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변화 (1)
“좋은 아침이에요. 캡···틴? 머리가 왜 그래요?”
주차장에서 마주친 알렉산더에게 인사하던 나는 그가 차에서 내리며 머리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이상한가?”
“이상한 건 아니고··· 군인 같아요. 잘 어울리네요.”
“그래? 이상한 게 아니면 됐어.”
알렉산더의 머리가 반삭 머리, 그러니까 감자 머리가 되어있었다. 머리는 왜 그렇게 잘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먼저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 네. 사무실로 갈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음···.”
알렉산더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게 말했다. 조심스럽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은퇴하는 날까지 선수 생활에 집중하고 싶은데···.”
알렉산더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한동안 도맡아주던 행사 참가를 원래대로 다른 선수들이 해야 하고, 일 잘하면서 선수들에게 신뢰도 있는 견습 코치 하나를 코치진에서 빼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선수들의 일이 추가로 생기는 거고, 코치진의 부담이 늘어나겠지.
하지만, 알렉산더에 관한 지침은 늘 변함없었다.
“당연히 되죠. 알아서 조치해 둘게요.”
마지막 시즌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감독 잭슨과 구단주 제임스와 함께 결정한 지침이었다. 알렉산더의 추종자인 로드도 당연하게도 동의했다.
새로운 길을 먼저 걷게 해 주려고 했더니, 알렉산더는 마지막까지 선수로 남는 걸 택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존중해 줄 뿐이다.
레전드 대우를 이렇게 해 줘야 선수들이 구단에 충성할 마음이 생기는 거기도 하니까··· 사심 같은 건 없다.
뭐, 그렇다.
“괜히 나 때문에 번거로워지는 게 아닐까 싶은데···.”
“번거로워질 걸 걱정하면서도 결정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멈칫했던 알렉산더는 내게 시원한 웃음을 보여줬다. 이번 시즌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후련한 미소였다.
**
훈련 시작 10분 전에 맞춰 드레싱 룸에 출근한 바비는 한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변해 당황한 나머지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비의 시선 끝에는 감자 머리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알렉산더가 있었다.
알렉산더는 팀 훈련 전에 개인 훈련을 한 건지 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주변 선수들과 똑같은 감자 머리가 돼 있었다.
“캡틴, 역시 편하지 않아요? 괜히 Sir 워커가 그 머리를 하고 다닌 게 아니라니까요?”
“확실히 편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바비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캡틴? 머리가 왜 그래요? 어째서 이상한 감자 머리가 된 거예요.”
감자 머리들은 분명 실력도 있고, 성실했지만 바비가 보기에는 이상한 선수들이었다.
한 감자 머리가 발끈해서 말했다.
“이상하다니!”
“당연히 이상하죠. 입만 열면 운동, 훈련, 근육··· 툭하면 다른 선수들한테 맨날 추가 훈련 하자고 하고··· 특히 나한테!”
쌓인 게 많은 바비 또한 맞서서 말했다.
하지만 감자 머리 선수는 당당했다.
“어릴 때야말로 훈련 효과가 좋으니까 하는 말이지. 다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니까? 아, 그렇지. 말한 김에 오늘 추가 훈련 어때. 기가 막힌 코어 훈련법을 찾아왔는데.”
바비는 대꾸하는 걸 포기하고 작게 한숨을 쉰 후, 캡틴을 바라봤다. 캡틴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얘들한테 부탁했다. 함께 운동하고 싶으면 머리를 밀자고 해서···.”
“이래서 싫다고요! 왜 같이 운동하려면 머리를 밀어야 하는 건데요.”
바비는 드레싱 룸을 둘러보았다.
이 감자 머리들은 시즌 시작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선수들을 유혹했고, 그 결과, 전체 선수단 24명 중 11명은 감자 머리였다.
오늘 알렉산더까지 추가돼서 딱 절반인 12명이 되었고.
“캡틴은 어쩌다 이 감자들의 마수에···.”
바비가 중얼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바비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할리 또한 바비의 말에 십분 공감한다는 듯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둘은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말에 고개를 멈춰야 했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경기에 나가서 승격에 보탬이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 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같이 운동하는 동료만큼 좋은 자극제는 없으니까 마음도 다질 겸 머리를 민 거고.”
알렉산더의 진중한 말에 감자 머리들이 ‘역시 캡틴이라니까!’라며 환호했고, 양말을 자르는 데 집중하던 로드도 고개를 홱 들고 감동한 얼굴을 했다.
“역시, 알렉산더에요. 저도 오늘 머리 밀고 올게요.”
로드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여러 선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산더마저 헛웃음을 치고 말했다.
“마음대로 해.”
선수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으니 코치가 와서 빨리 나오지 않으면 감독이 너희들의 목을 칠 거라는 말을 했다.
선수들은 준비 속도를 올렸고, 훈련장으로 하나둘 나갔다.
감자 머리 두 선수와 알렉산더가 이야기를 나누며 드레싱 룸을 빠져나갔다.
한 감자 머리 선수가 말했다.
“요즘 코치들 눈이 퀭하지 않아요? 캡틴은 왜 그런지 알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코치진에 있었던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맨시티와의 경기 때문이다. 코치들이 매일 밤을 새우면서 맨시티의 모든 선수를 분석하고 있어.”
“맨시티는 프리미어리그(1부 리그) 1위인데, 왜 그렇게···.”
FA컵은 잉글랜드의 모든 구단이 참여할 수 있는 컵대회다. 12월까지 노팅엄은 FA컵에서 좋은 대진을 받았고, 순조롭게 이겼다. 그러다 결국, 박싱데이가 끝난 직후인 1월 초에 맨시티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길 확률은 낮겠지만··· 어차피 리그도 잘 나가고 있으니 한 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감독이 말했다. 지더라도 선수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도 말했다.”
알렉산더의 말에 두 감자 머리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가 둘에게 말했다.
“열심히 해라. 너희들이 상위 리그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니까.”
“하, 하하.”
감자 머리 선수 둘이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두 선수는 각각 29, 30세였다. 충분히 이적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였다.
“프로 선수가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다. 내 눈치 볼 필요 없다. 대신, 열심히는 뛰어야겠지.”
“알겠습니다. 캡틴.”
“열심히 하겠습니다. 캡틴.”
셋은 그렇게 훈련장으로 나갔다. 셋 뒤에는 바비와 할리가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바비가 중얼거렸다.
“의미 없을 텐데···.”
할리가 묻는다.
“왜 의미가 없어?”
“결과가 정해져 있잖아. 아무것도 못 하고 질 거야.”
“축구공은 둥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바비가 할리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그 괴물을 절대 못 이겨. 차원이 다르다니까. 난 우리 팀이 완전히 무너지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리그에 영향이 오면 어떡해.”
*
팀 훈련이 끝난 후, 바비는 감독 잭슨에게 붙들려 점심을 먹고 있었다.
잭슨과 함께 밥을 먹었던 적이 없었던 바비는 잭슨의 요청에 몹시 당황했지만, 식사 자리에서 잭슨의 부탁을 들은 후에는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첸웬의 모든 걸 알려 달라고요?”
“사소한 습관이나 평소 보여주는 성격 같은 거라도 상관없다. 아는 게 있으면 다 내게 말해줬으면 한다.”
잭슨은 맨시티의 에이스이자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였던 첸웬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했다.
바비는 솔직히 이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비는 노팅엄을 좋아했다. 비록 임대로 온 구단이었지만, 선수들은 다들 착하고 재미있었고, 팬들의 분위기는 늘 뜨거웠다. 자신을 향한 응원가도 좋았다.
잭슨도 무서운 감독이긴 했지만, 때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줘 좀 무서운 동네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얘기는 해 줬다.
“애··· 같은 면이 있었어요.”
“애?”
“챔피언스리그 조별 예선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크리스 앨런에게 알까기를 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거 복수해주겠다고 몇 주 동안 훈련 끝나고 남아서 그것만 연습했어요. 결국, 크리스 앨런이 부상으로 못 나와서 실패했지만요.”
“그건··· 무섭군.”
바비는 잭슨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했다.
“경기 중에 시비를 걸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있으면 쉽게 흥분했어요. 그렇게 되면 훈련 중에도 개인적인 플레이를 하는 경향이 심해졌죠. 펩 감독님이 그럴 때마다 뭐라고 했는데, 고쳐지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으흠···.”
하지만, 어중간한 팀을 상대로 첸웬이 날뛰기 시작하면 못 막는다. 1부 리그의 웬만한 팀도 그러할 진데 3부 리그의 노팅엄은 몇 골을 실점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성격이 무척 밝아요.”
“드리블을 하기 전에 선수를 도발하는 걸 즐겨요.”
“훈련이나 경기나 전부 놀이처럼 생각해요. 근데 진짜 잘해요.”
등등 바비는 아는 걸 계속 얘기했고, 잭슨은 진지하게 들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계속 적었다.
결국,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진 바비가 말했다.
“이제 더 없어요. 그럼 퇴근해도 될까요?”
잭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고맙다.”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막 궁금한 것과 부탁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잠깐만 더 시간을 내 줄 수 있을까?”
“네? 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비가 다시 고쳐 앉았다.
“첸웬에 관해 잘 아는구나. 친한 거냐?”
잭슨의 물음에 바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냥, 같은 팀에서 훈련했으니까 잘 아는 거죠. 절대로 친하지는 않아요.”
바비는 적당히 말하면서 빨리 여기서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잭슨은 바비를 빤히 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면 부탁을 얘기해 봐야겠구나.”
“말씀하세요.”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널 중심으로 전술을 짜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저요?”
“그래, 너.”
바비는 잠깐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해야죠.”
“너는 우리 팀이 맨시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
바비의 정석적인 대답에 잭슨이 틈도 없이 물었다. 바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잭슨의 눈을 바라보았다. 잭슨의 눈빛은 진지했다.
바비 또한 잭슨의 눈을 피하지 않고,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절대 못 이겨요.”
“그러면 널 중심으로 전술을 짜는 건 포기해야겠구나.”
잭슨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바비는 당황스러웠다. 감독이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하지만, 잭슨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미리 말하마. 너는 FA컵에서 명단 제외다. 그에 맞춰 컨디션을 관리해라.”
“예?”
“100% 못 이긴다고 생각하는 선수를 경기에 내보낼 수는 없다. FA컵은 관중석에서 지켜봐라. 리그 경기는 정상적으로 내보낼 테니 그렇게 알고.”
“예···.”
이해 못 할 처사는 아니었다.
솔직히 쓸데없는 경기라고 생각했기에 쉬게 돼서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비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잭슨의 말이 들려왔다.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바비는 순간 울컥해서 뭐라도 대꾸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비는 그대로 식당에서 나갔다.
바비는 이날 일은 잊고, 평소 같은 일과를 보냈다.
리그 경기를 한 경기 치렀고, 바비의 어시스트로 승리했다.
그리고 사흘 후, 노팅엄의 홈 경기장에서 프리미어리그 1위, 맨시티와의 경기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