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성장 (6) >
"나는 바비 팀!"
"나는 캡틴 팀!"
유소년 선수들 사이에서 바비와 알렉산더의 인기는 비슷했다.
두 팀 모두 일곱 명씩 모였고, 골대를 앞으로 당겨 7대7 경기를 하기로 했다.
바비 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애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될걸. 무섭게 달려들 거다.'
바비는 알렉산더의 주의를 흘러들었다가, 예상보다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움직임에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프로 선수와 유소년 선수의 격차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바비에게 아이들의 돌진은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바비는 자신의 앞에 달려드는 두 꼬마에게서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드래그백(공을 발바닥으로 잡아 뒤로 쭉 빼는 기술)으로 공을 뒤로 빼낸 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이쪽에도 아이 둘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전술적 움직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바비의 공을 뺏기 위해 몰려들 뿐.
바비가 네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보며 알렉산더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비는 뒤에 서 있는 같은 팀 아이에게 패스했다. 그러자 자신을 둘러쌓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어느새 바비 근처에 다가온 알렉산더가 말했다.
"어때,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했지?"
"그러게요. 조금 무섭네요."
알렉산더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중앙에서 패스를 건네주기만 하고 있었다. 바비 또한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패스를 받고, 뿌려주는 걸 반복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실실거리기도 하고, 옆에서 불러도 안 들을 만큼 집중하기도 하고, 실수했을 때는 땅을 칠 만큼 아쉬워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네 명의 아이들이 또 한 번 바비를 둘러쌓았다. 바비는 발끝으로 공 아래를 툭 차올려 아이들의 키를 넘기는 방식으로 제치려고 했다.
한데, 공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넘어갔다는 걸 깨닫지 못한 아이들이 차례로 바비의 다리에 몸을 박았다.
순간 비틀거리면서 울컥했던 바비는
"으아, 바비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방금 그거 어떻게 해요? 언제 공이 뒤로 넘어갔지?"
이말 저말 던져대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화가 팍 식어버렸다.
맞다. 여기는 프로의 경기장이 아니었다.
바비는 아이들을 더 장난치고 골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바비는 지단이 빙의한 것처럼 상대 아이들을 농락하면서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바비에게 공을 뺏기 위해 모두 달려들었고, 바비는 가끔 일부러 뺏겨주기도 하며 놀이를 즐겼다.
골을 넣어도 기분이 좋았고, 골을 먹혀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기분이 얼마만 인지, 바비는 클럽에서 놀 때보다 더한 만족감을 느끼며 임시 심판을 맡은 유소년 코치가 경기 종료 휘슬을 불 때까지 열심히 뛰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바비에게 모여들었다.
"바비! 정말 대단해요. 우리가 이겼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고마워요!"
"···또 와요?"
아까 모자를 선물했던 존의 물음이었다.
재미있었다. 그렇기에 대답은 뻔했다.
"당연하지. 캡틴이랑 자주 올게."
모자를 받았을 때처럼 존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조금 쉬더니 금방 회복해서는 다시 공을 차기 시작했다.
바비가 잔디밭에 주저앉은 채로 물을 마시고 있으니, 유소년 코치와 막 대화를 마친 알렉산더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어땠지? 내가 초심을 찾고 싶을 때 자주 오는 곳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긴 했어요."
바비의 말에 알렉산더가 씩 웃었다.
"여기에서는 프로라는 중압감 없이 순수하게 축구를 즐길 수 있지. 겸사겸사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쌓아줄 수도 있고."
알렉산더가 왜 자신을 여기로 데려와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어제 나눴던 대화의 연장이었다. 어린 시절 즐겁게 공을 찼던 기억을 조금이나마 일깨워 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바비는 부끄러웠지만, 솔직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그냥요···. 아, 캡틴은··· 좋은 감독이 될 것 같아요."
바비가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내뱉은 뜬금없는 말에 알렉산더는 말문이 막힌 건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음··· 뭐, 내 능력이 된다면야."
"그렇군요."
바비와 알렉산더는 말없이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 바비는 엉덩이에 묻은 잔디를 툭툭 털며 잔디밭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 볼게요. 끝이죠?"
"그래. 오늘은···."
조심스럽게 오늘 어땠는지 물으려고 하는 알렉산더에게 바비는 시원한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당연히 덕분에 즐거웠죠. 내일은 몇 시까지 훈련장에 나오면 돼요?"
*
"캡틴이 또 선수를 돌봐주고 있네요."
"이 구단에 저런 선수가 있는 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제가 감독 생활을 하며 본 선수 중에 가장 의지가 되는 선수입니다."
"캡틴이 대단하긴 하죠."
나는 잭슨 감독과 함께 유소년 코치진을 만나러 왔다가, 바비와 알렉산더를 보게 됐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바비의 후련한 얼굴을 보니 알렉산더가 뭔가 잘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미스터 킴, 이번 시즌이 끝나고 알렉산더를 무조건 잡아주십시오."
잭슨이 이렇게 강조할 정도로 이 팀에서 알렉산더의 역할은 컸다.
"걱정 마세요. 만약에 캡틴을 못 잡으면 제 연봉을 절반으로 줄이겠습니다. 전력분석관이든 코치든 무조건 잡아놓겠습니다. 캡틴은 노팅엄에서 못 떠납니다. 절대로. 나중에는 구단 옆에 무덤까지 만들어 줄 겁니다."
내 말에 잭슨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건 좀 무섭습니다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나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알렉산더의 든든한 등과 후련한 표정으로 떠나고 있는 바비를 번갈아 쳐다봤다.
**
맨체스터 시티의 홈 경기장,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
이 경기장 안에 있는 원정팀의 드레싱 룸에는 노팅엄의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선수들은 특히 친한 선수들끼리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가볍게 몸을 풀며 경기 전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중에는 바비와 할리, 라이언도 있었다.
할리가 바비에게 물었다.
"많이 긴장돼?"
"당연하지, 관중이 5만 명이나 된다고."
"신나는 노래라도 틀어줄까?"
"그래."
사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바비는 괜히 다리를 떠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할리가 스마트폰으로 신나는 라틴 음악을 튼 후에는 일부러 그 리듬에 맞춰 다리를 떠는 척 했다.
이어서, 라이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빠가 여행 가서 사 온 약이 있는데 먹어볼래? 청-심-환이라는 건데 먹으면 긴장이 풀린대."
"고맙지만 사양할게. 경기 전에 뭐 먹기는 좀 그래서."
둘의 걱정에 긴장은 아주 조금 풀리긴 했지만, 곧 바비가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이 상태였다.
잭슨 감독은 불과 두 시간 전, 바비가 오늘 경기에서 선발로 나간다는 걸 알려줬다.
당연히 1차전 처럼 뛰지 않을 줄 알았던 바비는 화들짝 놀랐고, 이윽고 첸웬과 맞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긴장하기 시작한 거다.
더불어, 전 대회 우승을 노리는 맨시티는 이번 경기에서 꼭 승리해야 한다는 걸 선발 명단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브라질의 주전 스트라이커 가브리엘 제주스를 필두로 사실상 1군이나 다름없는 정예 멤버를 선발로 내세웠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나. 예전처럼 어차피 질 거 적당히 뛰어야지··· 라는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캡틴도 농담할 줄 아네요."
어느새 알렉산더가 자신의 옆에 앉아있었다. 알렉산더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해 주려는지 할리와 바비가 물러나 다른 선수들과 오늘 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로드에게로 다가갔다.
"지금은 그때랑 달라요. 그냥 엄청 긴장되네요. 오늘 뛸 줄 몰랐는데··· 에휴."
"준비는 잘했잖아."
"그냥 한 거죠. 단장님은 왜 출전금지 조항을 빼서···"
보통 임대를 보내주는 팀은 '원 소속팀과 경기 시 출전 불가 조항'을 넣는다. 컵 대회에서 혹여나 자신들이 보낸 선수에게 일격을 맞을 수도 있고,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비는 김도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계약서에 그 조항이 없다는 걸.
'맨시티는 네가 실전경험을 많이 쌓길 바랐고, 나는 일정 경기 이상 널 출전시키겠다는 조항을 넣었어. 그 대신, 우리가 불리할지도 모르는 조항은 최대한 뺐지. 소속팀으로 원할 때 복귀시킬 수 있는 조항이라던가··· 원소속팀과의 경기 시 출전 불가 조항이라던가···.'
에이전트와 함께 자신의 임대 계약서를 확인하면서 들은 내용이었다.
"기운 내. 유소년 애들이랑 뛸 때를 떠올리라고."
"···알겠어요."
둘이 막 대화를 끝냈을 때, 드레싱 룸 안으로 코치들과 감독이 들어왔다.
"자, 자, 다들 자리에 앉아! 집중해!"
바비와 알렉산더는 이야기를 멈추고, 잭슨이 말해주는 최종 전술점검을 한 후, 경기장으로 나갔다.
*
오늘 노팅엄은 뒤로 내려앉은 4-4-2 전술로 나섰다.
중앙 미드필더를 맡은 건 라이언과 바비였다. 라이언이 수비적인 역할을 주로 맡았고, 바비가 공격 전개를 맡았다.
전광판의 시계가 전반전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첸웬의 슈팅이 로드의 허벅지에 맞고 나가는 바람에 맨시티의 코너킥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라이언은 자신이 마크하는 선수 옆에 바짝 붙어서 바비에게 하소연했다.
"정신 나갈 것 같아··· 이게 1부 리그 1위야···? 너 이런 팀에서 온 거야?"
"기운 내."
바비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노팅엄은 맨시티에게 제대로 공을 빼앗아보지 못한 채로, 30분 동안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1차전 때는 얻어맞는 와중에 날카로운 반격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애초에 공을 빼앗지 못하니 그런 기회를 만들 시도조차 못 하고 있었다.
"집중해!"
알렉산더의 말에 선수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맨시티의 케빈 데브라이너가 코너킥을 올리기 위한 도움닫기를 막 하고 있었다.
존 스톤스에게 말을 걸던 로드도 입을 꾹 다물며 자신이 마크해야 하는 스톤스와 공을 번갈아보았다.
데브라이너가 코너킥을 찼다.
공의 높이는 가슴 정도였고, 속도가 무척 빨랐다. 미리 준비해놓은 패턴인지 스톤스가 허리를 숙이며 공 쪽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로드는 스톤스와 몸싸움을 하며 따라왔다.
그리고 둘은 점프하지 않고, 공에 머리를 갖다 대기 위해 동시에 머리를 내밀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스톤스의 머리가 살짝 더 앞으로 나왔고, 늦었다고 판단한 로드는 스톤스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깨를 강하게 밀었다.
스톤스의 머리에 공이 맞았다.
"됐다!"
로드의 외침대로 다행히, 밸런스가 무너진 스톤스는 제대로 헤딩하지 못했다. 공은 골대가 빈 공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휴우···."
바비의 옆에 있던 라이언도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쉴 만큼 안전한 위치였다. 적어도 바운드 한 번은 돼야 선수들이 도착할 위치.
하지만, 월드클래스 선수는 달랐다.
첸웬은 공이 거기 떨어질 걸 예상한 건지, 보고 달린 건지 엄청난 가속도로 공이 떨어지기 전에 슈팅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도착했다.
"막아!"
"안돼!"
바비와 로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바비는 슛을 막기 위해 달렸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첸웬은 공이 바운드 되는 걸 기다리지 않고, 공중에서 발을 휘둘렀다.
공은 정확히 첸웬의 발등에 얹혔고, 대포알처럼 쏘아져 노팅엄의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노팅엄 선수들의 좌절과 맨시티 선수들의 환희가 교차 됐다.
<와아아아! Come on city! Come on city!>
이어서 맨시티 팬들의 환호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바비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최근, 바비는 알렉산더와 이야기를 나눈 후 목표에 관해 수시로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목표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그저 첸웬을 만난 후, 건조하게만 대했던 축구가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찰 때처럼 다시 의욕적으로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첸웬을 다시 보니 그런 마음이 다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바비의 뒤에서 들려왔다.
"바비."
세레머니를 마친 건지, 첸웬이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첸웬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어린 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목소리 또한 많이 굵어져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야. 이번 경기에 안 나오면 직접 찾아갈까 생각했었어."
"뭔데···."
과거, 일방적으로 첸웬을 피했었다는 죄책감에 바비는 첸웬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첸웬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걸 또박또박 바비에게 전했다.
"네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제는 알아. 나한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넌 잘못 없으니까. 오히려 많이 고마워. 네 덕에 잘 적응할 수 있었거든···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첸웬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비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바비는 첸웬의 입술이 씁쓸한 모양을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비는 첸웬을 불러세웠다.
"왜, 어떻게."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바비를 향해 첸웬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너랑 비슷한 애들을 많이 만났거든. 왜 날 피하는지 이유도 들었어. 아저씨랑 형들한테 상담해 봤는데··· 세계 최고가 되려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러더라고. 아, 심판이 경고 주겠다. 가 볼게."
첸웬은 그렇게 말하고 제 진영으로 달려갔다.
바비는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의 대화로 깨달았다. 첸웬은 압도적인 재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또한, 자신처럼 첸웬에게 상처를 준 또래가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첸웬은 괜찮다고, 고맙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이번에는 알렉산더가 다가왔다.
"방금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면 교체해달라고 해. 그게 아니라면 다른 생각 말고 슈팅 하나, 패스 하나에만 집중하고."
"괜찮아요. 캡틴. 저 오늘 잘할게요."
알렉산더에게 한 말이었지만,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갸웃하고는 잘 해보자고 얘기하고는 센터서클로 향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바비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공을 되찾아오기 위해 달렸다.
바비는 방금 쉬운 패스를 실패했다.
분명 이렇게 급하게 패스하면 선수들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 저지른 자신의 실수였다.
"조금만 더 천천히!"
다른 선수들이 바비에게 요청해 봤지만, 바비는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요청에도 패스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잘 되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바비의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 나게 쳤다.
"악! 캡틴?"
"정신 차려라. 집중해. 뺏겨도 되니까 천천히 하라고."
알렉산더의 덕이었을까, 바비는 곧 냉정해질 수 있었다.
바비는 얼마 되지 않는 공격 기회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중, 전반 종료 직전 애매한 기회가 찾아왔다.
시작은 맨시티 수비수의 패스 미스였다.
지쳐서 잠깐 걷고 있던 할리가 우연히 공을 끊어냈고, 바로 맨시티의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여 뒤의 알렉산더에게 패스했다.
알렉산더는 바로 바비에게 패스했다.
바비가 공을 잡은 곳은 골대부터 약 25m 정도의 거리였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분위기를 뒤집기 위한 슈팅이 필요하다.
그렇게 판단한 바비는 과감하게 도움닫기를 하고, 최대한 강하게 슈팅했다.
바비는 발등에 얹힌 공을 깃털처럼 가볍게 느꼈다. 공의 정중앙을 맞췄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휘어지며 골대의 구석에 꽂혔다.
에데르손이 뛰어봤으나 무리였다.
그러니까, 골이었다.
바비가 슛을 한 곳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으니 노팅엄의 선수들이 달려와 바비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너 미쳤어? 뭐야!"
"틀림없이 이번 시즌 FA컵 최고의 골일 거야!"
"너 왜 세레머니 안 해?"
마지막 질문에 자신이 골을 넣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바비는 양손을 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 내 친정팀이야. 세레머니 하면 안 돼."
그렇게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맨시티는 더 강력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노팅엄의 선수들은 전반 종료 직전, 바비의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떠올리며 기운차게 맨시티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또 한 번 기회를 만든 건 역시나 첫 골의 주인공 바비였다.
맨시티 유스 시스템에서 성장한 바비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온 론도(rondo)라는 훈련으로 짧은 패스를 끊어내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바비는 데브라이너의 패스길을 읽고, 운 좋게 끊어낼 수 있었다.
"받아!"
바비는 망설임없이 공을 뒤로 돌렸다.
라이언이 공을 받았고, 곧장 다른 선수에게로 패스했다.
자신도 함께 공을 돌리면 더 안전하게 공격할 수 있겠지만, 문득, 지금은 도박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비는 알렉산더와 할리가 있는 공격수 위치까지 계속 달렸다.
맨시티의 선수들은 노팅엄의 패스와 상관없어 보이는 바비의 움직임을 잠깐 무시했다.
그때, 공을 갖고 있던 중앙 수비수 로드가 바비와 눈을 맞추자마자 길고 빠른 패스를 보냈다.
바비는 뒤에서부터 달려오던 속도를 유지해 오프사이드 라인을 완벽한 타이밍에 뚫어냈다.
그리고 로드의 패스를 받았다.
뒤에서 쫓아오는 선수가 느껴졌지만, 바비는 일대일 찬스를 날리지 않았다.
에데르손 앞에서 떨지 않고, 공의 밑 부분을 툭 차서 로빙슛.
<와아아아!>
천 명이 되지 않는 노팅엄의 원정 서포터즈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역전 골이었다.
경기장이 조용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맨시티의 홈 팬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바비는 이번에도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 노팅엄의 선수들에게 파묻혀서 미소 정도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노팅엄의 선수들에게서 벗어난 바비는 노팅엄의 진영으로 돌아가던 길에 첸웬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첸웬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어렸다는 변명은 하기 싫었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짧게 말했다.
"정말로 미안했어. 나중에 식사라도 하자. 내가 살게."
첸웬은 놀란 얼굴을 했다가 미소를 지었다.
지고 있는 팀의 선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였다.
*
노팅엄이 맨시티를 이긴다든가 하는 동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나, 첸웬은 괴물 같은 녀석이었다. 괜히 크리스 앨런이나 니콜라스 마카키스 다음으로 손꼽히는 선수가 아니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첸웬은 후반전에 혼자 세 골을 넣고 한 개의 어시스트를 했다.
심지어 세 골은 왼발, 오른발, 머리를 사용한 퍼펙트 해트트릭이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성벽 같은 놈이었다.
그런데도, 바비는 분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첸웬에게 무력감을 느끼던 어린 자신은 이제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비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어느새 목표가 자라났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시절에 가졌었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경기는 정말 후련하면서도 아쉬웠으니까. 더 연습해서 더 좋은 선수가 되고, 더 좋은 리그에 간다면 더 즐거운 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과연 자신이 이곳으로 임대를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경기를 하고,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바비는 잔디밭에 앉은 채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알렉산더와 동료들, 그리고 맨체스터까지 원정 온 서포터들을 차례로 돌아봤다.
모두 자신을 성장하게 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일어나. 서포터들에게 인사해야지."
"예."
특히, 지금 자신의 손을 잡아 일어나는 걸 도와준 캡틴, 알렉산더는 방황하던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최고의 멘토였다.
바비는 이날 서포터들에게 가장 큰 환호를 받았다. 맨시티의 팬들도 바비에게 손뼉을 쳐 줬다.
그렇게 이날, 멈춰 있던 바비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16. 성장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