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73화 (73/245)

< 23. 레전드 (5) >

<앞으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알렉산더의 약간 질책하는 느낌이 나는 말에 팬들과 서포터즈가 웅성웅성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다음 말에 웅성거림은 전부 환호성이 됐다.

<이건 너무··· 대단하잖아요.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예요. 다른 선수들이 은퇴할 때 힘들지 않겠습니까? 로드나 할리나 라이언이 만약 이 팀에 끝까지 남는다면··· 또 다른 선수가 이 팀에서 십 년 넘게 뛴다면··· 이 정도로 해 줄 자신 있어요?>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잦아들 때쯤 김도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포터즈 리더 분들이 그런 거 신경 안 쓴답니다. 그때는 그때 일이고, 지금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것뿐이랍니다.>

<맞다! 맞아!>

팬들이 동의하며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알렉산더의 웃음이 마이크를 타고 경기장에 퍼져나갔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여기까지 온 건 네 덕이 정말로 컸다. 고맙다. 도운.>

<아니요. 캡틴이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무튼, 저는 이제 마이크 끄겠습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크가 꺼졌다. 김도운이 온 후 팀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걸 아는 팬들은 김도운의 이름을 약 10초 동안 연호했다.

알렉산더는 팬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최고입니다. 최고예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또 한 번의 환호성. 이어지는 다음 말에 함성은 절정이 되었다.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노팅엄은, 이제 2부리그로 돌아갑니다.>

거의 1분간 함성이 계속됐다. 이제 알렉산더를 위한 카드섹션은 전부 엉망이 되었다. 팬들과 알렉산더는 그래도 좋았다. 이미 모든 걸 전했고, 전부 받았으니까.

알렉산더는 깊게 심호흡한 후,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은퇴합니다.>

팬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알렉산더는 앞에 앉은 친구에게 말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제 제가 사랑했던 많은 걸 포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준비해온 말은 없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오늘 경기를 되새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먼저 알렉산더의 눈에 자신이 입고 있는 땀에 젖은 녹색 유니폼이 보였다.

<저는 이 유니폼을 입고 이 필드에 나서는 걸 정말 좋아했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녹색 옷을 입고 이곳에 서 있으면 여러분을 대표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경기 전에 드레싱 룸에서 선수들이 긴장을 풀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떠올랐다.

<드레싱 룸은 제 집보다 편했습니다. 이곳에서 선수들과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웃기는 선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긴장도 싹 날아갔었죠.>

이어서 오늘의 결승 골을 넣은 순간이 떠올랐으며

<경기 중에는 역시 골을 넣는 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기 내내 울려 퍼졌던 자신의 응원가가 떠올랐다.

<가장 좋아하는 건··· 팬들이 불러주는 응원가였습니다. 제 스마트폰에는 팬들이 경기장에서 직접 불러준 응원가를 녹음한 파일이 잔뜩 있어요.>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아쉬움을 느꼈다. 미리 말해줬었더라면 이 감사한 마음을 다 전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자신을 보고 있는 이만 오천여 명의 팬들의 시선에서 알렉산더는 자신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노팅엄에서 뛰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걸 알지 못했을 겁니다.>

알렉산더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저도 더 뛰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늙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훈련을 소화하고 90분 동안 경기에 뛸 힘이 없습니다.>

팬들은 이해한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일 퍼레이드를 하고, 일주일을 쉰 후 저는 새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저는 축구 선수가 아니게 되는 것이죠.>

알렉산더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바람이 있었다.

오늘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니 이 정도는 요구해도 될 것 같았다.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선수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제 응원가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노팅엄의 경기장에는 몇십 분 동안 알렉산더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그 후 우승 트로피 세레머니까지 해야 해서 노팅엄의 팬들과 서포터즈는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

일주일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일단, 마지막 경기 다음 날에는 제임스의 소원대로 전용 버스를 빌려서 퍼레이드를 했다.

노팅엄시와 경찰의 협력을 받아 퍼레이드를 진행했고, 퍼레이드를 시작하며 노팅엄시의 일부 가게에서는 이벤트를 열었다.

일주일 동안 노팅엄의 엠블럼이 붙어있는 가게에서는 50% 할인을 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노팅엄시의 또 다른 팀 노츠 카운티는 6위로 아슬아슬하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쪽 팬들은 우리의 퍼레이드를 보며 몹시 배 아파했다고 들었다.

아무튼, 우리를 태운 버스는 경기장에서 출발해 시 광장에 무사히 도착했고,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선수들이 한마디씩 했다.

<감사합니다. 어제 정말 행복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산더부터 시작해서

<다음 목표는 프리미어리그입니다!>

할리 등 여러 선수가 한마디씩 했다. 마이크는 감독 잭슨에게 갔다가 구단주 제임스에게 갔고, 마지막으로 내게 돌아왔다.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직원들이나 이게 끝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제가 오고 아직 두 시즌밖에 안 지났어요.>

<오오?>

광장에 모인 팬들이 웅성거렸다. 이 모습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나는 연설 체질인 것 같았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6년 내로 프리미어리그에 가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2년 지났습니다.>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목표는 중위권입니다. 그리고 다음 시즌부터는 계속해서 승격을 노릴 겁니다.>

팬들의 환호성이 커지다 못해 지진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임스나 잭슨 감독이 날 보며 슬쩍 웃는다. 선수들은 잘한다고 손뼉까지 치고 있다.

이건 전략적인 연설이었다.

목표를 공개적으로 말한 건 나니까 만약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화살은 나에게 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직원들이나 부담 없이 시즌을 보낼 수 있다.

<이상입니다.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광장에 모인 모든 팬의 환호를 받으며 우리는 퍼레이드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영상은 이날 영국의 여러 뉴스에서 사용되었다.

*

-기적 같은 일이 영국의 한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노팅엄 FC. 4년 전, 구단주의 빚을 떠안고 5부 리그로 추락했던 팀입니다.

아나운서가 사라지고 경기장에서 3부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노팅엄의 선수들과 팬들이 화면에 나왔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빚더미였던 이 팀은 불과 4년 만에 3부 리그를 우승하며 챔피언십리그(2부리그)로 돌아왔습니다. 이 팀에 관해서는 할 얘기가 많지만, 시작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영상이 바뀌었고, 표정이 좋지 않은 4년 전의 알렉산더가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왔다.

-이 팀의 주장인 알렉산더는 노팅엄 FC가 5부 리그로 추락했을 때,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터뷰였죠.

알렉산더 :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팀을 2부리그로 되돌려놓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그는 이 약속을 지켜냈습니다. 노팅엄의 팬들은 약속을 지킨 알렉산더에게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연습한 카드섹션으로 보답했습니다.

노팅엄 팬들의 카드섹션이 순서대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라는 부분에서 영상이 멈췄다.

-정말 감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알렉산더 샌더스와 마찬가지로 노팅엄 FC의 재기에 큰 역할을 한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오늘 했던 퍼레이드 영상이 나왔다. 먼저 제임스가 나왔다.

제임스 : 정말··· 말을··· 못하겠네요. 2부리그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 팀을 끝까지 믿어준 멋진 팬들과 직원들··· 그리고 우리 팀에 헌신해준 선수들과 코치진들에게 감사합니다. 특히! 내 친구 도니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제임스 휘팅엄 구단주는 노팅엄의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 빚더미에 앉아 선수와 직원 주급도 제대로 지급할 수 없었던 노팅엄을 인수 해 팀을 1차로 구해냈습니다. 그는 노팅엄의 유소년 출신으로서 팀에 대한 애정만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김도운 : (중략) ···이상입니다.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이 김도운 단장은 부임하자마자 각종 행사로 팬들을 끌어모으고, 칼 슈나이더 같은 선수를 발굴하는 등 환상적인 팀 경영으로 노팅엄을 여기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 김도운 단장은 구단주의 친구로 마찬가지로 노팅엄의 유소년 출신입니다. 두 친구와 중심을 지키고 있었던 캡틴 알렉산더가 있었기에 노팅엄이 2부리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여러 뉴스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우리 노팅엄에 관해 다뤘다.

그래서 우리 노팅엄은 영국과 유럽 내에서 내내 화제였다. 한국 공중파 스포츠 뉴스 시간에도 짤막하게 내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또한, 구단 공식 채널에 업로드된 뮤튜브 영상도 큰 화제를 몰았다.

<기적을 이뤄낸 노팅엄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영상에는 감독의 드레싱 룸 대화, 알렉산더가 하프 타임 때 했던 말, 경기 전 서포터즈와 팬들에 관한 인터뷰 등이 잘 정리되어 올라왔다.

그래서 노팅엄에 관심이 있는 전 세계의 소규모 팬들이 영상을 레딧 등의 각종 커뮤니티에 퍼 날랐다.

그렇게 영상의 조회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천만을 넘겼다.

그리고 그 효과는

"죄송합니다만··· 광고판 자리가 부족할 것 같아요."

서브 스폰서들의 문의 연락과 다음 메인 스폰서에 관심이 있다는 거대기업들의 접촉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시즌이 끝났는데도 다음 시즌 준비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전화 세례를 상대하느라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시즌 종료 일주일 후 훈련장의 필드 위에는 잔디 상태를 확인하는 관리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수들과 스탭들은 대부분 휴가를 갔고, 이곳에 남은 건 일부 직원들 뿐이었다.

이제는 선수가 아니게 된 알렉산더도 그 일부 직원 중 하나였다.

나는 알렉산더와 함께 텅 빈 훈련장을 거닐고 있었다.

"이제 단장이라고 불러줄까?"

"아뇨. 그냥 꼬마라고 불러주세요. 캡틴이랑 있을 때는 어린 시절 기분 좀 내 보게."

"너도 캡틴이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 마음대로 해라."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알렉산더는 내가 캡틴이라고 부르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말했다.

"자, 여기에 아이스 체임버를 들여놓을 거고요. 여기는 재활 및 수중치료를 위해 작은 수영장을 들여놓을 거예요."

아예 훈련장 건물을 확장공사 하면서 수영장을 들여놓기로 했다.

2부 리그에 올라가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생각 했던 게 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스포츠 과학자를 고용하는 것이었고, 그에 맞는 시설들을 차례로 들여놓는 것이었다.

스포츠 과학자는 이미 고용했고, 스포츠 심리상담가 또한 한 분 모셔왔다.

"정말 별의별 걸 다 하는구나."

"요즘은 이런 거 안 하면 뒤처지거든요. 경기력에서도 차이나고."

"돈은 충분한 거냐?"

"캡틴이 전국··· 아니 전 세계에 화제가 되면서 서브 스폰서가 잔뜩 늘어났거든요. 이제 광고판이랑 유니폼의 광고 부착 부분이 꽉 차서 더 들여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요."

"그러냐."

나는 쑥스러워하는 알렉산더의 앞에 나서며 문을 열고 말했다.

"자, 이제 여기가 캡틴이 일할 전력분석실이에요."

"···텅 비었는데?"

알렉산더의 말 그대로 완벽하게 텅 비어있는 방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일부터 연수 다녀오고서 필요한 거 요청하세요. 다 들어드릴 테니까요."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은 이유는 알렉산더가 원하는 것들로 이 공간을 다 채웠으면 해서였다.

알렉산더는 천천히 걸어 깔끔하게 페인트칠 된 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못 하셔도 돼요."

알렉산더가 고개를 돌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로 날 빤히 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다.

"무려 캡틴의 새 출발이잖아요."

"아무리 나라도 못 하면···."

"감수해야죠. 경영자는 때론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할 때도 있어요."

"미래를 위한 투자?"

"캡틴은···."

나는 알렉산더에게 진한 미소를 지어주며 이어 말했다. 내 말에는 어마어마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죽을 때까지 노팅엄을 위해 사실 분이잖아요. 캡틴은 노팅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예요. 아니에요?"

알렉산더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훈련장의 잔디밭이 보이는 창문 앞에 섰다.

"뭐 봐요?"

"우리 팀 엠블럼."

나는 알렉산더 옆에 섰다. 창문에서는 훈련장에 세워져 있는 간판이 하나 있었다. 내가 유소년으로 뛸 때부터 있어서 그런지 무척 낡아 보였다.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저 엠블럼 좀 새로 칠해줘. 가끔 보면서 일하게."

"뭐··· 그럴게요. 그런데 갑자기 웬 엠블럼? 대답은 어쩌고요?"

알렉산더는 피식 웃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당연한 거 굳이 묻지 마. 노팅엄은 내 집이야."

< 23. 레전드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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