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70화 (70/245)

< 23. 레전드 (2) >

"알렉, 내일 선발 명단에 넣을 테니까 컨디션 관리 잘하게."

마음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들은 말이었기에 알렉산더는 당황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잭슨은 그런 알렉산더를 흘긋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할리와 함께 공격을 맡아 줘."

"예···."

"우리는 리그 1위, 상대인 선더랜드는 리그 3위에 우리와 승점 2점 차야. 만약 선더랜드가 우리를 잡으면 2위 팀의 결과에 상관없이 2부 리그로 바로 올라갈 수 있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겨도 승격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지. 그러니까, 우리 팀은 상대 팀을 조급하게 만들고, 그 틈을 노려야만 해. 그게 이번 경기의 전체적인 운영 방향이야."

알렉산더 또한 잭슨의 의견에 깊게 수긍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전부 수비적으로 운영할 거야. 상대가 선제골을 넣지 않는 한, 경기 내내 자네와 할리 둘이 역습을 주도해야 한다는 거지. 이해했나?"

"예."

"좋아.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네."

"···정말입니까?"

"벤치에서 보는 것과 필드 위에서 보는 건 다르잖나. 난 자네의 판단을 믿어."

평소에도 그랬지만, 선수들을 엄격히 통솔하는 건 다른 것보다 유난히 신경 쓰던 잭슨이었기에 알렉산더는 잭슨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알렉산더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더 궁금한 거 있나?"

"예."

알렉산더는 잭슨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의 당혹스러움을 정리한 상태였다. 대신 새로운 의문이 생겨 있었다.

알렉산더가 물었다.

"제 은퇴 경기라고 배려해주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잭슨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알렉산더에게 되물었다. 알렉산더는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알버트가 저보다 더 나으니까요. 후보로 간다고 해도 무려 1부 리그로 이적이 확정된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 대신 저를 넣는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절 배려해주신다고 생각한 겁니다."

잭슨이 천천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잭슨이 알렉산더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알렉, 내일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

"예. 만약 진다면 승격 직행에 실패하게 되죠. 비기면 아마도 2위가 될 거고, 이겨야만 확실히 우승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묻겠네. 내가 그런 중요한 경기에서 선수 하나 배려하겠다고 전술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엉뚱한 선수를 집어넣을 사람인가?"

말이 계속될수록 잭슨의 눈은 점점 찌푸려졌고, 목소리는 점점 격양됐다.

"알렉, 날 우습게 보지 말게."

알렉산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잭슨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지난 경기 때 자네와 그런 얘기를 했던 이유는 자네가 괜히 마지막 경기를 기대해서 몸 관리에 실패해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투입하지 못할까 염려됐기 때문이야. 나는 몇 주 전부터 자넬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어."

"예? 대체 왜···."

"나는 선수의 정신적인 면을 몹시 중요하게 보는 감독이네. 내일 경기는 자네의 프로 마지막 경기이자 자네가 헌신한 노팅엄이 2부 리그로 바로 승격할지를 정하는 경기지. 자넨 아주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하지만, 자네는 잘 견디고 있지. 몇 주간 꾸준하게 컨디션을 관리하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있었다네."

알렉산더는 잭슨의 말끝이 부드러워졌다고 느꼈다.

"견뎌낼 수 있는 압박감은 큰 동기부여가 되지. 자네는 지금 우리 팀에서 가장 몸 상태가 좋고 다른 선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동기부여가 되어있는 상태야. 내가 보기엔 알버트나 할리에 비해 실력 또한 크게 부족하지 않아. 그동안은 그저 자리가 두 개밖에 없어서 조금이라도 나은 둘을 내보냈던 거야."

알렉산더는 입을 일자로 다물며 입술을 입안에 집어넣어 살짝 깨물었다. 잭슨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좋게 평가해주고 있는데 자신은 배려해주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잭슨은 알렉산더를 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또, 자네는 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해. 자네가 들어가면 다른 선수들도 평소보다 훨씬 더 열심히 뛰게 될 거야. 내일 경기처럼 중요한 경기라면 더. 2년 동안 봐 와서 잘 알고 있지. 자, 이제 왜 자넬 선발로 넣었는지 알겠나?"

"···그렇군요."

알렉산더는 어느새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꾹 다문 입을 열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마음에 이 문장을 새기는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하겠습니다."

알렉산더의 대답을 들은 잭슨이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슨은 알렉산더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알렉산더가 잭슨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알렉산더의 단단한 손을 잡은 잭슨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회 없는 경기로 만들어보자고."

**

노팅엄시의 한 펍에는 나를 비롯한 노팅엄 FC의 모든 소규모 서포터즈의 리더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내일 경기에서 진행할 알렉산더의 은퇴식을 마지막으로 점검해 보고 있었다.

진지한 대화가 한참 동안 오가던 중, 오크스의 리더 맥켄지가 물었다.

"그런데 킴. 내일 알렉산더가 선발로 나올까?"

"저도 모르죠. 감독님이 알아서 하는 건데."

"안 나오면 어떡해?"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대로 하는 거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내 심드렁한 말에 리더들이 '우우~.'소리를 냈다.

나는 이들을 보며 헛웃음만 쳤다. 다들 이런 장난을 치면서라도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해보려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펍이라는 맥주의 공간에 있는데도 술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은퇴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셔도 괜찮다고 했지만, 소규모 서포터즈의 리더들이 상의한 결과 <포레스트> 전체에 내린 금주령이 내려졌다.

내일은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맥켄지가 말했다.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알렉산더가 선발로 나왔으면 좋겠네."

"저도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서포터즈 모두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더들이 테이블 구석에 앉아 유일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거나하게 취한 이 할아버지의 이름은 오스카 뮐러. 분데스리가의 강팀 도르트문트의 지난 대 서포터즈 리더였다.

나는 이 사람을 고용해서 서포터즈의 리더들에게 소개해줬고, 서포터즈에 소속된 팬들은 이 사람에게 응원으로 유명한 도르트문트 특유의 응원용 퍼포먼스를 배웠다.

전부 알렉산더의 은퇴식을 멋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포터즈에 소속된 팬들은 대부분 직업이 있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여름에 쓸 휴가까지 당겨쓰고, 저녁에 모이는 등 노력하며 연습해왔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알렉산더가 선발이 아니더라도 꼭 경기에 나왔으면 했다.

맥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우리끼리 얘기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다시 은퇴식 준비나 하자고. 벤자민. 일반 팬들에게는 연락 마쳤지?"

*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오라네요."

삼 대(三 代) 모두 노팅엄 FC의 팬인 리처드가의 2대, 웨인 리처드가 1대 고든에게 말했다.

"아이고, 경기 전에 동네 영감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취소해야겠구나."

"당연하죠."

"휴고한테는 네가 전할 거냐?"

"예. 지금 숙제하고 있을 거예요."

그때, 식탁 맞은편에서 고든과 웨인을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던 웨인의 부인, 리사가 입을 열었다.

"경기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간다고요? 축구가 그렇게 좋아요?"

"축구도 좋지만··· 정확히 말하면 노팅엄이 좋은 거지?"

"에휴, 가끔 시간 나서 놀러 가자고 하면 축구, 그놈의 축구. 가끔은 경기장을 확 불태워버리고 싶다니까요?"

리사의 점점 싸늘해지는 목소리에 찔리는 게 있는 웨인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려 엉덩이를 움직였다. 하지만, 고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들아. 내가 휴고한테 직접 전해주마."

"아버지···."

그때, 리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구를 안 보던 웨인을 다시 꼬드긴 게 누굴까요. 고든?"

반쯤 일어났던 고든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고든과 웨인은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좌불안석이었다.

리사가 말했다.

"지난주에는 홈 경기가 없었는데도 경기장에 갔죠? 경기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돌아왔고요."

"중요한 연습이 있었어··· 미안."

"난 축구에도 관심 없고, 노팅엄 팬도 아니니까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고든이나 당신이나 휴고가 매번 축구장에 가도 그런가 보다 하면서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그게 일상생활에 문제가 되면 안 되죠. 웨인, 다음 날 당신이랑 휴고 모두 늦잠자서 회사랑 학교에 지각했잖아요."

이날 리사는 자신의 친구들과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리사는 여행지에서 학교와 회사에서 아들과 남편이 오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리사는 여행에서 일찍 돌아와 크게 화를 냈었다.

웨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에는 안 그랬잖아요. 지난주에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경기장에서 파티라도 했나요? 중요한 연습이 대체 뭐예요?"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데뷔했던 선수가 은퇴하거든···."

리사가 은퇴한다는 선수가 누군지 생각하는지 멈칫했다가 말했다.

"알렉산더 샌더스라고 했나요?"

"맞아. 그날은 경기 끝나고 은퇴식을 연습했어. 알렉산더가 원정을 떠난 틈에 몰래."

"당신 같은 일반 팬들까지 모아서요?"

"응. 다 같이 해야 하는 거라서···."

분명 리사는 화를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점 호기심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리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대체 뭔데요?"

*

트렌트 대학교의 도서관에 졸린 눈을 비비며 막 도착한 손민국은 어젯밤과 똑같은 모습으로 공부 중인 마야를 발견했다.

"···마야? 너 설마 집에도 안 다녀온 거야?"

"응. 월요일 과제를 미리 제출해서 주말 동안 편하게 쉬려고."

마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손민국이 마야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물었다.

"코피랑 히메나는?"

"은퇴식 준비해야 한다고 밴드 멤버들이랑 경기장에 갔어."

"정말? 걔들 기말고사 정말 포기한 건가? 몇 주 전부터 계속 연습하는 것 같던데."

마야는 여전히 레포트 전용 용지에 눈을 고정한 채 펜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손민국에게 얘기했다.

"유급하겠대. 요즘 뮤튜브 반응도 좋다고 다음 학기도 휴학하고 제대로 해 보겠다고 하고."

"와우···."

그때, 마야가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다 했다."

"벌써?"

"응. 이따 보자. 경기 시작 한 시간 전까지 도착해야 하는 거 알지? 난 너무 졸려서 가 봐야겠어."

마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고 떠났다.

마야와 경기 전까지 함께 과제를 할 계획이었던 손민국은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좌절감은 잠시였다. 과제량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

잠깐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경기 한 시간 전까지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손민국은 과제에 집중해야만 했다.

마야와 맘 편히 경기를 보고 경기 후에는 함께 놀기 위해서.

**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로드는 김도운에게서 오늘 은퇴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들었다.

"······한다는 거야. 알겠지? 그러니까 경기 끝나면 캡틴을 센터서클 한가운데로 데려가. 오늘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말이야. 그리고 선수들한테도 미리 말해놔서 우리가 이겨서 우승하더라도 알렉산더 주변에 접근하지 말라고 해줘. 다 필드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알겠어요. 지금 바로 선수들에게 전할게요."

"그래, 오늘 경기 잘해라."

"당연하죠."

로드는 김도운과 헤어지자마자 드레싱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수들을 하나에서 셋 정도씩 불러 김도운이 말한 내용을 전달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건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한다? 알렉산더는 몰라야 해."

할리에게는 불안해서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어떤 교체 선수가 투입될지도 몰랐기에 로드는 교체 명단에 들어간 선수들도 전부 불러서 얘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로드가 선수들을 밖으로 데려가는 걸 계속 지켜보던 알렉산더를 불렀다.

드레싱룸의 출입문 바로 앞에서 알렉산더가 물었다.

"선수들을 따로 불러서 무슨 말을 해 준 거냐?"

알렉산더는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숨기는 게 있는 로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굴려 답했다.

"선수마다 뭘 잘하는지 얘기해 줘서 사기를 북돋아 줬어요."

로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진짜로 그렇게 할걸··· 이라고 생각하며 후회했다.

로드의 속내가 어떻든 알렉산더는 미소를 지었다.

"좋군.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될 거다. 그럼 나한테도 할 말이 있겠구나."

급조했던 말이었기에 당연히 알렉산더에게 할 말은 준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동경했던 선수이자 이 팀의 레전드인 알렉산더와 오늘 이후 필드에서 함께 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로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하고 싶은 말을 찾아냈다.

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우실지도 모르겠지만···."

"얼마든지 말해라."

"오늘 경기에서요···."

"그래."

"어린 시절의 제가 동경하던 그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부담을 주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알렉산더의 얼굴은 몹시 평안해 보였다.

알렉산더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로드의 부탁에 답해줬다.

"알겠다."

< 23. 레전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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