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레전드 (1) >
각종 운동용 장비가 마련돼 있는 피트니스 룸에 검은 고양이 티케가 찾아왔다.
정규 훈련 후 요가를 통해 굳은 몸을 풀어주던 로드와 바비는 그대로 티케의 포로가 되었다.
"아이고, 우리 티케~. 아빠 찾아 여기까지 왔어요?"
"티케야. 제발 나도 좀 봐주라."
로드는 헤벌쭉한 얼굴로, 바비는 간절한 눈빛을 하며 차례로 말했다.
로드는 계속 호들갑을 떨며 티케를 만졌고, 바비는 그 모습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둘이 그러는 모습을 끔찍한 표정으로 보던 할리가 옆에서 땀을 훔치고 있는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로드 미친 거 같지 않아요?"
"음···."
티케를 무릎에 앉혀놓은 로드는 정말 행복해 보였지만, 그동안 봐온 모습과는 괴리가 있어 참 어색하긴 했다. 로드는 그동안 뭐든 척척 해내고 똑 부러지는 모범생 이미지였으니까. 알렉산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구만 잘하면 된다. 티케를 만난 이후 로드의 컨디션이 무척 좋아졌지 않나."
"으으. 캡틴은 이번 시즌이 끝이지만, 저는 저 꼴을 10년, 아니 죽을 때까지 봐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에요."
할리는 마치 팔에 소름이 돋은 것처럼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했다.
알렉산더는 할리의 이번 시즌이 끝이라는 말에 묘한 아쉬움을 느꼈기에 아무 말 없이 로드를 바라보았다.
눈치 없는 할리가 계속 말했다.
"아 맞다. 끝이 아니구나. 전력 분석관? 그거 하신다고 했죠?"
"그래."
"전력 분석관으로서 저 행동이 우리 팀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나요?"
할리의 말에 알렉산더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옆에서 말없이 스트레칭을 하던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할리, 티케가 못 만지게 한다고 질투하면 안 돼."
"내가? 질투를?"
"캡틴, 할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제 티케 만지려다가 물려서 삐져서 이러는 거거든요."
라이언의 말에 알렉산더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삐진 적 없거든."
"티케 만지는 법 알려줄까? 아직도 무섭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만질 수 있는지는 알겠더라."
"···정말?"
"이거 봐. 사실 만지고 싶잖아."
"젠장."
알렉산더는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라이언에게 속아 부끄러워졌는지 할리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도망쳤다.
라이언이 알렉산더에게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리에게 악의는 없을 거예요. 그냥 평소대로 생각 없이 말한 거예요."
라이언은 할리가 알렉산더에게 이번 시즌이 끝이지 않냐고 말하는 걸 듣고 끼어든 모양이었다. 처음 프로 무대에 올라왔을 때는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서 그저 약해 보이는 소년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배려할 수 있는 청년으로 잘 성장한 라이언이었다.
"2년이나 봐 왔는데 당연히 알고 있다. 신경 안 쓰니까 어서 훈련이나 해라."
"예. 캡틴도요."
알렉산더는 라이언이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어느새 돌아온 할리도 제 나름대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로드도 어느새 티케를 내려놓고 요가를 시작하고 있었다. 중간마다 티케와 눈을 마주치긴 했지만.
셋의 프로다운 모습을 볼수록 알렉산더는 자신이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어린 티가 잔뜩 났던 세 명의 로컬보이는 어느덧 팀에 완벽하게 적응해 있었다. 프로 데뷔 2년 차 임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늘 성실하게 훈련하는 셋이었다.
세 명의 로컬보이는 같은 나이 때의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은 혼자였지만, 이들은 셋이었다. 팀의 기둥이 될 선수가 이렇게나 늘어났으니 틀림없이 노팅엄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렇기에 알렉산더가 신경 쓰는 건 미래가 아닌 지금이었다.
'약속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발버둥 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자신은 어린 팬과 했던 약속대로 잘 발버둥 치고 있는 걸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강도의 훈련과 끔찍한 식단조절을 통해 유지하고 있는 몸이었다.
물론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해서 매번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잭슨 감독은 선수들과 정을 쌓는 타입의 감독은 아니었다.
선수 명단을 구성할 때도 철저하게 효율을 추구했고, 그렇기에 알렉산더의 폼이 올라왔더라도 더 쓰임새가 많은 할리와 알버트를 주로 출전시켰다.
알렉산더가 출전할 수 있을 때는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경기의 흐름을 못 잡고 있거나 경험이 부족한 할리가 멘탈을 놔버렸을 때, 또는 알버트가 너무 지쳤을 때뿐이었다.
"캡틴! 아니면 로드! ···둘 다 있네."
그때, 코치 하나가 들어오며 알렉산더와 로드를 순서대로 찾았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갸웃하자 코치가 말했다.
"감독님이 찾으시는데··· 둘 중 하나만 가면 될 것 같아. 선수단에 전달할 게 있다고 그러신다."
알렉산더가 습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티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로드가 벌떡 일어났다.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캡틴은 훈련하세요."
"아, 고맙다."
"파이팅이에요."
시즌 중반부터 로드가 사실상 캡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만 간섭했다. 로드가 워낙 완벽하게 해내고 있어서 최근에는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이제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팀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할 로드는 단장이 인정한 프리미어리그 급 재능을 가졌고, 나사 하나 빠진 할리와 몸이 약한 라이언과 함께 지내서 그런지 선수들을 챙기는 데 몹시 능숙했다.
무엇보다 2년 동안 지켜봐 왔기에 잘 알 수 있었다.
로드는 틀림없이 훌륭한 주장이 될 것이라고.
조금 허전하기는 했지만, 아쉽다거나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앞으로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두 경기에 한 번 후보로 출전하는 주제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동안 충분히 할 만큼 했잖아. 여기서 뭘 더해?'
'넌 늙었어. 지금 이 팀에는 굳이 네가 없어도 된다고. 방해만 될 거야.'
정말 잠깐 쉬었는데 알렉산더의 머릿속에는 갖가지 유혹들과 안 좋은 생각들이 자리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바벨을 잡았다.
모든 유혹은 이 지겹고 힘든 훈련을 그만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남은 경기는 네 경기.
알렉산더는 고작 한 달을 참지 못해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
"보스도 너무해! 2-0으로 이기고 있는데도 왜 캡틴 대신 날 넣는 거야?"
44라운드 경기가 끝나고, 잭슨 감독의 경기 후 연설까지 끝난 후에 할리가 투덜거렸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은 알렉산더를 존경했고, 좋아했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은퇴 날까지 한 경기라도 더 뛰길 바랐다. 할리가 포문을 열자 선수들이 하나둘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로드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이 한마디 보태면 주장이 감독을 욕하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조용히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 분위기를 감독과의 갈등까지 끌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 했다.
선수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할리. 네 마음은 고맙지만, 감독님의 판단이 옳다. 2-0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점수 차이다. 지난 경기에서 무승부를 하는 바람에 2위에게 1점 차로, 3위에게 2점 차로 쫓기고 있는 지금은 무조건 승리를 위해 안전한 경기 운영을 해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할리는 아직 스무 살이 안 된 어린 선수였다. 좋은 걸 좋다고 싫은 걸 싫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더가 부드럽게 웃으며 선수들을 돌아봤다.
"할리, 그리고 너희들. 나는 벤치에 앉아 팀의 일원으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쁘다. 3부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노팅엄이라는 대단한 팀에 너희들 같은 실력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내 역할이 있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는 꼭 경기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 팀이 이기면 내가 이기는 거 아니겠나?"
선수들이 고개를 숙였다.
알렉산더가 계속 말했다.
"나를 생각해서 화내줬다는 건 안다. 고맙다. 하지만, 우리 팀이 우승해서 2부 리그로 화려하게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경기에 뛰든 안 뛰든 좋을 거다. 그게 내 마지막이자 유일한 목표니까."
여러 선수를 둘러보던 알렉산더는 마지막으로 할리를 바라봤다. 할리는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침울한 목소리로 알렉산더에게 답했다.
"알겠어요. 캡틴."
*
리그 45라운드는 원정 경기였다.
2, 3위의 경기 결과에 따라 노팅엄이 2부 리그 승격 직행권을 따낼 수도 있는 중요한 경기였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원정을 떠나지 못하는 팬들을 배려해 홈 경기장에서 경기를 볼 수 있도록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원정 경기 때는 열지 않는 푸드 코트를 열었다.
그래서 홈 경기장에는 선수들이 없었음에도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관중은 선수들이 없는 필드를 향해 어마어마한 응원을 쏟아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필드 중앙에는 수많은 카메라가 관중의 응원을 담고 있었다.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긴 현장의 광경은 원정을 간 노팅엄의 선수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구단과 다음 시즌 메인 스폰서에서 준비한 VR 기계들로.
-안토니오 페레즈!
-와아아아아!
(중략)
-로드 테일러!
-와아아아!
(중략)
-라이언 브라우니!
(중략)
아나운서가 등 번호 1번부터 선수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고, 관중은 큰 함성으로 답했다. 교체 명단에 포함된 선수들뿐만 아니라 1군에 포함된 선수 모두 호명했다.
선수들은 경기장 한복판에서 함성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전의를 충전하고 있었다.
잭슨 감독은 이게 선수들에게 큰 동기부여를 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귀중한 하프 타임 시간을 내어준 것이었다.
평범한 3부 리그의 드레싱룸이었기에 최신 VR 기계를 선수 인원에 맞춰 들여오긴 어려웠다.
그래서 VR 기계를 쓰지 않은 알렉산더와 감독 잭슨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킴 단장이 한 일입니까?"
"당연하지."
잭슨 감독의 두 눈에는 김도운에 관한 굳은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잭슨이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원망스럽진 않나?"
"괜찮습니다."
뭘 말하는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잭슨은 시즌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알렉산더를 출전시키지 않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자넬 선발이든 교체든 내보내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지."
"노팅엄의 수만 명의 팬과 선수들, 그리고 구단의 미래가 감독의 선택 하나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넨 참··· 대단한 선수야."
잭슨은 진심으로 감탄한 것 같았다. 그런 잭슨을 보며 알렉산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감독님이 몹시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팀의 승리를 위한 길이라는 걸 알기에 참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인내가 대단하다는 거네. 다른 선수들이었다면 절대 못 참았을 거야."
"그렇습니까."
알렉산더는 덤덤하게 답했다. 잭슨은 그런 알렉산더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
"예."
"나는 자넬 인간으로서 존중하네.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도 그동안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거네. 모든 걸 종합적으로 보고 내가 판단했을 때 가장 나은 선수를 선발로 내세울 거네."
"감독님 뜻대로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잭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알렉산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반전, 알렉산더는 교체로 투입됐고, 3-1로 이기고 있던 팀에 한 골을 더해 4-1로 만들었다.
*
마야) 캡틴! 지난 경기에서 정말 멋졌어요. 내일 최종 경기에서도 멋진 모습 기대할게요. 우승까지 앞으로 1승 남았어요!
알렉산더) 고맙다.
마야의 메시지를 확인한 알렉산더는 심호흡했다.
알렉산더는 잭슨의 방문 앞에 있었다.
잭슨은 경기 전날 가끔 선수들을 불렀는데 평소에는 명단에 들어있다가 경기 명단에 들어가지 못하는 선수, 아니면 평소에 출전하지 못하는데 이번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는 선수들을 불러 통보해줬다.
잭슨 앞에서는 덤덤할 수 있었지만, 역시 알렉산더는 선발로 출전해 자신의 생에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싶었다.
그때, 방안에서 잭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 앞에 와 있지? 들어와."
"예."
머뭇거리던 알렉산더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잭슨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알렉, 내일 선발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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