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파트너 (1) >
"죽겠다아···."
라이언이 자신의 라커 앞에 주저앉았다. 신발을 벗을 힘도 없어서 그저 축 늘어졌다.
라이언을 비롯한 노팅엄의 선수들은 방금 4번째 친선경기를 치렀다.
오늘 상대는 노팅엄과 비슷한 수준의 스페인 2부 리그 팀이었다. 감독 잭슨은 오늘 경기 전에 특별한 요구를 했는데, 그 내용은
'오늘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압박해라. 공격수부터 수비수까지 전부.'
였다.
그래서 풀타임으로 뛴 선수들은 라이언과 마찬가지로 주저앉거나 아예 대자로 누워버렸다. 오늘 가장 많은 활동량을 보여준 할리는 아예 바닥에 누워서 스포츠치료사들의 얼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라이언! 오늘 잘했어. 자."
로드가 라이언에게 걸쭉하고 누리끼리한 음료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경기 후 몸을 회복하기 위해 꼭 먹어야 하는 음료였다. 바나나 쉐이크에 영양제를 탔기 때문에 많이 단 음료였다.
"천천히 마셔."
"응."
라이언은 음료를 천천히 마시며 스포츠치료사의 손길에 따라 바닥에 엎드린 모양새가 된 할리를 걱정스럽게 내려다 봤다.
로드 또한 할리를 보고 있었다.
"저 녀석 괜찮을까? 그러니까 작작 좀 뛰지."
"나도 경기 중에 할리 뛰는 거 보고 다칠까 봐 걱정돼서 몇 번 말해봤는데··· 듣지도 않더라고."
"에휴. 다 망할 바비 자식 때문이야."
프리 시즌 첫 경기. 맨시티전에서 노팅엄은 5-1로 대패했다.
맨시티는 무려 74%라는 점유율로 노팅엄을 폭격했다. 아직 호흡이 맞지 않는 노팅엄의 선수들과 어린 시절부터 같은 스타일의 축구를 해 온 맨시티의 2군 선수들과는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노팅엄의 중원 사령관이었다가 이번 친선경기에서 맨시티의 중원 사령관으로 뛴 바비의 플레이가 가장 매서웠다.
팬들은 맨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노팅엄에 돌아온 바비에게 처음에는 환호와 응원가를 불러줬다. 하지만, 점점 노팅엄이 밀리기 시작하자 팬들은 바비가 공을 잡을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주변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간 덕인지 바비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바비는 경기 후, 유니폼을 교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할리를 도발했었다.
'야, 더 연습해야겠더라?'
'···두고 봐.'
이날 이후 할리는 그렇게 싫어했던 추가 훈련을 자진해서 하기 시작했고, 팀 훈련 때나 경기에서나 늘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뛰었다.
로드가 이렇게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만큼.
로드가 라이언에게 말했다.
"내가 가볼게. 넌 더 쉬고 있어."
"그래. 부탁할게."
음료를 먹고 기운이 살짝 난 라이언은 신발과 양말을 벗으며 정강이 보호대까지 풀었다. 맨바닥에 발바닥이 닿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해방된 기분이었다.
"라이언. 상태 어때?"
"괜찮아요. 그냥 피곤한 정도?"
코치들과 스포츠치료사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선수들의 상태를 묻고, 얼음팩을 나눠주고 있었다.
라이언은 얼음팩을 종아리에 묶는 거로 경기 후 조치를 마쳤다.
라이언과 마찬가지로 통증이나 부상이 없는 선수들은 그제야 이야기할 여유가 생겼다. 한 선수가 말했다.
"라이언, 너 오늘도 응원 소리 크더라?"
"하하···."
라이언은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최근 자신에 관한 관심이 늘어난 건 라이언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다···.
"마리아가 만들어준 영상 덕이죠."
"진짜 부럽다. 우린 언제쯤 만들어주려나."
<1분 OOO>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화제인 영상이었다.
왜냐면 첫 영상의 주인공인 라이언처럼 팬들의 더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팬들이 자신을 어떤 선수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영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세 번째 영상의 주인공이었던 로드와 할리 또한 영상을 보고 몹시 만족했었다.
"다들 수고 많았다!"
그때, 잭슨 감독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치료를 받는 선수들은 자세 그대로 나머지 선수들은 몸을 바르게 하며 잭슨 감독에게 시선을 모았다.
"오늘 경기에 관해 할 말은 아주 많지만···."
선수들이 긴장했다. 가끔 잭슨은 팀 전체의 경기력이 좋지 않으면 거의 30분 동안 선수들에게 일일이 불만을 말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은 정말로 퇴근하고 싶었다.
"다들 피곤할 테니 다른 짓 하지 말고 당장 집에 가서 푹 쉬도록."
"알겠습니다! 보스!"
선수들은 잭슨의 말에 일제히 답했다.
"다만."
잭슨의 이어지는 말에 선수들이 입을 다물었다. 잭슨이 이어 말했다.
"내가 말한 사람들은 지금 감독실에 잠깐만 들러라. 세자르, ······, 루카, 라이언. 이상 6명이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선수들은 환호하며 샤워실로 향했다. 퇴근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던 세자르의 눈이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라이언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잭슨은 최근 경기가 끝날 때마다 라이언을 불러 전술적인 불만을 꼼꼼하게 짚어줬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다른 선수들을 많이 불렀지만.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잭슨이 드레싱 룸을 나가자마자 세자르가 라이언에게 달려와서 물었다.
세자르는 잭슨에게 한 번도 불려간 적 없었다.
"라이언, 대체 보스가 우릴 따로 불러서 뭘 하려는 거야? 넌 몇 번 갔었잖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오늘 경기에 관한 피드백을 해 주시려는 거예요."
"피드백? 오래 걸려? 오늘 리아가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세자르의 머릿속에는 피드백보다는 여자친구가 들어 있었다. 라이언이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뇨. 금방 끝나요. 그럼 가장 먼저 감독님 방으로 들어갈래요? 저는 좀 이따 들어가도 돼요."
"오케이. 고마워."
세자르는 다른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감독실로 향했다.
세자르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걸 보던 라이언은 고개를 돌려 옆 옆자리에 누워있는 루카에게 물었다.
"루카, 괜찮아?"
루카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고개만 살짝 저었다.
경기장에서도 징조가 보이더니 완전히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라이언은 루카와 경기 때나 훈련 때나 늘 옆에 붙어 있었다. 바로 옆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
그래서 라이언은 루카에 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루카는 훈련이든 경기든 지칠 때까지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루카는 자신의 체력을 넘어섰다고 판단하면 코치에게 다리가 아프다는 둥, 근육통이 있다는 둥 핑계를 대며 훈련에서 빠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루카는 잭슨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잭슨이 개인지도를 할 때는 지금처럼 완전히 뻗어버리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는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여줬다.
어떻게든 뛰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며 걷다가 잭슨 감독과 눈을 마주치면 달리는 걸 반복한 루카였다.
라이언은 뻗어있는 루카를 가만히 내려다 봤다.
선수들의 꿈 중 하나인 FC 바르셀로나 출신의 기대받던 유망주.
훈련장에서도 가끔 모든 선수의 감탄을 자아내는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기도 하는 천재적인 재능의 보유자.
하지만, 여러 문제를 일으켜 여러 팀을 전전하다가 2부 리그에 갓 승격한 팀으로 오게 된 게으름뱅이.
루카는 도르트문트로 떠난 칼이나 맨시티로 돌아간 바비보다 더 높은 재능을 뽐냈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갖고도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라이언은 루카를 보며 축구 선수에게 성실한 건 정말 중요하구나, 열심히 해야지 같은 생각도 했고,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 그리고 왜 그런 재능을 갖고도 저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호기심까지··· 몇 주 동안 이런 생각을 해 왔었다.
루카는 게으른 모습을 보여도 경기장에서는 지난 시즌의 바비보다도 나은 모습을 간혹 보여줬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냥 사고만 안 치길 바랄 뿐이었다. 팀 분위기가 망가지면 로드가 고생하니까.
"루카, 네 차례야."
시간이 흘렀고, 네 번째 선수가 감독실에서 돌아오며 루카를 불렀다.
루카는 흐느적거리면서 감독실로 향했다.
잠시 후, 가만히 앉아있는 게 지겨워진 라이언은 감독실 앞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라이언이 감독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잭슨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래서. 다음 경기에는 쓸데없는 타이밍에 걷는 것만 줄이면 될 것 같다.>
쓸데없는 타이밍에 걷는 게 아니라, 뛰기 싫어서 걷고 있던 걸 텐데.
하지만, 루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잭슨의 목소리만 이어 들렸다.
<처음 면담 때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성실한 선수가 되고 싶나?>
라이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루카도 성실한 선수가 되길 원했다는 게 신기해서.
루카의 작은 목소리가 라이언에게 들려왔다.
<예에··· 그렇긴 합니다.>
<좋아. 그럼 지금처럼만 해라. 난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왠지 엿들으면 안 되는 걸 들은 기분이었다.
라이언은 바로 문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물러났다.
그리고, 문 쪽으로 다가가는 시늉을 했다.
타이밍에 맞게 루카가 문을 열고 나오다가 라이언을 보고 흠칫했다.
라이언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다음 차례라서 방금 왔어."
"아··· 그래. 내일 보자."
"응."
돌아가는 루카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라이언! 앞에 와 있으면 들어와!"
잭슨의 부름에 감독실로 들어가야만 했다.
감독실에 들어가자마자 잭슨은 모니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너도 빨리 쉬고 싶을 테니 집중해서 들어라."
"예. 보스."
"라이언, 너는 오늘 이 순간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봤어야 한다. 이때, 너는 뒤로 패스했지? 하지만···."
라이언은 화면에 집중했다. 잭슨은 경기 장면을 멈췄다가 움직이게 했다가를 반복하며 라이언에게 이번 경기의 순간적인 판단에 관해 말했다.
"여기서 너는 상대의 볼을 끊거나 침투하는 선수를 막을 수 있었다. 너는 경기 중에 침투하는 선수를 쫓아가는 걸 택했다. 판단은 나쁘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과감해졌어도 됐다. 왜냐면 뒤에 로드가 마크하는 선수 없이···."
라이언은 계속 집중했고, 잭슨의 말을 머릿속에 넣기 위해 노력했다.
잭슨은 자신을 프로 선수로 데뷔시켜준 은사였다. 잭슨의 말은 늘 옳았고, 최근 자신을 자주 불러 이런 피드백을 해 주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플레이도 많이 향상되고 있었다.
"···여기까지다. 오늘은 푹 쉬고, 다음 경기에서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겠다."
"감사합니다."
라이언은 공손하게 답했다. 잠시 후, 잭슨이 물었다.
"할 말 있나?"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루카에 관해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왜?"
잭슨은 라이언의 의도를 읽어보려는 듯 라이언을 빤히 바라봤다.
라이언은 그냥 솔직하게 얘기했다.
"지금 루카는 잘하고 있지만··· 앞으로 예전 팀에서처럼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돼서입니다. 노팅엄에 피해가 가는 건 싫습니다. 저는 훈련이나 경기 중에도 루카와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감독님이 루카를 관리하는 데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드가 덜 고생했으면 하는 것도 있었고, 아까 훔쳐 들었던 잭슨과 루카의 대화 또한 라이언에게 영향을 끼쳤다. 기왕이면 성실한 선수가 되어보고 싶다는 루카가 노팅엄에서 목표를 이뤄 좋은 활약을 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잭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라이언, 너는 네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만 집중해라. 이런 건 감독이 할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
"아담! 내 훈련용 축구화 어디 갔어?"
웨일스 3인방 중 한 선수가 축구화와 각종 장비를 관리하는 장비관리사를 찾았다. 그의 자리에만 축구화가 놓여있지 않았다.
라이언이 알기로는 장비관리사 아담은 지금 이 근처에 없을 거였다. 보통 이 시간에는 창고 물품들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라이언은 그 선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지금쯤 용품 창고에 있을 거예요."
"아, 그래? 고마워."
선수는 씩 웃어주고는 드레싱 룸을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선수는 자신의 신발을 들고 돌아왔다. 장비관리사가 경기용 신발과 헷갈리는 바람에 일어난 실수라고 했다.
선수는 다시 한번 라이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자리에 앉아 훈련을 준비했다.
"다들, 슬슬 준비해. 감독님 벌써 필드에 나와 계신다."
"알았어요. 존."
수석코치의 말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말과 축구화를 신으며 떠들었다.
"어휴, 죽겠다. 아직도 피곤하다니까?"
"오늘은 회복훈련만 하면 끝이지?"
"맞아."
"내가 기가 막히는 펍 하나 찾았는데 오늘 한잔할 사람?"
그렇게 선수들이 떠드는 동안 라이언은 드레싱 룸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한 명이 없었다.
"자, 자. 이제 나가자."
그때,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로드가 선수들에게 말했다.
시계를 보니 훈련까지 1분도 안 남았다.
라이언이 선수들에게 물었다.
"혹시··· 루카 본 사람?"
< 27. 파트너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