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메인 스폰서 >
"5부 리그 시절에 인수한 팀이 2부 리그 승격을 앞두고 있다니. 미스터 휘팅엄의 혜안은 역시나 뛰어나군요."
미국의 유명 게임 제작사 데몬 소프트의 대표 메이슨 무어의 칭찬이 제임스에게 향했다.
제임스가 살며시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다 운이 좋아서 그렇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운이 우리 사업으로 향했으면 좋겠네요."
메이슨의 뼈가 담긴 말을 제임스가 부드럽게 받았다.
"원작 게임 캐릭터의 디자인이 워낙 잘 뽑혀서···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멋진 퀄리티의 작품들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둘은 방금까지 메이슨의 회사에서 만든 게임이자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VR게임, <데몬 슬레이어>에 나오는 캐릭터와 몬스터들의 피규어 등 여러 종류의 상품들을 독점 제작해서 유통하겠다는 계약을 마쳤다.
"기대하겠습니다. WDF(제임스의 회사)에서 만든 상품들은 저희 게임 뿐만 아니라 영화 업계에서도 유명하거든요."
"믿고 맡겨주세요."
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 소리를 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또 일 얘기를 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구단 운영에 관한 얘길 해 보고 싶었는데, 직업병이라는 게 참 무섭다니까요."
"구단 운영이요?"
"제가 요즘 프로 축구팀에 관심이 많거든요. 특히 잉글랜드의 팀들에게요."
제임스가 허리를 폈다. 안 그래도 메인 스폰서 이야기를 꺼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메이슨이 먼저 꺼내주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어떻게 5부 리그 팀을 3부 리그 1위까지 만든 건가요?"
"제가 한 건 딱 두가지 밖에 없어요. 기본적인 자금 정도만 투자하고, 제가 아는 가장 유능한 친구 도니를 사장 겸 단장으로 부임시킨거죠."
"그 분이 많이 대단한 모양이네요."
"네. 3000명 정도밖에 안 되던 관중을 2년 만에 2만 5000명으로 만들었고, 벨기에 2부 리그에서 뛰던 선수를 자유계약으로 데려와서 500만 파운드에 팔았다니까요. 그것도 불과 2년 만에."
"···그거 사람입니까?"
제임스 또한 말로 내뱉어보고 알았다. 자신의 친구 김도운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지를.
"그러게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 같아요."
"엄청나네요. 그 정도면 그 도니라는 분에게 상위 구단에서 제안이 어마어마하게 오겠네요. 지키기 힘들겠어요."
제임스는 자신에게
'프리미어리그 하위권 팀 두 곳이랑 챔피언십리그 상위권 팀 두 곳에서 단장직 제안 왔어. 연봉 4% 올려줘.'
라며 장난스럽게 말하던 김도운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왔다고는 했는데··· 절대 안 갈거예요."
"부럽네요. 그런 친구가 있다니."
제임스가 없이 웃었다. 메이슨이 이어서 말했다.
"투자한 것에 비해 엄청난 이익을 얻었겠네요. 구단주로 얻는 수익에다가 메인스폰서로서 홍보도 톡톡히 하고 있을 테고···."
메이슨의 말에 제임스는 훈훈해졌던 정신상태에서 빠져나오며 은근히 말했다.
"다음 시즌에는 새 메인스폰서를 구하려고요. 제가 따로 메인스폰서 자금을 대고 있는 건 아니라서. 메인스폰서가 없어서 임시로 제 회사 이름을 달고 뛴 거였거든요."
"오오, 그렇습니까? 저희도 한 번 노려볼까요? 년마다 얼마 정도를 생각하고 있나요?"
메인스폰서는 여러 형태로 구단을 지원해준다. 제임스와 김도운은 상의 끝에 목표는 정할 수 있었다.
"연간 500만 파운드(약 73억 원)요."
"음··· 큰 금액이네요."
"어, 그러니까···."
연간 500만 파운드 정도면 규모가 작은 도시에 위치한 프리미어리그 하위권 팀, 또는 챔피언십리그의 상위권 팀이 받는 금액이었다.
그러니까, 2부 리그에서도 최상위 계약이었다.
그러니까, 500만 파운드는 김도운과 함께 정한 목표일 뿐이었다. 조금 긴장한 나머지 실수로 500만 파운드를 불러버린 거였다.
시작부터 너무 세게 불렀다는 걸 깨달은 제임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작년에 팔았던 칼의 이적료가 참 어마어마했던 거였다.
"생각해볼게요. 회사 임원들하고도 상의해 봐야 해서."
"감사합니다."
제임스는 메이슨의 어색한 얼굴을 보며 첫 제안이 망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괜히 매달렸다가 이상한 금액으로 구두계약 비슷하게 되어버리면 골치아파질 수도 있었기에 제임스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적은 금액을 꺼낼걸, 제임스는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
"으음, 이번에 노팅엄 FC에 메인 스폰서 제안을 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WDF를 유니폼 중앙에 달고 뛰긴 하지만, 메인 스폰서는 없었으니까요. 괜찮은 구단 같아서 메인 스폰서로 시작해서 구단 인수까지 생각하고 있긴 했었는데, 선뜻 손대기 힘든 금액을 부르더라고요. 연간 100만 파운드면 될줄 알았는데."
미국으로 돌아온 메이슨은 또다른 사업 파트너인 VR기계 1위 업체, 엑스피아의 대표와 업무차 만나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엑스피아의 대표 매튜는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까닥이다가 물었다.
"얼마를 불렀나요?"
"연간 500만 파운드요."
"오호···."
매튜 또한 잉글랜드의 축구 구단에 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게임을 하는 듯한 석유 재벌들을 제외하더라도 잉글랜드의 2, 3부 리그 구단에 투자하는 기업이나 사업가는 꽤 있었다.
잉글랜드의 1부 리그, 프리미어리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포츠 리그였고 중계권료만 몇 조 원에 달했다.
그에 비해 2, 3부 리그의 중계권료는 몇십 억 원으로 턱없이 낮았다. 그만큼 스폰서 비용도 낮았다.
만약 2부 리그에서 승격하면 바로 1부 리그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그렇기에 사업가들은 2, 3부 리그의 팀에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러 사업가들이 실패하고 성공해오고 있었다.
메이슨의 말은 최근 여러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생각하던 매튜에게 호기심을 생기게 했다.
"흐음. 노팅엄이 지금 몇 부 리그에 있죠?"
"3부 리그요. 1위라서 아마 다음 시즌에는 2부 리그로 승격하겠죠?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편이라서 그런데 2부 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메이슨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예. 2부 리그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팀들이 여럿 있는 리그니까요. 그 팀들은 심지어 낙하산 자금(강등보조금)도 수천만 파운드(수백억 원)를 받거든요. 규모상 상대하기 힘들죠."
"그렇군요."
매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고, 메이슨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하지만, 매튜의 머릿속에서는 노팅엄 FC라는 이름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매튜는 밤새 노팅엄 FC에 관해 찾아봤다. 다음 날, 밤을 샌 매튜는 엑스피아의 임원들을 모았다.
**
"노팅엄 FC라··· 이 구단의 메인 스폰서를 맡아보자 이거죠?"
"네, 어제 이것저것 찾아보고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는 건··· 준비해 오신 거죠?"
"네."
엑스피아의 임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보겠다는 각자의 자세를 취했다.
엑스피아의 대표 매튜는 늘 도전하는 걸 즐기는 젊은 사업가였고, 그 도전은 꽤나 높은 확률로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물론, 가끔 실패하기도 했지만.
매튜가 자신만만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크린에 노팅엄 FC의 앰블럼을 띄웠다.
"VR기계의 대중화와 분야 확장을 목표로 이 구단을 이용해보고자 합니다."
VR 기계의 대중화와 분야 확장은 미국에서 1위를 바탕으로 세계에서도 판매량 1위를 달성하고 있는 엑스피아에게 당면한 중요한 문제였다.
매니아층만 구매하는 VR 기계다보니. 최근 매출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구단에서 재밌는 걸 시작하려고 하더군요."
매튜의 말과 동시에 스크린에는 노팅엄 FC의 경기장 투어 홍보가 나왔다.
매튜는 레이저 포인터로 홍보 내용의 한 지점을 짚었다.
"보십시오. 이 팀은 우리가 만든 VR기계를 실제 축구선수들의 훈련에 적용하고, 경기장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그 영상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오."
"VR기계를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하게 되는 건, 우리의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이를 이용해 홍보하면 자연스럽게 VR기계의 사용처를 스포츠 분야로 넓힐 수 있을 겁니다."
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더 다양한 곳에서, 더 평범한 사람들이 VR기계를 이용해야 그들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으니까.
한 임원이 손을 들었다.
"노팅엄이라는 구단이 프리미어 리그에 있는 겁니까?"
"아뇨, 3부 리그에 있습니다. 1위를 하고 있고, 곧 2부 리그로 승격하겠죠."
프로 스포츠에 관해 잘 모르는 임원들이 잘 아는 임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윽고, 임원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매튜는 그런 그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노팅엄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구단입니다."
"왜죠?"
"일단, 스토리가 있습니다. 노팅엄은 몇 년 전에는 2부 리그의 터줏대감인 팀이었지만, 구단주에게 사기를 당해 5부 리그까지 떨어졌었습니다. 그런 구단을 제임스라는 유소년 출신 사업가가 인수하며 팀이 해체되는 걸 막았고, 4부 리그에 올라온 후에는 제임스의 친구이자 또다른 유소년 출신 풋볼 디렉터가 단장 겸 사장으로 부임하며 어느덧 2부 리그로의 복귀를 앞두고 있죠."
"오."
스토리가 있는 팀은 많은 화제가 될수밖에 없다. 매튜는 노팅엄에 관한 언급이 SNS에서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는 빅데이터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또, 이 팀은 축구팀으로서도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단장이 적은 자금으로 리그 최상위급 스쿼드를 2년 연속으로 만들어 낸 팀이죠. 말이 쉽지 이거 정말 말도 안되는 겁니다. 저 단장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요."
4부 리그 꼴지나 다름없던 순위표에서 리그 3위 순위표로, 그리고 현재의 3부 리그 1위 순위표가 나왔다.
"또한, 경기장 음식의 프리미엄화와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공연장 제공과 서포터즈의 다양한 응원가로 홈 경기마다 수천 여명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노팅엄 시의 시민들을 포함해 매 주 2만 5천여 명이 경기장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매튜는 술술 말하며 내용에 맞는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
3부 리그인데 기껏해야 수천 명 정도 오겠지 생각했던 임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은 미래에 유명한 관광지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단장 겸 사장 김도운의 행보를 보면 그걸 목표로 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임원들의 눈동자가 제멋대로들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들 매튜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할 말을 다 한 매튜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대로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상위 팀 비해 들어가는 투자금이 적습니다. 물론 프리미어리그 급의 홍보효과는 얻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마치 애플스토어처럼 노팅엄 경기장에 우리의 VR기계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죠. 이곳이 경기마다 2만 5천 명이 찾고, 꾸준히 관광객이 방문하는 장소라는 걸 생각한다면 최소한의 성과는 거둘 수 있을 겁니다. 또, 노팅엄의 협조만 받을 수 있다면 스포츠 기기로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료를 모으는데도 용이할 겁니다. 이미 완성된 구단에는 이런 시도가 힘듭니다."
임원들은 어느덧 모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튜는 그런 임원들을 보며 말했다.
"해 봅시다."
임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
엑스피아는 회귀 전에도 잘 알고 있는 회사였다. 회귀 전, VR기계로 훈련하는게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엑스피아는 가장 좋은 VR기계를 비싸게 파는 회사였다.
또, 회귀하기 얼마 전에는 홀로그램까지 상용화해서 내놓으며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대단한 기업이었다. 세계 1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회사의 대표가 나에게 먼저 메인 스폰서십에 관심이 있다고 연락한 것이다.
그리고, 내게 먼저 믿지못할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그러니까··· 연간 500만 파운드로 4년 계약을 하자고요?"
"그렇죠."
"거기에··· 우리 경기장 체험 프로그램과 훈련장에 최신 VR기계를 제공해주겠다고요?"
"네. 저는 이 구단이 발전하는 모습과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무료로?"
"조건이 있습니다. 훈련에서 VR 기계들을 더 적극 활용해주시고, 우리가 광고를 만드는 데 협조해주십시오. 또, 선수들을 통해 데이터도 얻고 싶습니다."
당연히 예스죠. 라는 말은 일단 넣어두고 남은 매튜의 말을 들었다.
"경기장에 VR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추가로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곳의 운영은 저희 회사에서 하겠습니다."
이것도 당연히 좋았다.
경기장에서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또 하나 늘어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벌어지려는 입을 막기위해 정말 노력해야했다.
그리고, 문득 의심도 솟아올랐다. 시작부터 500만 파운드를 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나는 제임스에게 최대 500만 파운드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연간 300만 파운드에 2년 짜리 계약을 해도 큰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만 파운드만 받아도 아주 잘 한 거였고, 100만 파운드만 받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500만이라니.
찜찜한 건 남기면 안 된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시작부터 연간 500만 파운드를 부르신 건가요?"
"제임스 휘팅엄이라는 이 팀의 구단주가 사업 자리에서 메이슨에게 얘기했다고 하더군요. 건너 들었습니다. 대번에 500만 파운드를 부르는 포부와 그동안 보여준 성과를 확인하고 나니 투자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제임스가 한 말이 흘러흘러 여기까지 들어간 거였다.
그리고, 그것과 그동안 쌓아올린게 합쳐져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거고.
상황을 이해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내게 메튜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계약하시겠습니까?"
나는 시원하게 예스라고 답할수 있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세부 조항에 관해 논의하고 최종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이날, 펍 로빈훗에서 제임스에게 500파운드짜리 술을 샀다.
< 18. 메인 스폰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