차장에서 마야는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괜한 말을 했나 싶어서.
그러고 있으니 행사를 마친 선수들과 직원들이 다가왔다.
알렉산더는 마야에게 눈인사하고는 차 트렁크를 열어 새 유니폼을 꺼내 사인했다. 그리고 그걸 마야에게 내밀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네?”
“덕분에 머리가 트였습니다. 벌써 은퇴한 선수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알렉산더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밝았다.
자신의 말이 도움이 된 것 같아 마야도 적당히 웃으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고민을 들어준다는 게 제 고민만 해결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좋은걸요.”
“아닙니다. 나중에 SNS로 연락 주면 언제든지 답장하겠습니다.”
“정말요?”
“예, 그리고···.”
알렉산더가 마야를 향해 올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산더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약속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발버둥 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