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레전드 (3) >
드레싱룸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터널에 노팅엄의 선수들과 선덜랜드의 선수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터널 끝에서는 여러 응원가가 뒤섞인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선수들은 등 번호순으로 서 있었다.
아직 알렉산더의 등 번호를 물려받지 못해 4번을 달고 있는 로드를 5번 라이언이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로드가 고개를 홱 돌리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조용히 얘기할게. 캡틴한테 들리면 안 돼서."
경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린 채였던 로드가 천천히 표정을 풀며 맨 앞에 서 있는 알렉산더를 살폈다. 알렉산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터널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있었다.
로드나 라이언에게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로드가 라이언에게 작게 말했다.
"알겠어."
라이언이 더 작은 목소리로 로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부터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오늘 지면··· 그래서 3위로 떨어져서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되면··· 알렉산더 은퇴식은 어떻게 되는 거야?"
오늘 경기에서 이기거나 비기면 무조건 2부리그로 승격하지만, 3위로 떨어진다면 지난 시즌 치렀던 플레이오프를 또 치러야 했다.
3~6위 팀들끼리 붙어 한 팀만 올라갈 수 있는 가혹한 플레이오프를.
로드 또한 이걸 알고 있었기에 김도운에게 은퇴식에 관해 들을 때 물어봤었다.
로드는 김도운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라이언에게 말해줬다.
"일단,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면 오늘 은퇴식은 연기된대. 하지만, 오늘 꼭 열려야만 한대."
"꼭?"
"응. 오늘 할 행사 연습한다고 리그 최종전 표만 한 달 전에 전부 따로 팔았었잖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서포터즈는 플레이오프까지 당연히 따라올 테니 상관없겠지만, 일반 팬은 개인 사정이 생겨서 플레이오프 때 참여 못 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저번 주에 연습했던 게 싹 날아가 버리는 거고··· 그래서 킴이 오늘 꼭 이기거나 비겨달라고 말했어."
오늘을 위해 준비해온 팬들도 허탈해질 테고,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같은 좌석에 팬들을 배치해야 한다는 큰 문제도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무척 복잡해질 게 뻔했다.
똑똑한 라이언은 로드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오늘은 진짜 이기거나 비겨야겠네. 감독님 말대로."
*
로드와 라이언이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맨 앞에 서 있는 알렉산더는 천천히 터널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경기를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로 만들자.'
드레싱룸에서 잭슨 감독이 말했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너희들의 몸 상태도 최고다. 계획대로만 한다면 분명히 이길 수 있다.'
알렉산더는 잭슨이 이어서 했던 모든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축구계에 영원히 남을 동화의 주인공들이다.'
잭슨은 먼저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첫 페이지부터 함께했던 선수도 있고.'
이어서 로드, 라이언, 할리를 차례로 봤다. 그다음에는 바비와 감자 머리 선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중간에 등장한 선수들도 있지.'
잭슨의 말이 계속될수록 선수들의 눈은 잭슨에게 집중됐다.
'노팅엄은 5부 리그까지 떨어졌던 팀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필드 위에서 뛰는 너희들이다.'
선수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잭슨의 목소리가 드레싱룸을 쩌렁쩌렁 울렸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축구를 하고 있지? 처음에는 꿈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같은 하부 리그의 축구인들에게 필요한 건 결국 돈이다. 이 팀에는 특이한 녀석들이 많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대부분 그럴 거다.'
잭슨이 선수 몇 명을 흘깃 보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너희들도 축구 선수로서 이름을 남기고 싶을 거다. 그럴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팀이 나락에 떨어졌을 때도 꿋꿋하게 버텼던 멋진 팬들을 비롯해 이 팀에 소속된 모두가 너희를 죽을 때까지 기억해 줄 것이다. 또한, 노팅엄의 동화 같은 부활을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매체에서 짤막하게나마 다룰 거다. 이 팀은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은 이 팀의 일원이니까.'
잭슨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뜸을 들였다. 선수들은 몸이 달아오르는지 어깨를 들썩거리거나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였다.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잭슨이 목소리를 점점 높이며 말했다.
'프로는 돈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명예를 위해 싸워라.'
'알겠습니다. 보스!'
'이번 시즌 내내 경기장을 가득 채워준 멋진 팬들을 위해, 이겨라.'
'가자!'
'예!'
알렉산더는 그 누구보다 우렁차게 대답했다.
잭슨은 그동안 봐왔던 감독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술적인 역량뿐만 아니라 동기부여에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선수들은 전부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하게 긴장하는 선수도 없었고, 너무 들떠 보이는 선수도 없었다.
"저기, 샌더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산더는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 악수나 한 번 하자니까? 오늘 내내 부딪혀야 할 사이인데."
목소리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건 선덜랜드의 주장인 대니 영이라는 중앙수비수였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골키퍼를 살짝 바라봤다. 골키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니 영이 정말 자신을 불렀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알렉산더는 사과하며 손을 내밀었다. 대니 영이 알렉산더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렇게 중요한 경기 전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휘슬이 울리지 않았지만, 경기는 이미 시작된 거였다. 대니 영은 알렉산더에게 신경전을 걸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부드럽게 답했다.
"중요한 경기이니만큼 중요한 생각을 했지."
알렉산더의 능숙한 대답에 대니 영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대니 영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더 강하게 트래시 토크를 걸었다.
"너희 감독은 우리를 우습게 보는 건가? 너같이 한물간 선수를 팬 서비스로 넣어주는 걸 보면 말이야."
"뭐?"
뒤에서 대니 영이 한 소리를 들은 로드를 비롯한 선수들이 발끈하려 했다. 알렉산더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알렉산더는 그의 도발에도 웃음만 나왔다.
"트래시 토크를 해야 할 만큼 날 좋은 선수로 보고 있나 보군. 고맙다."
알렉산더가 두 번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자 대니 영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서로에게 중요한 경기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알렉산더는 악수를 끝내고, 다시 움직여서 줄로 돌아왔다. 그리고 터널 끝에 보이는 필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힘찬 걸음 소리와 함께 알렉산더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오, 알렉스. 오늘 은퇴할 수도 있다지?"
오늘 경기의 주심을 맡은 필립 스미스였다.
알렉산더는 긴 경험만큼이나 심판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부심들 또한 알렉산더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필립, 조지, 맥. 대기심은 브라운이네요. 오늘 잘 부탁해요."
"알렉스를 이렇게 보내기는 너무 아쉬운데··· 몇 경기 더 뛰게 선덜랜드 쪽으로 판정해 줘야 하나."
친한 사이에 하는 농담이라는 거 다 알았지만, 알렉산더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알렉산더가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자 필립이 알렉산더의 어깨를 힘있게 두드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늘 그렇지만 봐주는 거 없어."
"하하. 당연하죠."
심판들이 각자 일렬로 나란히 선 선수들 앞에 섰고, 필드를 향해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주심 필립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역시 노팅엄 경기장은 들어갈 맛 난다니까."
터널을 지나자마자 심판들과 선수들에게 쏟아진 건 알렉산더의 응원가 중 하나였다. 원정 팬을 제외한 모든 관중이 하나 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 알렉산더~ 오~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들뜨려는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이번 시즌 내내 경기에 들어가기 전 외웠던 주문을 중얼거렸다.
"집중하자. 미리 생각하자. 빨리 움직이자."
선수들 간의 악수가 끝나고 진영을 정한 후에 노팅엄의 선수들이 모였다.
알렉산더가 선수들에게 다가오자 로드가 튀어나와 말했다. 로드는 화가 나 보였다.
"캡틴. 제가 코너킥이나 프리킥 때 저 대니 영이라는 자식을 눌러버릴게요. 오늘 경기에서는 옐로카드 하나 받아도 되니까··· 조금 거칠게."
알렉산더가 흥분한 로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그래도 난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아 둬라. 신경전도 경기의 일부고, 중요한 건 우리 팀의 승리뿐이니까."
"알겠어요. 캡틴."
로드와 알렉산더는 함께 선수들에게 갔다.
선수들은 알렉산더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 전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리가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 캡틴, 아까 감독님처럼 멋진 말 한번 해봐요."
할리의 말에 알렉산더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말없이 선수 하나하나를 바라봤다.
로드, 할리, 라이언, 바비, 한스, 요한, ···, 그리고 감자 머리 선수들까지.
자신만 빼고 모든 선수가 바뀌어 있었다.
5부 리그로 떨어졌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의 선수들은 당장이라도 노팅엄을 나가고 싶어 했다. 노팅엄을 그저 잠깐 지나가는 직장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경기 전에 이렇게 모아두면 그들이 의욕이 없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선수들에게서는 의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각자의 목표를 위해 팀을 떠날 선수들도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노팅엄의 선수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길게 말할 생각은 없다."
선수들이 일제히 알렉산더를 바라봤다.
"나는 우승하고 싶다. 팀을 2부리그로 돌려놓고 싶다. 오늘, 여기서 우리 손으로 직접 결정짓자."
*
알렉산더는 로드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로드가 동경했던 모습처럼 2부리그에서도 해트트릭을 꽂아 넣었던 그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난관이 많았다.
"역시 별거 아니었잖아."
선덜랜드의 주장 대니 영이 시도 때도 몸을 부딪치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민첩함에 맥없이 몇 번 공을 빼앗겼다. 자신보다 경험이 부족해 말싸움에서 밀리긴 했지만, 그는 이번 시즌 3부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로드와 함께 뽑힌 이번 시즌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알렉산더에게는 아직 남은 게 있었다.
"패스!"
"또 뺏기게?"
알렉산더의 외침을 들은 바비가 패스했다. 알렉산더는 패스를 외치기 전부터 앞으로 뛰고 있었다. 대니 영이 알렉산더를 쫓아오며 물었다.
알렉산더의 몸은 3부 리그 선수라기에는 느리고, 둔했다. 그렇기에 미리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수십만 혹은 수백만 번을 연습하고 실전에서 써 온 볼을 다루는 기술만큼은 전성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림대로 바비의 패스를 잡아두지 않고, 바로 왼쪽 측면을 향해 길게 패스했다.
빠른 템포의 패스에 선덜랜드의 수비수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우측면의 감자 머리 선수는 무사히 공을 받았고, 크게 차 놓고 달렸다. 순식간에 선덜랜드의 측면이 붕괴됐다. 노팅엄의 찬스였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느긋하게 쫓아오다가 다급하게 페널티박스 안으로 복귀하는 대니 영을 쫓아가며 말했다.
"어때, 늙은이도 쓸만하지?"
대니 영이 대답하려는 순간 감자 머리 선수의 긴 크로스가 올라왔다.
공은 멋진 곡선을 그리며 할리의 머리로 향했다.
할리는 특유의 탄력으로 선덜랜드의 수비수보다 머리 하나 높게 뛰었고, 공에 머리를 정확히 갖다 댔다.
공은 선덜랜드 골키퍼의 손을 스쳐 지나가며 골망을 갈랐다.
전반전 20분 만에 노팅엄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 23. 레전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