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선수들의 프리시즌 (1) >
내일은 선수들이 휴가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오늘이 아니라.
나는 손님용으로 준비된 소파에 자연스럽게 앉는 노팅엄의 새 주장, 로드 테일러를 보며 물었다.
"왜 여기 있냐?"
로드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새 선수들에 관해서 좀 물어볼 게 있었는데··· 감독님은 무서워서요."
"그럼 나는?"
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고민 잘 들어주는 삼촌 같은 느낌? 아, 고민도 하나 있어요."
로드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새 선수들에 관한 건 그렇다고 치고, 고민은 새로 데려온 심리상담사에게 말하면 되잖아."
"그분이랑 이미 얘기하고 왔죠."
"근데?"
"제가 단장님 얘기를 좀 했거든요.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늘 좋은 말을 해 주신다고. 그러니까 심리상담사님이 단장님한테도 한 번 얘기해보라고 했어요."
나는 겨울에 영입할 선수에 관해 적혀있던 프로필을 내려놓고, 새 심리상담사를 뽑아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심리상담사를 잘라 버릴까··· 아주 짧게 고민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로드에게 물었다.
"캡틴··· 아니, 알렉산더한테는 다녀왔어? 알렉산더도 새 선수들에 관한 자료 많이 갖고 있거든."
"당연히 다녀왔죠. 그런데 캡틴은 제가 궁금한 건 모르더라고요. 선수들을 직접 본 게 아니라 영상으로만 봐서."
로드는 앞으로도 알렉산더를 캡틴이라고 부를 생각이구나. 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로드에게 물었다.
"뭘 물어보려고?"
"선수들을 미리 만나보셨잖아요. 다들 성격이 어때요?"
"형인 테디 헌터는 좀 예민해 보였어. 동생 테오는 순하고 착한 이미지··· 그러니까 라이언이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세자르는 로맨티시스트야. 스페인의 루카는 철이 없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고··· 웨일즈 3인방이랑 스코틀랜드 2인방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했어."
나는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질문을 하지 않고, 술술 말했다.
로드가 물었다.
"로맨티시스트요? 철이 없다고요?"
일부러 중간에 끼워 말했는데 역시 돋보이는 두 캐릭터였다.
눈썹을 찌푸린 로드에게 말했다.
"그래. 세자르는 여자친구 따라서 영국으로 온 거고, 루카는 바르셀로나에서 이니에스타의 후계자라는 소리 듣다가··· 더 자고 싶을 때는 그냥 늦잠 자고, 게임 하고 싶을 때는 밤새고 그러다가 잘린 녀석이야."
"···세자르는 그렇다 치고, 루카는 왜 데려온 거예요?"
"잭슨이 원해서. 아무리 잭슨이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너도 좀 고생해야 할 거다."
나는 당황하는 로드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어줬다.
그리고 물었다.
"근데 선수들의 성격은 왜? 참고하려고?"
"그것도 그렇긴 한데··· 좀 불안해서요. 조금이라도 더 알아두면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내일이면 본격적으로 주장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구나.
예상했던 고민이었다.
그래서 나는 로드의 이어지는 질문에 바로 답해줄 수 있었다.
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잘 할 수 있을까요?"
"주장은 부주장이랑 달라. 저번 시즌에 알렉산더가 너한테 다 맡기는 것으로 보였어도 자잘한 부분에서 구멍이 자주 날 거야. 감독님한테 욕 좀 먹을 수도 있겠다."
내 신랄한 말에 로드가 질색하는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왜 나쁜 소리만 하세요. 불안하게."
"그냥.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해주는 거야. 넌 분명히 실수할 거야."
로드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평온한 어투로 이어 말했다.
"처음부터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은 없어. 그래 보이는 사람은 티가 안 나는 거거나 티를 안 내는 법을 아는 사람인 거지. 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네. 나처럼 아주아주 특수한 경우라면."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로드가 살짝 미소지으며 되물었다.
"와, 지금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음, 아닌데···."
회귀했다고 로드에게 말할 수도 없어서 나는 농담이었다고 이어 말했다. 로드가 더 짙게 미소지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머릿속의 말을 정리한 후, 꺼냈다.
"아무튼 말이야. 나는 2년 전에 네가 국가대표로 뛸 수 있는 선수라고 말했어. 그건 실력뿐만이 아니라 리더십도 포함된 말이었어. 나는 네가 나중에는 국가대표팀에서 적어도 부주장은 맡을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해."
뭐, 회귀한 덕에 이런 말을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았다. 사람끼리 눈을 보면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로드가 내 확신에 찬 눈동자를 보고 안정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꼭 잘 할 수 있어. 그러니까 편하게 해. 넌 우리 노팅엄이라는 숲에서 거목으로 자랄 나무니까."
다행히도 로드는 미소를 지은 채로 사무실을 나갔다.
**
"노팅엄을 2년 동안 맡은 잭슨 포터다. 이 팀이 4부 리그에 있을 때 오긴 했지만, 나는 챔피언쉽 리그(잉글랜드 2부 리그)에서 4년. 라리가 2(스페인 2부 리그)에서 5년. 세리에 B(이탈리아 2부 리그)에서 2년 동안 팀을 지휘했었다. 남미의 팀이나 중동의 팀도 지도해본 적이 있지."
휴가에서 막 돌아온 선수들이 드레싱 룸에 모여 잭슨의 자신만만한 자기소개를 듣고 있었다.
작년과 비슷한 레퍼토리였기에 로드는 잭슨의 말이 새 선수들에게 감독으로서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기소개가 끝난 후, 잭슨은 뒤에 서 있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시즌부터 '전력분석팀'과 기존의 의무팀을 포함한 '스포츠과학팀'도 선수단을 지원해줄 거다."
한 명과 의무팀만 빼고 전부 새로운 얼굴이었다.
선수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특히, 한 명의 직원에게는 환호도 했다.
"알렉스! 이리로 와요! 왜 거기 있어요!"
할리의 말에 기존 선수들이 와하하 하며 웃었다. 새로 온 선수들도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조금 긴장한 듯 보이는 알렉산더는 할리에게 인상을 썼다. 할리가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로드는 웃었다.
잭슨은 선수들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말했다.
"너희들도 잘 아는 알렉산더가 전력분석팀의 팀장이다. 전력분석팀은 앞으로 너희들의 훈련 모습, 경기 모습, 상대 팀의 경기 모습 등 온갖 걸 영상으로 분석해 더 효율적인 훈련과 경기력 향상에 큰 도움을 줄 거다. 자, 알렉산더, 킴, 리."
뻣뻣하게 굳은 셋이 앞으로 나섰다.
"알렉산더 샌더스다. 지난 시즌까지 주장을 맡고 있었다. 잘 부탁한다."
할리가 또 장난을 치려 했지만, 로드가 고개를 저어서 막았다. 왜냐면 새로 온 직원들이 민망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건혁입니다. 킴이라고 불러주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민호입니다. 리라고 불러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건혁과 이민호는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둘의 긴장한 모습에 선수들이 농담을 던졌다.
"킴은 단장님이랑 성이 똑같네? 아들이야?"
"야, 단장님은 독신이야. 애인 같은 거 없다고."
"알렉산더랑 나이 차이도 크게 안 나잖아. 노팅엄밖에 모르는 바보 알렉산더는 그렇다 치고, 단장님은 왜···."
김건혁을 놀리는 말은 자연스럽게 김도운을 놀리는 말로 바뀌었고, 이어서 알렉산더를 놀리는 말이 되었다.
알렉산더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들. 내가 선수 그만뒀다고···."
"들었어요?"
할리가 능청스럽게 말했고, 선수들이 하하하 거리면서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새로 온 선수들이 긴장을 슬슬 푸는 게 보였다. 좋은 징조였다.
그러면서도 로드는 잭슨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잭슨은 이렇게 선수들이 농담하는 시간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 거다. 하지만, 분명 선은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걸 귀신같이 알고 선수들이 과하게 농담하는 걸 멈추게 했었다.
선수들이 이어서 이민호의 이름으로 도미노냐 뭐냐 하면서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다음 농담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 잭슨의 표정이 미묘하게 나빠졌다.
그래서 로드가 나섰다.
"스포츠과학팀이 기다리고 있잖아. 이제 그만."
"우우, 엄마 같아."
할리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윽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잭슨은 로드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스포츠과학팀은 너희들의 몸 상태를 관리하기 위한 설비를 사용하는 걸 도와줄 거고, 스포츠 심리상담가에게는 내가 지시할 때 외에도 고민이 있으면 얼마든지 방문해라. 자, 인사하시죠."
새로 온 스포츠과학팀의 사람들은 평범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기존 스태프들도 새 선수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선수들도 어느 팀에서 왔는지, 어느 포지션에서 뛰었는지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선수의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잭슨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테디, 테오, 세자르, 루카, 핀레이, 데클란, 오스카, 프레디, 루크.""예!"
헌터 형제, 세자르, 루카, 웨일즈 3인방, 스코틀랜드 2인방의 이름이었다.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린 신입 선수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노팅엄 숲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한다."
이게 잭슨 나름의 인사였다는 걸 아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입 선수들은 감사하다고 하나둘 인사했다.
잭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늘의 일정을 얘기했다.
"오늘은 몸 상태만 체크 하겠다. 작은 부상이나 이상이 있는 선수라면 내 왼쪽에, 이상이 없는 선수라면 오른쪽에 서라."
선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잭슨이 말한 대로 섰다. 대부분의 선수가 정상이었다.
잭슨은 자신의 말에 따라 선 선수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정상인 선수들은 훈련장으로, 몸에 이상이 있는 선수들은 스포츠과학팀을 따라가라. 이상이다."
*
"아이고 티케. 여기까지 왔어요?"
할리가 먹던 파스타를 내려놓고 의자 옆에 앉은 구단의 마스코트 검은 고양이, 티케를 불렀다.
하지만, 도도한 티케는 할리를 무시하고 몇 칸 옆에 있는 로드에게로 다가갔다.
"저 사람 차별하는 망할 고양이."
할리가 투덜거리는 모습을 신입 선수들이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식당 안을 활보하는 검은 고양이를.
"저기, 캡틴. 그 고양이 여기서 키우는 거야?"
형 테디 헌터의 물음에 막 고양이에게 생연어 한 점을 먹인 로드가 답했다.
"응. 우리 구단 마스코트야. 팬샵 가면 인형도 팔아. 그리고··· 내 옆에 앉을래?"
테디는 막 담아온 접시를 들고 있었다. 테디의 눈은 계속 티케에게 꽂혀 있었고, 테디는 자연스럽게 로드 옆에 앉았다.
"너도 연어회 담아왔네? 티케한테 줘 볼래?"
"그래도 돼?"
"응. 고양이 좋아하나 봐?"
로드는 대답을 해 주는 테디를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테디는 아까까지만 해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직 동생 테오 헌터와만 얘기했었다.
"어··· 조금···."
말문이 막힌 테디를 도와준 건, 접시에 음식을 잔뜩 담아온 동생 테오 헌터였다.
"형, 여깄었네. 아, 캡틴. 앉아도 되죠?"
"그래."
로드의 대답에 테오는 로드 앞에 앉았다.
로드는 테디에게 연어를 어느 정도 크기로 잘라야 하는지 알려줬다. 테디는 연어를 잘라 고양이를 주고, 받아먹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봤다.
동생 테오는 로드에게 이것저것 말하고 있었다. 김도운이 말한 대로 성격이 정말 좋다고 느껴졌다.
"이 구단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분위기도 좋고, 체계도 잘 잡혀 있고.""다행이네."
"다만, 휴가가 다른 팀보다 일주일 짧은 게 아쉬웠어요. 특별한 걸 하는 것 같진 않던데···."
테오의 말에 로드가 물었다.
"혹시··· 이번 주에 전지훈련 가는 거 모르니?"
"···전지훈련이요?"
테오가 묻고, 막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돌린 테디도 로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신입 선수들은 다 모르는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는 대로 다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로드가 말했다.
"응. 작년에는 무인도에 다녀왔고, 올해는 산에 갈 거래. 인터넷도 안 되고, 음식도 직접 찾아 먹어야 하는 곳이야."
막 자리를 지나가던 할리가 끼어들었다.
"작년에 재밌었는데. 물고기도 많이 잡고."
로드 주변의 선수들도 그때의 추억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익숙해져서 그런지 외딴 산에 간다는 얘기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신입 선수들은 아니었다.
"무인도요···? 외딴 산이요···? 우리 정말 그런 곳에 가요?"
테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로드를 비롯한 기존의 선수들은 씩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25. 선수들의 프리시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