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52화 (52/245)

< 16. 성장 (5) >

"캡틴, 그러니까···."

알렉산더가 고개를 갸웃했다. 바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거렸다.

알렉산더는 바비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려는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삐이익!

하필 훈련 재개를 알리는 코치의 휘슬이 울렸다. 급해진 바비는 알렉산더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알겠다. 기다리겠다."

알렉산더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그대로 건물로 돌아가 버렸다.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건지, 훈련이 끝나길 기다리겠다는 건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훈련을 기다려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바비는 이따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훈련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알렉산더가 다시 훈련장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바비는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온 알렉산더는 손에 텀블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바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씻고 나와라. 여기서 기다리겠다."

알렉산더는 훈련장 옆 벤치에 앉아 코치와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바비는 가장 먼저 건물로 들어가 빠르게 씻고 다시 훈련장으로 나왔다. 알렉산더는 텀블러 하나를 열어 조금씩 홀짝거리고 있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자."

알렉산더는 바비에게 들고 있던 텀블러를 넘겼다. 뚜껑을 여니 달짝지근한 향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단장실에서 빌려온 거다. 상담할 땐 차 마시면서 하면 좋다고 그러더군. 떫은 건 싫어할까 봐 단걸로 가져왔다."

"상담이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는데···."

알렉산더는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길래. 뭐, 상담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나?"

"그건··· 그렇네요."

바비는 알렉산더의 옆에 앉았다. 훈련장의 필드 위에는 구단 관리사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먼저, 알렉산더가 차를 홀짝 마시고 물었다.

"그럼 말해봐라. 궁금한 게 뭐냐?"

알렉산더의 물음에 바비는 아주 잠깐만 머뭇거리고 입을 열었다.

"···어제 경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질 게 뻔한 경기에서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온 힘을 쏟을 수 있죠?"

알렉산더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바비를 지그시 응시했다. 바비가 계속 말했다.

"평소에도 그래요. 저는 그동안 캡틴이나 그 감자 머리 선수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알렉산더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바비는 토해내듯 말한 후 속이 좀 시원해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 알렉산더가 물었다.

"너는 왜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고 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인 훈련하는 감자 머리들이랑 안 맞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네가 우리와 스타일이 다른 선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만."

바비는 머리를 한 방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의 말대로 원래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 자신이 어제부터 고민하고 있는지, 바비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요?"

혼란스러워하는 바비에게 알렉산더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렉산더는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번 시즌에 꼭, 내 손으로 이 팀을 2부 리그로 돌려놓고 멋지게 은퇴하겠다.'라는 목표가 있어서 최근 열심히 하고 있다. 그전에는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 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열심히 했었지."

"목표요?"

"그래, 아마 다른 감자 머리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운동하면서 녀석들과 얘기해보면, 다들 목표로 하고 있는 1부 리그 팀들이나 대회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녀석들이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걸 거다."

바비는 대답 대신 차를 마셨다.

"선수들은 각자의 목표를 갖고 선수 생활을 하지. 그리고, 그 목표들은 99%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내야 이룰 수 있다. 그게 우리가 FA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일 거다.

1부 리그 스카우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이기도 했고, 순수한 승부욕으로 강팀에게 자신이 얼마나 먹히는지 비교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물론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

알렉산더는 자신의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다들 각자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 거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팀으로서 이기는 게 최선이니까."

바비는 알렉산더가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속 불편함이 더 커졌지만, 더 이야기를 나눴다가는 자신의 속마음이 낱낱이 밝혀질 것 같아 두려워진 바비는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알렉산더가 말했다.

"애초에 네가 축구를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선수라면 이런 말을 안 했을 거다. 그런 선수들은 너와 다르거든. 선을 딱딱 지키면서 필요하다면 개인 훈련도 아끼지 않지. 돈을 벌어야 하는 직장이니까."

"저는···."

자신은 그런 선수처럼 보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자신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할리에게 들었다. 너는 첸웬을 닿을 수 없는 별처럼 생각한다고 했지? 그래서 개인 훈련이든 뭐든 의미 없는 거라고 얘기하고 다녔었고."

"그 자식이···."

순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 같은 기분에 바비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믿고 있었던 할리에 대한 분노가 솟아오르려고 하는데, 알렉산더의 다음 말이 그걸 막았다.

"할리는 네가 많이 걱정됐던 모양이야. 요 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어제 맨시티 경기가 끝난 후에는 아예 죽상이라고, 내게 상담 좀 해 달라고 오늘 부탁해왔다. 아, 참고로 다른 선수들도 네가 안색이 안 좋다고 자기들끼리 걱정하더군."

"···왜 이렇게 말을 잘하시나 했더니··· 준비해 오신 거였어요?"

"그렇지."

바비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했고, 알렉산더는 그런 바비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예."

"어릴 때처럼, 축구 경기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나?"

바비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축구를 하면서 즐겁다고 생각했던 적이··· 몇 년 전인지 세기가 어려웠다.

"···아뇨."

"네 목표는 뭐지?"

"···잘 모르겠어요."

알렉산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가 없는 선수는 결국 도태된다. 거의 20년 동안 봐 온 바로는··· 프로 선수로서 몇 년 못 갔지."

"예···."

"목표가 꼭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목표가 있으면 사는 게 조금 더 재밌어지지. 축구 선수라면 경기력이 좋아질 테고."

"그렇군요."

바비가 꼬박꼬박 대답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난 네가 첸웬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면, 작년에 있던 칼 슈나이더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네게 도움을 주고 싶다. 네가 더 좋은 경기력을 보인다면, 내 목표인 2부 리그 승격에 확실히 다가갈 수 있으니까."

바비는 왠지 모르게 광채가 나는 것 같아 보이는 알렉산더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바비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알렉산더의 제안을 들었다.

"당분간 나와 일정을 같이 해보자."

한참 후에, 바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바비는 알렉산더와 함께 팀 훈련보다 한 시간 일찍 훈련장에 나왔다. 그리고 바비는 알렉산더의 개인 훈련을 똑같이 소화했다.

감자 머리 선수들은 알렉산더와 똑같이 출근한 바비를 보며 놀라고, 기뻐했다.

"드디어 우리 패밀리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거야? 환영해!"

한 감자 머리 선수가 그렇게 말했고, 바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난 머리 안 밀 거야."

"왜? 얼마나 멋지고 시원한데."

"맞아, 아침에 머리 말릴 필요도 없다고. 머리 다 감고 손으로 몇 번 털어주면 끝이야!"

감자 머리 선수들이 이구동성으로 감자 머리의 장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가 그들을 제지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견습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알렉산더의 말에 감자 머리 선수들이 감탄했다.

"역시 캡틴이야. 그런 식으로 천천히 유혹해 보자 이거지?"

"아니, 그건 아닌데···."

바비가 알렉산더를 수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고, 알렉산더는 곤란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윽고, 감자 머리 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바비도 작게 웃었다.

처음으로 참가해 본 개인 훈련이었다.

바비는 알렉산더 옆에서 몸을 움직이며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훈련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개인 훈련이 끝나고, 정식 훈련 시간이 되자 선수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중 할리가 있었다.

할리는 땀에 젖은 바비를 보자마자 경악하며 물었다.

"바비··· 배신하는 거야?"

"배신자가 누군데 그래."

바비의 퉁명스러운 말에 할리가 알렉산더를 흘긋 보고,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캡틴은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그랬는데··· 미안!"

"클럽에서 술 사면 용서해 줄게."

"얼마짜리···?"

"네 주급만큼."

할리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바비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필드로 나갔다.

바비는 정규 훈련을 소화한 후, 식사를 하고 알렉산더와 함께 추가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 기다렸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추가훈련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좋은 곳. 따라와."

바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가방을 챙겨 알렉산더를 따라 나섰다.

바비는 알렉산더가 멀리 갈 것 같아 모자와 선글라스를 썼다.

알렉산더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알렉산더의 목적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성인팀 훈련장 바로 옆에 있는 유소년팀의 훈련장이었다.

알렉산더가 나타나자마자 가슴팍에 올 만한 정도의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은 꼬마들이 알렉산더에게 달려들었다.

먼저 세 꼬마가 알렉산더 주변에 쪼르르 모였다.

"캡티이인!"

"쓰리 제이(J)들, 오랜만이지? 연습 많이 했어?"

"네!"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세 꼬마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비장의 크루이프 턴을 완성했어요."

"나는 베컴처럼 발목 꺾어서 크로스를 올릴 수 있게 됐어요. 바나나처럼 정말 많이 휘어요!"

"저는··· 더 멀리 뛸 수 있게 됐어요···."

알렉산더는 꼬마들의 자랑에 하나하나 대답해줬다. 바비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알렉산더의 소개에 앞으로 나서야 했다.

"오늘 풋살을 함께해 줄 1군 선수를 데려왔어. 누군 것 같아? 맞춰봐."

"1군 선수요?"

알렉산더의 물음에 꼬마들이 바비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바비는 움찔했으나, 자신의 정체를 바로 말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금발 머리카락도 모자로 가렸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어서 완벽한 분장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꼬마들은 자기보다 큰 키는 잘 가늠하지 못했기에 바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눈썰미가 좋은 꼬마는 있었다. 쓰리제이 중 존이라고 불렸던 키 크고 조용한 꼬마였다.

"바비··· 맞죠?"

"바비?"

"바비라고?"

"정말?"

꼬마들이 짹짹거리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바비는 자신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잔뜩 기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팬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맞췄어. 안녕, 얘들아."

"오아아아!"

"진짜 바비다!"

그리고 바비는 자신의 정체를 맞춘 존에게 쓰고 있던 모자를 건네줬다. 길거리에서 마음에 들어서 산 평범한 모자였지만, 존은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그때, 알렉산더가 박수를 두 번 쳐 시선을 모았다.

"자, 바비 선수는 바쁘니까 빨리 시작하자. 감독님은 어디 계시니?"

"코치님들이랑 같이 형들 가르쳐주고 있어요."

"저희들은 캡틴한테 맡긴다고 했어요."

알렉산더는 그러냐고 답하며, 아이들에게 먼저 몸을 풀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멀어지고 알렉산더와 대화할 틈이 나서 바비가 물었다.

"노팅엄 유소년 선수들이에요?"

"응, 얘들이랑 공 한번 차라고."

"그건 이해했어요. 근데, 자주 오나 봐요? 되게 친해 보여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다."

알렉산더는 옆 운동장으로 걸어가 유소년 감독과 코치들과 인사를 나눴다. 바비도 알렉산더를 따라 그들과 인사했다. 그리고, U18(18세 이하) 유소년 선수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했다.

"캡틴! 빨리 와요!"

꼬마의 부름에 알렉산더와 바비는 걸음을 빨리해 원래 운동장을 향해 걸었다.

바비가 물었다.

"애들이랑 공 차는 게 다예요? 뭐 더 해야 하는 거 있어요?"

"그래, 그것만 하면 된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더의 일정을 따르겠다고 했으니 바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 16. 성장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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