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기념품 (1) >
구단의 수입은 메인 스폰서나 구단주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구단은 수많은 서브 스폰서에게서 홍보를 대가로 후원금을 받는다. 입장료에서도 큰 수익을 얻고, 유니폼 판매를 비롯한 상품 판매를 통해서도 얻는다.
경기장 내에 있는 음식점에서 얻는 수익도 있고, 리그나 컵 대회 순위에 따른 상금까지 있다.
나는 올해 초부터 구단의 수익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는 온갖 분야를 건드리고 있었다. 계획대로 2부 리그 승격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중 최근 집중하고 있는 건 팬샵에서 파는 상품들과 유니폼·훈련 용품 후원계약이었다.
지금은 조이와 함께 우리 팀의 유니폼과 훈련 용품을 공급해주고, 후원금을 주겠다는 업체들을 차례로 만나고 있었다.
스포츠 업체들은 구단이 한 시즌 동안 자신들의 용품만 사용하는 대가로 후원금을 지급한다. 큰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희 업체가 이름값이 떨어진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십 년 넘게 하부 리그의 구단들에게 유니폼과 훈련 용품을 제공해왔고, 늘 만족스럽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또, 최고의 스포츠 업체들에서 일하던 연구원들을 스카웃해 왔고, 최신 기술을 적용해···."
한 중소 스포츠 업체의 대표, 에단이라는 남자가 자신들과 꼭 계약해줬으면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4부 리그에 있었고, 하위권으로 예상됐기에 아디다스, 나이키, 퓨마, 뉴발란스 같은 메이저 스포츠 업체들의 후원은 꿈도 못 꿨다.
그래서, 영국 내의 작은 스포츠 업체와 후원금액을 거의 받지 못하는 용품공급계약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메이저 업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포츠 용품 업체들에게 계약을 제안받았다.
이런 상황이니 내 앞에서 열심히 얘기하는 에단을 포함한 다른 중소 업체들의 대표들은 나이키나 퓨마 같은 거대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높은 후원금액을 불렀다.
그래서 많이 골치 아팠다.
마지막으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가장 큰 후원금액을 제안한 에단은 '아라크네'라는 이름을 가진 스포츠 용품 업체의 대표였다.
그의 얘기를 집중해서 들은 나는 그가 가져온 유니폼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뒤집어보기도 했다. 마감도 괜찮고 재질도 괜찮아 보였다.
딱히 메이저 업체들과 큰 차이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죄송한데, 미스터 에단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왜 나이키 같은 메이저 업체를 뒤로하고 아라크네와 계약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라크네는 메이저 업체들이 제시한 평균 후원금의 두 배를 불렀다. 이 금액은 2부 리그의 상위권 팀이 받는 후원금액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돈만 생각하면 당연히 계약해야겠지만, 유니폼 및 용품 공급 계약은 선수들의 경기력과 훈련 성과와 가장 큰 관련이 있는 계약이었다.
축구 선수들은 축구화와 정강이 보호대를 제외하면 거의 다 구단에서 제공한 유니폼을 포함한 용품들을 사용하니까.
나는 이어 말했다.
"메이저 업체들의 이름값은 최소한의 질을 보장하죠. 저희는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름값을 메꾸기 위해 후원금을 두 배로 지급하는 겁니다. 유니폼이나 용품의 질에는 자신 있습니다."
"으음···."
에단은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잘하겠습니다. 저희 업체는 지금 중요한 분기점에 있습니다. 저희는 최근 몇 년 동안 설립된 업체들에 비해 특별한 이미지를 못 보여주고 있어요. 이대로 작은 규모로 남느냐, 더 위로 가느냐의 기로에 섰습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 챔피언십리그(2부 리그) 급의 홍보가 필요합니다. 저희는 이번 계약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이런 부탁을 받는 위치는 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도 그들의 사정이 어떤지는 뒤로 해야 했다. 우리 팀에 어떤 이득을 줄지만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소보다 더 머리를 차갑게 하려 노력했다.
오늘 이들과 미팅을 하기 전부터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회귀 전의 기억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아라크네를 비롯한 중소 스포츠 업체들의 목록을 먼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전부 회귀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신중하려고 노력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안전한 길을 택해야 했다.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했다.
그래서 물었다.
"왜 우리와의 계약에 사활을 걸었죠? 다른 승격 가능한 팀도 있을 테고, 가능성이 보이는 2부 리그의 하위 팀과 계약할 수 있을 텐데요."
에단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저희는 3부 리그와 2부 리그의 여러 구단을 진지하게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구단 중 노팅엄의 행보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죠. 적은 자금으로도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고, 끊임없는 도전을 즐기는 노팅엄의 사장이자 제 앞에 앉아있는 미스터 킴만 있다면 충분히 1부 리그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이 계약을 시작으로 아디다스나 나이키 같은 메이저 스포츠 업체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회귀 전의 정보가 없으니 이렇게 머리가 아프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됐지만, 나는 에단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진지하게 검토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에단을 내보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만났던 업체의 대표들을 떠올리며 고민에 잠겼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와 에단의 대화를 얌전하게 듣기만 하던 조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너 오늘 좀 이상해."
"응?"
조이가 내 앞에 놓여있던 유니폼 견본을 집어 들며 말했다.
"선수를 영입할 때는 듣도 보도 못한 선수를 데려왔지, 구단 경영을 위한 아이디어나 정책들도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걸 막 진행했잖아. 근데 오늘은 완전 반대잖아. 자꾸 머뭇거리기만 하고··· 이거 솔직히 브랜드 가리면 아디다스 유니폼인 줄 알걸? 디자인도 엄청 예쁘고, 후원금도 두 배로 준다잖아. 너라면 당연히 아라크네를 선택할 줄 알았는데."
"음···."
"선택이 어려우면 선수들에게 직접 평가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메이저 업체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안 받아들일 테니까, 중소 업체들에게 만이라도."
"아."
조이의 차분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오늘 좀 피곤했나 봐. 그렇게 하자. 선수들 숫자만큼 견본 보내 달라고 해서 선수들 의견 들어보면 되겠다."
"그래, 선수들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오늘 만난 업체 중에 정말 보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선수들이랑 코치진이 메이저 업체들 보다 더 선호하는 곳이 있을 수도 있고."
나는 차분하게 말하는 조이를 빤히 보며 생각했다.
회귀 전의 정보가 없다고 머리 아파하지 말고, 진작 조이나 다른 직원들과 얘기해 볼걸.
나는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끼며 조이에게 말했다.
"역시 이래서 혼자 일하면 안 된다니까."
"맞아, 머리가 복잡할 땐 다른 사람 도움도 받아야지. 어때, 나 방금 좀 믿음직스러웠지?"
"응. 제임스보다 네가 낫네."
내 말에 조이는 그거 칭찬이냐고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나와 조이는 업체들에게 보낼 내용을 작성했다.
유니폼 견본과 훈련 장비들을 1주 내로 가져오고, 업체명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표식도 하면 안 된다고 적었다.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 3개월 정도 남았으니 괜찮은 업체라면 지금 준비돼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유니폼이랑 스포츠 용품들은 내가 알아서 선수들에게 분배할게."
요구사항 작성이 끝나자마자 조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이의 말에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업무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괜찮겠어?"
제임스는 자기 사업에 집중하고 있고, 나는 선수단 관리를 비롯한 구단 운영의 큼직한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조이는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곳에서 구단의 살림을 맡아주고 있었다.
몇 가지 말해보면 팀이 원정을 갈 때 호텔 예약, 훈련장 사용일정 조정, 지역 경찰과 상대 팀과의 조율 같은 일들을 직원들이 잘 처리했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조이는 이런 실무적인 일들을 총괄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안 하고 있었다.
조이가 날 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렇게 잘하고 있는데도 오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고··· 제임스는 해체 위기였던 팀을 구한 데다가 며칠 전에는 프리미어리그급 메인 스폰서를 물어왔잖아. 이대로면 너랑 제임스한테 면목이 안 서. 더 열심히 해야지."
조이가 주먹을 꾹 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조이에게 시선을 향한 채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조이가 계속 말했다.
"우리 힘내자. 이번 시즌에 승격하는 게 최종 목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첫 번째 분기점은 지나는 거잖아.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라고."
"···그렇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건 1차 목표였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조이는 기운찬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마스코트 공모전도 잘 돼 가고 있어."
제임스의 회사에서 우리 팀의 기념품들을 만드는데, 그 회사 직원에게 내가 다음 시즌에는 더 퀄리티있는 제품을 원한다고 말했다가 '이런 마스코트로는 좋은 기념품을 만들기 어려워요···.' 라는 말을 듣고 상의 끝에 공모전을 연 거였다.
기존 마스코트는 노팅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셔우드 숲의 전설적인 의적 로빈후드였다. 과거 마스코트를 디자인한 사람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정말 중세 시대에 활약할 것 같은 수염 난 아저씨를 마스코트로 만들어놨다.
그걸 우리 구단은 30년 넘게 사용해왔었고. 팬들은 당연히 안 좋아했고, 마스코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바꾸기로 결정하는 건 쉬웠다.
"다음 주면 발표 나와. 아마 로빈 새에 로빈후드 모자를 씌운 캐릭터가 우승할 것 같아. 누가 그린 건지 정말 귀엽다니까?"
직원들의 1차 심사에서 살아남은 캐릭터들이 SNS에서 팬들의 투표를 받고 있었다.
로빈 새는 우리나라의 참새 같은 영국의 흔한 새였다.
딱히 귀엽다고는 못 느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나는 조이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너 이런 거 좋아했었지. 뭐가 귀엽다는 건지 잘 모르겠단 말야."
나는 공모전 페이지를 켠 스마트폰을 좌우로 움직여보며 중얼거렸다.
"내 취향은 보편적이라고. 댓글이랑 투표 숫자 봐봐."
"흐음··· 난 잘 모르겠는데."
내 말을 들은 조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넌 다 좋은데 미적 감각 하나가 문제야."
"그래서 정장만 입고 다니잖아. 네가 예전에 그러고 다니라고 해서··· 음."
"어··· 음."
생각없이 말하다가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와 조이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색한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야 했다. 한참 동안.
**
"오, 이거 괜찮은데? 지금 유니폼보다 훨씬 부드러워."
"일단 좀 뛰어보자. 이건 땀이 제대로 안 통해서 간지러워 죽는 줄 알았어."
두 감자 머리 선수들이 새 유니폼을 입은 채로 얘길 나누고 있었다.
지금은 정규 훈련 시간은 아니었고, 자발적으로 남은 선수들이 자신들에게 지급된 여러 벌의 유니폼을 입어보고 있었다.
정규 훈련 때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는 감독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게 가장 괜찮지 않냐?"
"응. 확실히 괜찮네."
감자 머리 선수들은 여러 옷을 걸쳐보다가 결국 이름을 알수없는 한 업체에서 만든 유니폼만을 입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견본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흑인 선수, 할리가 중얼거렸다.
"바비··· 저주할 거야."
"내기에서 졌으면 받아들여."
"그건 사기야 사기."
할리와 바비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크로스바 챌린지(크로스바를 맞추는 게임)를 했고, 바비가 승리했다.
그 덕에 바비는 할리에게 뭐든 명령 하나를 할 수 있었고, 할리가 질색하는 추가 훈련에 데려온 것이다.
바비는 벤치프레스 기구에 누운 채로 아까부터 투덜거리는 할리에게 말했다.
"그 정도도 안 하고 어떻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려고 그러냐?"
"난 천재니까 괜찮다니까."
"나보다 못하는 게."
"크흠···."
바비의 팩트폭력에 할리가 반박 못 하고, 바벨을 잡고 벤치프레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할리를 보며 감자 머리 선수들이 웃었다. 그리고 한 감자 머리 선수가 말했다.
"우리 구단이 참 좋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여러 업체 유니폼을 미리 입어볼 수 있다니."
"원래는 어떤데요?"
몇 번 하지도 않고 바벨을 걸쳐 놓은 할리가 물었다.
"그냥 구단에서 통보하고 입히지 뭐. 근데 여기는 선수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거잖아. 참 좋은 구단이야. 떠나기 싫을 만큼."
감자 머리 선수의 말에 다른 감자 머리 선수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몸을 세워 앉은 할리가 감자 머리 선수들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떠나지 말아요. 다음 시즌에도 같이 뛰어요."
시즌 내내 감자 머리 선수들은 할리에게 추가 훈련을 하자고 따라다녔고, 할리는 매번 도망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앞으로 3개월 정도면 시즌이 끝났기에 할리는 요즘 가끔 이런 말을 던지곤 했다.
감자 머리 선수 중 하나이자 할리의 공격수 파트너인 알버트가 말했다.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돌아올게."
"그럼 다 늙었을 텐데요. 뭐."
할리의 섭섭함이 담긴 투덜거림에 감자 머리 선수들이 서로를 보며 으쓱했다.
할리는 쳇 소리를 내고는 옆에서 스텝박스를 이용한 코어 운동을 막 마친 바비에게 물었다.
"너도 돌아올 거야? 칼은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글쎄. 이 팀이 챔피언스리그까지 가면 생각해 볼게."
바비는 망설임 없이 답했고, 할리는 한숨 소리를 냈다.
챔피언스리그는 1부 리그에서도 4위 안에 들어야 나갈 수 있는 대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장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얘긴 시즌 끝나고 해라. 생각나더라도 입밖에 안 내는 게 좋아."
맨시티와의 경기 이후 교체로 조금씩 출전하기 시작한 알렉산더는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었다.
노팅엄은 압도적인 1위는 아니었기에 절대 긴장이 풀리면 안 된다고.
"죄송해요. 캡틴."
할리를 비롯한 감자 머리 선수들도 알렉산더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훈련이 시작되려던 찰나, 매트에 누워 뒹굴 거리며 스마트폰을 보던 라이언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
"어어? 할리, 이리 좀 와봐. 이거 네가 그린 거야?"
할리는 갸웃거리면서 라이언에게 다가갔고, 다른 선수들의 시선도 모였다.
라이언의 스마트폰에는 노팅엄 마스코트 공모전의 당선작이 나타나 있었다.
당선작 아래에는 캐릭터를 그린 사람의 아이디도 나와 있었다.
FreemanH, 할리가 어린 시절부터 쓰던 아이디였다.
할리가 라이언의 스마트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엥, 그냥 그려 본 거였는데."
< 19. 기념품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