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특별한 개막전 (1) >
"이 양반도 참 대단하단 말이야···."
나는 노팅엄시에서 가장 잘 팔리는 지역신문의 첫 페이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첫 페이지의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 속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사무실을 배경으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그래.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이 팀이 더 주목받았을 것 같아."
나는 사무실에 놀러 온 제임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 남자의 정체는 바로 노츠 카운티의 스콧 단장이었다.
지난 시즌 스콧 단장은 노츠 카운티를 약 20년 만에 2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콧 단장은 노츠 카운티의 운명을 바꿔버렸다. 회귀 전, 노츠 카운티는 내가 회귀할 때까지 3부 리그 중하위권에서 머무는 팀이었다.
스콧은 나처럼 회귀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기적을 만들어낸 거였다.
제임스가 스콧 단장에 관해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적당히 대답하며 스콧 단장에 관해 생각해봤다.
그와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눈 건 우리 팀의 슈퍼 유망주 레오를 영입할 때였다. 그날, 스콧은 내게 레오를 빼앗겼고 다짐하듯 외쳤었다.
'다음에는 안 집니다!'
'···그래요. 일단 2부 리그로나 따라와 보세요.'
'내가 못할 줄 압니까? 내가 우리 팀을 얼마나 잘 만들어놨는데요! 나는 우리 팀의 감독과 선수들을 믿습니다!'
이 대화가 운명을 바꿔버린 걸까.
아무튼, 이제 노츠 카운티는 회귀 전과는 다른 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기사 안에는 스콧 단장이 팀을 어떻게 운영해왔는지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 등 여러 인터뷰가 2페이지에 걸쳐 담겨 있었으니까.
물론, 인터뷰 중에는 우리 팀을 신경 쓰는 듯한 말도 있었다.
-우승해서 승격했든 플레이오프를 통해 승격했든 결국 승점 0점에서 시작합니다. 똑같은 조건이죠.
그리고 스콧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첫 경기에 노팅엄을 만나게 된다니 정말 신기하군요. 비록 원정 경기지만, 팬분들에게 꼭 승리를 안겨주고 싶습니다.
그렇다.
우리 노팅엄의 개막전 상대는 지역 라이벌이자 3부 리그 동기인 노츠 카운티였다.
우리 팀에서는 '노팅엄 더비'라고 부르고 노츠 카운티에서는 '노츠 더비'라고 부르는 더비 경기였다.
팀 전력으로만 보자면 노팅엄에 호재였다.
이번 시즌이나 지난 시즌에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팀이나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팀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들은 거의 프리미어리그 급의 자본과 선수단을 가진 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개막전이 노팅엄 더비라니···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왜? 지난 시즌에는 컵대회 포함해서 한 번도 안 졌잖아."
"더비 경기는 늘 변수가 많잖아."
도르트문트와도 멋진 경기를 치르긴 했지만, 우리 팀에는 신입 선수들이 많았다. 심지어 그 신입 선수들은 죄다 어렸다. 그 얘기는 즉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는 거였다.
노츠 카운티 또한 선수단의 절반을 갈아치웠지만, 전체적으로 경험 많은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번 시즌에 어떻게든 잔류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영입이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만약에 말이야··· 지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소리 마. 도니."
제임스가 몸서리쳤다.
다른 팀에 비하면 환상적이고 순하고 착한 우리 팬들도 노츠 카운티에게 진다면 늑대 떼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선수들의 사기는 땅을 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감독이 아무리 잘해 봤자 의미가 없어진다.
제임스가 말했다.
"너 때문에 괜히 불안해졌잖아. 잭슨은 뭐래?"
"감독님한테는 이런 얘기 안 했지. 괜히 신경 쓰면 어떡해."
"그럼 나는?"
"넌 불안해져도 상관없잖아."
제임스가 눈썹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제임스는 잠시 후, 내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가드 오브 아너(Guard of Honor, 스페인어로는 Pasillo)는 어떻게 됐어?"
"음··· 그게···."
가드 오브 아너는 우승팀의 선수들이 입장할 때, 상대 팀의 선수들과 심판이 양옆으로 도열에 박수를 보내주는 축구계의 전통이었다.
최근, 축구 협회에서는 구단주와 단장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프리미어리그뿐만 아니라 하부 리그들도 우승팀에게 가드 오브 아너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부 리그에서는 우승보다 승격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풍토였기에 우승 또한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새로 내놓은 정책이었다.
뜻은 아주 좋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가드 오브 아너는 보통 그 팀의 의사를 존중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 팀의 지역 라이벌인 노츠 카운티는 가드 오브 아너를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사정을 협회 직원에게 얘기하자 상대 단장이랑 잘 협의하라고 꼭 성사됐으면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가드 오브 아너를 받아내라는 얘기였다. 자신들은 한쪽의 편을 들 수 없어서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개막전에서 노츠 카운티가 가드 오브 아너를 하지 않으면 축구 협회에서도 불편하게 볼 거고, 팬들끼리도 다툴 것이다. 기자들도 사냥감을 발견한 이리떼처럼 달려들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제임스가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가드 오브 아너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스콧에게 전화를 걸어 이 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는 그 내용을 제임스에게 말했다.
"생각 좀 해 보겠다고 하더라."
"그래?"
"응. 만약에 할 거면 우리 직원에게 그날 얘기해도 된다고만 해 뒀어."
그리고 나는 선수들과 직원들에게 가드 오브 아너를 할 때와 안 할 때를 모두 준비시켜뒀다. 협회 때문에 이런 조치를 해두기는 했지만, 사실 나나 직원들이나 선수들은 가드 오브 아너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흘렀고, 경기 날이 되었다. 나는 경기 직전까지도 스콧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
"오랜만이네요. 킴."
"그러게요. 스콧."
2부 리그 개막 경기 10분 전. 나는 연락 한 번 주지 않던 스콧과 VIP석에서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며 손을 맞잡은 채로 눈싸움을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동시에 전광판에 송출되는 카메라가 우리를 잡았고, 경기장의 모인 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노츠 카운티와의 더비 경기 때, 스콧 단장과 눈싸움하는 건 기자들이나 팬들에게 하나의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홈 경기든 원정 경기든 무조건 경기를 보러 와야 했다.
거의 10초 동안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우리는 환호성이 잦아들 때쯤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려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네요."
"그러게요."
메인 스폰서의 관계자들을 초청하는 바람에 남은 자리가 딱 두 개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스폰서 관계자들의 자리를 옮기라고 할 수는 없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빈 자리에 앉았다.
스콧이 날 빤히 바라보다가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마치 휴전선을 사이에 둔 적국의 병사들처럼 옆에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앞만 바라봤다.
필드 위에서는 한 밴드가 이동형 무대 위에서 공연하고 있었고, 2만 5천 석을 가득 채운 팬들은 밴드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우리 팀의 상징 같은 곡이 된 를 말이다.
"넌 올곧게 빛나고, 내 삶을 꿈처럼 만들어주거든."
나는 노래를 적당히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스콧이 내게 말을 건넸다.
"좋은 노래네요."
갑작스러운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깐 고민했다.
내 입에서 나온 건 평범한 대답이었다.
"네. 대학생 밴드가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은 곡이죠. 저 밴드 애들은 이제 뮤튜브에서도 꽤 이름을 알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나한테 말을 걸었는지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스콧이 말했다.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나는 말 없이 스콧을 바라봤다. 틀림없이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역시나 스콧은 계속 말했다.
"그날 당신의 비웃음을 듣고 정말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감독과 선수들이 언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로비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시설도 바꿔주고 코치도 구해주고··· 어떻게든 승격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예. 하지만, 그 노력을 통해 2부 리그로 승격하고 나니··· 당신에 대한 분노가 부질없이 느껴지더군요."
"왜요?"
"당신 말 덕에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부임한 이후로 저는 정말 몇 배로 열심히 했거든요. 그리고 너무 바빠져서··· 감정이 유지될 틈이 없더라고요."
나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2부 리그로 올라오고 업무가 배로 늘었으니까.
내가 물었다.
"분노가 없는데 왜 싫어합니까?"
"당신은 노팅엄이고 저는 노츠 카운티니까요. 그리고 그동안의 관계도 있고요."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스콧이 계속 말했다.
"아무튼, 분노가 사라지고 나니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대단한 것들을 했는지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가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장내 아나운서의 말이 없었는데도 터널에서 노츠 카운티의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스콧의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러니까. 딱 오늘만 경의(Honor)를 표할 겁니다. 경기 시작 직전까지만요."
"예?"
노츠 카운티의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었던 노츠 카운티의 감독과 코치도 일어났다.
노츠 카운티의 사람들은 터널 입구부터 양 열로 나란히 섰다.
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노츠 카운티가 우리에게 가드 오브 아너를 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어서 노팅엄의 선수들이 입장했다.
노츠 카운티의 사람들은 전 시즌 3부 리그 우승팀인 우리의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스콧에게 투덜댔다.
"아니, 해줄 거면 진작 연락 좀 해주지···."
"전 당신이 싫다니까요. 약 좀 올라보라고 일부러 연락 안 했습니다. 노팅엄 구단 직원에게도 일부러 늦게 연락했고요."
"아니 그게 무슨 유치한···."
"원래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유치합니다. 그 맛에 축구 보는 거죠."
스콧의 터무니없는 궤변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주 좋았다. 왜냐면 어느새 노팅엄의 팬들도 노츠 카운티의 구단 이름을 외치며 손뼉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 험악한 모습을 보여줬던 노츠 카운티의 원정 팬들도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면 사라질 모습이겠지만, 아주 괜찮은 풍경이었다.
노츠 카운티에게 꼭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는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건전한 라이벌 관계가 이어지길 바라며 나는 스콧에게 덕담을 건넸다.
"이번 시즌 꼭 살아남으시길."
하지만, 스콧은 내 평화의 말을 삐뚤게 받아들였다.
"노팅엄은 무조건 살아남는다는 말 같습니다만? 노팅엄도 고작 승격팀일 뿐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시는군요."
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다가 긍정적인 말을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솔직히 말했다.
"그래요. 자신 있어요. 노팅엄은 잔류가 아니라 승격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미치셨습니까?"
"진짜로요."
스콧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아주아주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봤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노츠 카운티와 노팅엄처럼 스콧과는 앞으로도 계속 투닥거릴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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