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바쁜 프리시즌 (1) >
퍼레이드가 열린 날 밤에는 노팅엄의 선수들과 직원들이 모두 모여 큰 파티를 했다.
구장 관리 직원들은 선수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로 노팅엄의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고, 잭슨 감독을 비롯한 노인들이 모인 테이블에서는 차분한 농담과 웃음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사무직원들이 모인 테이블에서는 한 여직원과 남직원이 묘한 기류를 보여 둘을 엮으려고 열심이었다. 그동안 자제해야 했던 술을 쏟아붓는 선수들이 모인 테이블도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고 있는 파티의 중앙 테이블 옆에서는 이번에 떠나는 선수들의 장기자랑이 열리고 있었다.
할리가 외쳤다.
"바비! 다음은 네 차례야!"
"하··· 싫은데."
"싫으면 남던가."
"에휴."
바비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예전에 클럽에서 자주 췄던 춤을 췄다. 그래서 선수들은 일제히 야유했다.
"우우~ 잘 추니까 재미없다."
선수들의 반응에 바비는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아무 춤이나 추라면서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예요?"
깊은 한숨을 내쉰 바비는 결국 박자를 무시하고 경박스러운 춤을 췄고, 그제야 선수들은 손뼉을 치며 잘했다고 말했다.
잠시 후, 바비가 의자로 돌아오고 감자 머리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온 바비의 옆에는 할리가 앉아 있었다.
할리가 물었다.
"야, 너 언제 가냐?"
"내일. 짐은 다 옮겨놨어."
할리의 얼굴에서는 섭섭한 티가 확 났다. 바비는 그 모습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빨리?"
"뭐, 그렇게 됐어.···"
할리가 중얼거렸다.
"아쉽다. 진짜 아쉽다."
"너 취했냐?"
"응."
할리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아다니는 중인 알렉산더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선수가 캡틴처럼 한 팀에서 오래 뛰면 좋을 텐데. 네가 떠나는 것도 아쉽고, 감자 머리 선수들이 떠나는 것도 아쉬워 죽겠어."
할리의 말을 들은 바비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낭만적인 소리네.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잖아. 너나 로드나 라이언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거고."
"웃기지 마. 우리는 계속 남아 있을 거야. 그치, 라이어언?"
할리가 옆에 앉아 있는 라이언에게 갑작스럽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으악, 갑자기 왜 그래?"
바비와 마찬가지로 곧 팀을 떠나는 감자 머리 사무엘과 얘기를 하고 있던 라이언은 깜짝 놀라며 기겁했다.
"바비가 너나 나나 로드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고 그랬단 말이야."
"아하."
할리의 취한 얼굴과 할리의 말을 듣고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라이언이 할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원래도 안 떠날 생각이었지만··· 어제 캡틴 은퇴식 보고 더 노팅엄에 남고 싶어졌어. 나도 나도 그런 은퇴식 받아보고 싶어. 우리 셋이 동시에 은퇴하면 팬들은 더 멋진 걸 해주지 않을까?"
"오, 좋은 생각인데?"
할리와 라이언이 킬킬대자 바비가 손으로 턱을 괴며 뚱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은 프리미어리그나 챔피언스리그에서 뛰고 싶지 않아? 셋 다 프리미어리그 팀에 지금 이적해도 한두 시즌 안에 적응할 것 같은데."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찾아온 로드가 끼어들었다.
"야, 바비. 우리 애들 꼬드기지 마."
"꼬드기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안 그래도 너한테도 궁금했는데, 너는 욕심 안 나냐?"
"안 나."
로드는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노팅엄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키고 4위 안에 들어서 직접 챔피언스리그에 나갈 거야."
"오오, 멋지다. 나도."
"그럼··· 나도."
할리와 라이언이 차례로 말했다. 이제는 셋이 히죽대기 시작해 바비는 더 뚱한 얼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로드의 말에 끼어드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나도 그 약속에 함께할 수 있겠나?"
"캡틴?"
오늘 파티의 최고 인기 인사인 알렉산더가 와 있었다. 할리의 물음에 알렉산더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캡틴은 로드야."
"오늘까지만 캡틴 하세요."
할리의 말에 테이블의 사람들이 와하하 하고 웃었다.
알렉산더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마음대로 불러라. 아무튼, 나는 다음 주에 뉴욕에 가서 전력분석관 연수를 받고 올 테니··· 너희들은 몸 관리 잘하고 와라."
"뉴욕이요?"
"뉴욕 시티에서 한 달간 전력분석관들과 직접 같이 일해볼 기회가 생겼다."
뉴욕 시티는 미국의 프로축구리그 MLS의 한 팀이었다. 다비드 비야, 프랭크 램파드, 안드레아 피를로가 뛴 적도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시티'의 협력 구단이었다. 여름에 쉬는 유럽 리그와는 달리 미국 리그는 6월, 7월에도 리그를 진행하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연수를 받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알렉산더가 바비를 보며 말했다.
"네 덕도 조금 있다. 킴 단장이 너를 맨시티에서 임대로 데려올 때, 너의 주전 출전 조항을 넣으면서 날 위해 뉴욕 시티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는 조항을 넣어줬더군."
뉴욕 시티는 2022년에 완공된 최신 축구 전용구장에 최신 시설로 무장한 팀이었다. 알렉산더는 이곳에서 많은 걸 배워올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하는 알렉산더의 눈은 빛났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선수들은 어느새 알렉산더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킴 단장은 내가 은퇴할 것까지 대비할 정도로 철저하다. 여태까지 무수한 성과를 보여주고 늘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 킴 단장이 6년 안에 프리미어리그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너희들도 단장을 믿고, 감독을 믿고 준비한다면 아까 로드가 말한 챔피언스리그 출전도 꿈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더의 긍정적인 말에 로드가 신나서 되물었다.
"역시 그렇죠?"
"그래.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내 새로운 목표는 노팅엄의 선수들을 지원해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는 거니까."
알렉산더의 말에 집중하던 선수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로드와 할리만큼은 힘차게 말했다.
"좋아요. 역시 캡틴이에요."
"그 정도는 돼야죠."
라이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바비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쉬운 줄 알아요?"
"5부 리그에서 2부 리그까지 올라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바비의 말문이 막혔다. 바비의 머릿속에 어제 열렸던 성대한 은퇴식이 떠올랐다. 그런 행사가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알렉산더와 이 팀이 걸어온 길은 굉장한 것이었다.
"저번 약속은 지켰으니 이제 새로운 약속을 하고, 그걸 목표로 달려봐야겠지. 어때, 이번에는 너희들도 함께···."
"할래요!"
"당연하죠!"
역시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이들에게 쉽사리 함께하자고 하지 못 했다. 그때까지 팀에 남는 게 약속의 기본 조건으로 보였는데 선수들은 그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넷이 약속의 술이라며 한 번에 위스키를 동시에 들이켜는 걸 보며 바비가 중얼거렸다.
"정말 신기한 사람들이라니까."
소속팀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고민 하나 없이 한 팀에 은퇴할 때까지 남겠다고 할 정도의 애정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바비에게는 유소년 시절을 보낸 맨시티도 뛰지 못하게 된다면 떠날 구단일 뿐이었으니까.
"낭만적인 팀에는 낭만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법이니까."
그때, 감자 머리 선수인 알버트가 바비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다음 시즌에 만나게 되면 잘 부탁해."
알버트는 맨시티와 우승을 겨루는 팀 중 하나인 뉴캐슬 이적이 예정되어 있었다. 바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카키스랑 주전 경쟁이라니, 괜찮겠어요?"
"뭐··· 이 기회가 아니면 그런 강팀에 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존경하는 데이비드 워커도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할 때, 후보 선수였다고. 강팀에 가면 그만큼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워커의 주전 경쟁 상대가 발롱도르 후보는 아니었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하하. 뭐,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아무튼! 한 2~3년쯤 뒤에는 이 팀에 돌아오고 싶어. 후보 선수가 되어도 괜찮으니까."
바비가 알버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버트는 알렉산더와 세 명의 로컬 보이들을 보며 미소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동안 다른 팀에서 뛸 때는··· 팀이 회사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 그런데 여기는 집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 아무리 오래 뛴 주장이라고 해도 세상 어느 팀이 그런 멋진 은퇴식을 해주냐? 노팅엄 TV 보니까 일반 팬들도 몇 주 전부터 연습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돈을 적게 주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우리 감자 머리 선수들을 알아봐 준 팀이기도 하고."
감자 머리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이나 언론, 팬들도 흔히 부르게 돼서 본인들까지도 그렇게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바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죠. 이 팀은 뭔가 다르긴 해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다른 감자 머리 애들도 몇 년 뒤에는 이 팀에 선제의(선수 쪽에서 팀에 먼저 제의하는 것)라도 해 볼 생각이라던데."
"음···."
바비는 자신도 맨시티와의 계약이 끝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노팅엄에서는 정말 많은 걸 얻었다. 어린 시절 친구인 첸웬과 조금이나마 사이를 회복했고, 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재능의 괴물들에 도전할 마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조금 양보해서.
"챔피언스리그에 나간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역시 비싼 몸이라니까."
"비싼 몸 맞아요."
바비의 농담에 알버트가 크게 웃었다.
이렇게 바비와 알버트를 포함한 이번 시즌에 팀을 떠나는 선수들은 밤새 파티를 즐기며 기존 선수들과 못다 한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선수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팅엄을 떠났다.
그렇게 프리 시즌이 시작되었다.
**
알렉산더를 미국으로 배웅한 후,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휴가가 목적은 아니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회귀의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인천공항의 출국장으로 나오자마자 날 알아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팬은 아니었다.
"김도운씨. 노팅엄의 2부 리그 진출을 이끌었다고 영국의 현지 언론에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혹시, 한국에 들른 건 노팅엄에 데려갈 선수가 있기 때문입니까?"
기자들이었다.
3부 리그로 승격했을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축덕 중에 축덕 정도만 내 이름을 알았다. 하지만, 2부 리그로 승격하면서 알렉산더의 은퇴식을 성대하게 하는 바람에 내 이름이 한국에도 어느 정도 퍼진 것이다.
한국선수가 유럽에 진출하는 건 흔해졌지만, 한국인 단장이 유럽 팀의 운영을 맡은 예는 없었기에 나에 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다.
그런 단장이 한국선수를 데려간다면 큰 화제가 될 것이기에 이렇게 기자들이 모인 것이고.
하지만, 나는 이번 시즌에 한국선수를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아닙니다. 그냥 쉬러 왔습니다. 이번 시즌에 한국선수를 영입할 계획은 없습니다."
이번 시즌이 아니라 다음 시즌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자유계약으로.
*
먼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과 진하게 포옹했고, 마침 저녁 시간이었기에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안부를 물었다.
"엄마랑 아빠는 뭐 하고 지내?"
"너희 아빠가 모아둔 돈 까먹으면서 적당히 먹고 살고 있지. 저번에 네가 보내준 돈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왔고. 그때 정말 고마웠다."
"별 거 아니었어."
그리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제임스랑 조이는 잘 지내니? 영국에서 살 때 워낙 자주 놀러와서 아들딸 같은 애들이었는데."
"나랑 같이 일하고 있어. 제임스가 구단주, 조이는 운영팀장이야."
"둘 다 애인은 있고?"
나는 들었던 밥숟갈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엄마의 눈치를 봤다. 이 질문은 보나 마나 나한테 결혼할 사람이 있냐고 묻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아빠의 도움을 받는 건 진작 포기했다. 회귀 전에도 아빠는 티만 안 낼 뿐이지 손자를 정말 보고 싶어 했으니까.
나는 외동이어서 다른 형제자매에게 결혼을 떠넘길 수도 없었다.
"엄마, 미리 말하겠는데 나 여자친구 없어."
내 말에 엄마가 본색을 드러냈다.
"왜 없어?"
"그러게··· 바빠서 그렇겠지?"
"혹시 조이는 아직 혼자니? 너희 둘 젊었을 때 잘 만났었잖니. 조이가 얼마나 착하고 참하고 좋은 애였는데···."
"말도 안 돼. 간신히 다시 편하게 지내는데··· 이 상태를 깰 생각은 없어. 아무튼, 결혼할만한 사람 만나면 바로 전화해줄 테니까··· 결혼 얘기는 여기서 끝. 나 오늘은 푹 쉬고 싶단 말이야."
내 단호한 말에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여 줬다.
결혼 얘기가 지나가니 편안한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님은 소일거리나 취미생활을 하며 여유로운 노후를 즐기시는 것 같았다.
유일한 아들인 내가 해외에 나가 있으니 걱정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구단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이야기하고, 영상까지 동원해 설명했다. 부모님은 내가 이런 사람들과 일한다는 점에 놀라고,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깔끔하게 정돈된 내 방에 들어왔다. 몇 년 만에 돌아오는 방이었다. 제임스와 내가 유소년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조이까지 셋이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어?"
알렉산더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찍었다. 잠시 방을 살펴본 나는 침대에 눕지 않고, 걸터앉았다.
아직 8시가 되기 전이었기에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을 조금이나마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다음 시즌에 영입할 한국선수를 찾으려면 이 분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긴 해외 생활 때문에 정말 몇 명 없는 한국 인맥 중 하나인 이 분의 도움이.
[최민석 행정보급관님]
< 24. 바쁜 프리시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