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76화 (76/245)

< 24. 바쁜 프리시즌 (3) >

"안녕하세요. 이번 '영국 한인축구회.'를 주최한 김건혁입니다. 스컨소프에서 전력분석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컨소프는 4부 리그에 소속된 어엿한 프로팀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부럽다는 듯 김건혁을 바라봤다. 김건혁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를 빤히 쳐다봤다. 내 오늘 목적이 전력분석관을 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김건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왔지만, 선택지가 늘어나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어서 다음 자기소개를 들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이강혁이라고 합니다. 알프레턴 FC에서 골키퍼 코치로 일하고 있습니다."

"발독 타운 FC에서 돈도 못 받는 코치로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성진호입니다."

"유지욱입니다.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스포츠 생리학을 공부 중입니다. 선배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인사하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아마추어팀에서 일하고 있었고, 대학생·대학원생도 틈틈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내 왼쪽에 앉은 남자가 자기소개했다.

회귀 전의 그에 관해 알고 있는 나는 여기에 온 이후로 가장 집중했다.

"AFC 필드에서 전력분석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민호입니다."

이민호는 김구 안경을 쓰고, 깔끔하게 가르마를 탄 학자 같은 스타일의 남자였다. AFC 필드는 5부 리그의 팀이었다.

나는 이민호를 만나기 위해 이 모임에 참가했다. 다음 시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태양과는 달리 이번에는 바로 쓸 수 있는 한국인을 얻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민호를 유심히 보자 이민호 또한 날 빤히 바라봤다.

"저기··· 김도운 씨? 소개는···."

"아, 미안해요."

모임의 주최자 김건혁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 모인 스무 명의 사람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전부 축구에 미친 나머지 한국에서 이곳까지 날아와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팅엄 FC에서 사장 겸 단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도운입니다. 모임에는 처음 참가하게 됐네요. 잘 부탁드려요."

이 모임은 영국 축구계에서 일하는 한인들의 모임이었다.

주최자 김건혁의 말에 따르면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외로운 타향에서 친목도 도모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성공한 편인 내가 참석하면 학생들이나 모임 참가자들이 정말 좋아할 거라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노팅엄으로 향하지 않고, 바로 이 모임에 참석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하긴 했지만, 시간을 최대한 아껴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건혁 씨가 2년 전부터 꾸준히 메일을 보내 주셨는데··· 이제야 왔네요."

사실 김건혁의 정성도 정성이었지만, 이민호와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 참석한 거였다. 하지만, 오늘 모인 젊은 축구인들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띄워주자 김건혁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T 에이전시의 태현석 씨도 모셔오고 싶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엄청 바쁜 분이시잖아요. 지금 미국에 계신다고 해요. 늘 거절해서 미안하다고, 오늘 저녁은 다 사시겠다고 하셨어요."

"오오."

다들 환호하는 사이 나는 속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잘못했으면 태현석과 만날 뻔했다.

태현석은 대부분 월드클래스 선수들로 이뤄진 T 에이전시의 대표. 지금 만나서 인맥을 쌓으면 좋을 상대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 불편한 상대였다.

회귀 전의 그는 나에 대한 걸 순식간에 알아내는 귀신같은 정보력을 늘 보여줬었다. 그래서 그를 만날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었다. 생각을 읽히는 느낌은 정말 기분 나빴으니까.

내가 말없이 있자 김건혁이 내 눈치를 봤다. 지금 이 모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나니, 더 대단한 사람인 태현석을 언급해 내가 기분이 나빠졌다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니었기에 나는 농담조로 말했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 태현석 씨한테 선수를 빼앗겼네요. 다음 모임 때는 제가 사겠습니다."

"아,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때는 비싼 거 먹겠습니다."

"하하, 그러세요."

김건혁의 능글맞은 말에 밝게 웃으며 말했다. 싹싹하니 사람 참 괜찮아 보였다. 전력분석관으로서 일하고 있다고 했으니 이따 포트폴리오라도 받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잠시 후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의 모임이었기에 당연히 한식당에서 모임이 열렸고, 다들 불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근처에 모인 사람들끼리 얘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나는 먼저 김건혁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 전력분석관이 꿈이었어요?"

"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영국으로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팀에 메일을 싹 돌렸고, 아마추어 팀부터 차근차근 올라왔습니다."

"오호. 민호 씨는요?"

"예. 저도 건혁이 형이랑 마찬가지로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왔습니다."

회귀 전, 이민호는 단장들 사이에서 꼭 데리고 있었으면 하는 유능한 전력분석관이었기에 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호감으로 보였다. 하지만, 오늘 만난 김건혁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일을 대하는 자세가 무척 마음에 들어 괜히 눈이 갔다.

그래서 나는 둘에게 직구로 말했다.

"우리 팀에서 전력분석팀을 만들려고 하는데··· 혹시 관심 없어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이 동시에 외쳤다.

"있습니다!"

양옆 테이블에서 무슨 일이냐고 쳐다봤다. 직접 묻기도 해서 나는 우리 팀의 전력분석관 일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서도 소란이 있었다.

"혹시 스카우트는 안 뽑나요?"

"코치는요?"

"스포츠 치료사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들은 대부분 축구를 좋아해서 영국으로 날아온 이들이었다. 어지간한 애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 험한 축구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으니까. 보통 몇 개월 안에 현실을 느끼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다반사다.

그렇기에 다들 진심으로 간절한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말투에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티오가 남은 게 전력분석관뿐이라서요."

"아···."

내 말에 아직 영국 축구계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학생들은 그저 '멋지다···.'라는 느낌으로 날 보고 있었다. 2부 리그 팀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확 와닿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국 축구계의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과 텃세에 당해보고, 정보력 부족, 실력 차이 등을 경험해 본 현직 종사자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구단에 들어갈 기회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막 고용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실력이 돼야 하고, 티오도 있어야 하니까.

열정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분명 기회만 있다면 꽤 괜찮은 스태프들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즉흥적으로 들었다.

나는 미래에 투자하는 셈 치고, 내가 쉽게 도와줄 수 있는 걸 말했다.

"연락처만 알려주신다면 구단에 연수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 같은 게 들어올 때 최대한 빨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김건혁이 제 일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이방인인 한국인들에게 정보 부족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맨땅에 고통스럽게 헤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남기만 한다면 독기를 품고 정말 열심히 일한다. 나는 20명 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탄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임의 사람들은 내게 흔쾌히 연락처를 알려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잡담이 몇 번 더 오갔고, 스포츠 생리학을 공부 중이라는 학생이 손을 들었다.

"유지욱 씨였나요?"

"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유지욱이 말끝을 흐렸다. 유지욱의 신분은 대학생, 크게 어려운 부탁이 아닐 거라 생각한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말해 보세요."

"노팅엄 FC를 어떻게 경영했는지 듣고 싶어요. 요즘 노팅엄이 영국에서 가장 화제잖아요."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젊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나의 20대를 떠올리며 답했다.

"예."

그리고 천천히 노팅엄에 관해 이야기해줬다.

*

이곳에 온 목적은 잊지 않았다.

오늘의 모임이 끝나고, 나는 김건혁과 이민호와 펍에 들어왔다.

이민호는 무조건 스카웃 할 계획이었다.

이민호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아마 4년째 영국을 떠돌며 전력분석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회귀 전에 한 빅클럽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VR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선수들의 개인적인 발전과 팀 전체의 전술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VR 기계를 생산하는 업체를 메인 스폰서로 삼고 있는 우리 팀에 적합한 전력분석관이었다. 경험도 많아 알렉산더에게 도움도 많이 될 것이다.

반면에 김건혁은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민호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김건혁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물었다.

"혹시 포트폴리오 가지고 다니는 거 있어요?"

축구계에서는 이직이 흔하기에 나도 20대 시절 포트폴리오를 스마트폰에 넣어놓고, 파일철을 하나 만들어 가방에 넣고 다녔다.없으면 보내 달라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둘은 준비성이 철저했다.

"여기 있습니다."

"저도 있습니다."

"···둘이 참 호흡이 좋네요."

이민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건혁이 형한테 많이 배웠거든요. 같은 과 선배시기도 하고··· 같은 직업을 갖고 있기도 하니···."

"그렇군요. 잠시만요."

뛰어난 전력분석가가 될 이민호가 배운 사람이라··· 나는 먼저 김건혁의 포트폴리오를 살폈다.

이민호와 똑같은 서울대, 이민호보다 2년 더 앞서있는 경력··· 선수를 자체적으로 분석하는 9가지의 체계까지. 무척 괜찮았다.

하지만, VR 기계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김건혁에 관해서는 더 고민해보려는 찰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2부~5부 리그 선수들 데이터베이스화 완료(10경기 이상 출전 선수들로)

-1부 리그 선수들 데이터베이스화 중

"2부 리그 선수들에 관한 자료가 있나요?"

"아, 예··· 시간 날 때마다 만들어둡니다."

"왜요?"

"언제 상위 리그에서 일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얼굴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 나는 김건혁이 마음에 들어왔다.

"잘 봤습니다."

김건혁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받아들고,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그에게 살짝 웃어준 후 이민호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했다.

이민호의 포트폴리오는 딱 기대대로였다. 이민호는 이때부터 곧 상용화될 VR 기계를 이용한 영상분석에 관한 자신의 기술을 이곳에 적어놓았다.

나는 이민호에게도 포트폴리오를 돌려줬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팀은 세 명으로 구성될 겁니다. 일단, 아까 우리 팀에 관해 제가 얘기할 때··· 캡틴 알렉산더를 언급했었죠?"

"예. 뉴스로도 봤습니다."

"저도요."

둘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서 말했다.

"한 자리는 알렉산더의 자리입니다. 알렉산더는 지금 맨시티의 연계구단인 뉴욕시티에서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우리 팀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적임자죠."

전력분석관은 영상분석을 통해 적팀의 약점을 알아내고, 우리 팀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직업이었다.

영상편집에는 많은 시간이 든다. 그래서 영상 데이터베이스를 미리 구축해 놓았다는 건 정말 좋은 자원이 된다.

"또 한 자리는 김건혁씨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2부 리그 선수들을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더 디테일한 분석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건혁이 눈동자를 크게 떴다. 바로 대답은 하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2부 리그 팀 소속이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원래는 2부 리그에서 전력분석관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팀에 오려는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건혁이 2부 리그 선수들을 분석한 자료가 진짜라면 비용도 아끼고, 열정 있는 전력분석관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회귀 전에 봤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재능 있는 사람도 운에 따라 묻히는 게 이 축구계였다. 확실한 카드 이민호가 있으니 나머지 한 명은 평범한 영입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민호 씨는 우리 팀의 메인 스폰서에서 제공하는 VR 기계를 영상분석에 본격적으로 사용해주셨으면 합니다. 셋이 서로를 도우며 전력분석팀을 이끌어 나가는 거죠. 어떻습니까?"

김건혁과 이민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우리 팀의 레전드, 회귀 전의 A급 전력분석관, 그리고 즉흥적인 영입으로 이뤄진 전력분석팀이 구성되는 순간이었다.

< 24. 바쁜 프리시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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