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테디의 노팅엄 적응기 (1) >
"여기서 휴가를 보내신다고요? 정말요?"
테디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로빈에게 물었다. 헌터 형제의 에이전트 로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디에게 답했다.
"그래. 우리 에이전시에 자유계약 선수는 없으니까 사실상 이적시장이 끝났잖니. 그래서 여기에서 한 일주일은 있으려고. 혹시 불편하니?"
"전혀요!"
테디와 테오가 동시에 답했다.
둘의 대답에 로빈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테디는 정말 기뻤다. 한 달 동안 테오와 함께 지내긴 했지만, 로빈도 함께 지내는 게 훨씬 좋았다. 가족이 완전체가 되는 느낌이어서.
하지만, 테디는 동시에 로빈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 특히 자신이 데뷔전부터 나쁜 여론을 만드는 바람에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건 아닌가 해서.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년에는 휴양지에 가셨잖아요. 혹시 절 신경 쓰는 거라면···."
"너한테 무슨 문제가 생겨도 이 일주일 동안은 에이전트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로빈이 단호하게 테디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괜히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휴양지 같은 화려한 곳보다는 내 아들들이 있는 집에서 쉬고 싶어서 여기 온 거란다. 너희들이 훈련 나갔을 때, 책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돌아오면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고··· 이런 게 휴가 아니겠니?"
로빈의 말에 테디는 살짝 뭉클해져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 또한 테디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로빈은 테디와 테오를 번갈아 보더니 테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테오. 이틀 전에 부딪혔던 부분은 괜찮니?"
"네! 어제까지만 해도 살짝 아팠는데, 이제는 완전 멀쩡해요. 병원에서도 아주 가벼운 염좌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은 조심해. 알았지?"
"네에."
로빈은 이어서 테디에게 물었다.
"아직도 우울하니?"
"음··· 솔직히 조금요?"
테디는 로빈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디에게 말했다.
"널 이 팀에 데려올 때, 챔피언십리그에서도 손꼽힐 이적료로 널 데려왔으니까··· 언론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해."
"네···."
"그러니까 테디 넌 더 열심히 해서 몸값을 증명해야 해. 테오, 너도 마찬가지란다."
테디와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의 냉정한 말에 테디는 아주 조금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로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너희들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잖니? 힘들면 나한테 꼭 얘기해야 해? 나한테 얘기하기 어려우면 너희 팀의 단장이나 감독에게 말해도 좋고."
로빈의 따뜻한 말에 테디의 마음은 사르르 녹았다.
테디가 말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리고 테디 너는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렴. 선글라스 쓰고 다니면 아무도 못 알아보니까, 훈련 끝나면 느긋하게 커피라도 마시고 와. 산책은 기분 전환에 아주 좋단다."
"알겠어요."
그때, 테오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훈련장까지 태워다 줄 테니까 가방 챙겨서 나오렴."
테디와 테오는 짐을 챙겨 훈련장으로 향했다.
**
노팅엄 대학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노팅엄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 둘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둘이 대학 이야기가 아닌 축구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조금 특이했다.
최근 열성 팬인 부모님을 따라 노팅엄 FC의 시즌권을 산 스칼렛 벨이 말했다.
"짜증 나."
"왜. 무슨 일 있어?"
"이거 봐. 기사가 잔뜩 나오고 있어."
스칼렛은 어제부터 기분이 나빴다. 신입 선수들을 대부분 칭찬하며 테디만 비난하는 건 라이언과 테디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칼렛이 테디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친구는 기사를 읽자마자 말했다.
"짜증 날 만하네."
"그렇지? 노팅엄이 완벽하게 이겼잖아. 우리 아빠가 평점이 낮은 선수라도 승리에 이바지했다면 잘한 거라고 했는데··· 왜 테디만 욕하는 거야? 테디가 축구를 못 한 거야? 아니면 내가 축구를 제대로 본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거야?"
스칼렛이 흥분한 나머지 급하게 말하자 스칼렛의 친구는 양손을 들어 스칼렛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원래 축구판이라는 게 그래. 한 시즌 동안 계속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면··· 어떤 선수라도 욕이랑 칭찬을 번갈아서 받아."
"정말? 그러면 큰 문제 없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스칼렛의 친구는 고심하는 얼굴로 말했고, 스칼렛은 안도하는 얼굴로 친구의 손을 붙잡고 외쳤다.
"역시 노팅엄 2년 차 팬이야!"
"하하···."
스칼렛의 친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 해했다. 스칼렛의 친구는 제1회 노팅엄 푸드 페스티벌부터 시작해 2년간의 여정을 함께해 온 팬이었다. 스칼렛은 노팅엄을 응원하기 시작하며 이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학교 과제 얘기로 옮겨갔다. 이어서 스칼렛의 친구가 최근 조별과제를 하며 만난 남자에게 밤마다 연락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했고, 지금은 스칼렛의 남자 취향 얘기까지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스칼렛은 친구의 뒤에 앉은 남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얘기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등과 머리 색이었다.
스칼렛의 친구가 말했다.
"대학교 들어온 후에는 한 번도 연애 안 했지?"
"응. 취향인 남자도 없고··· 과제랑 공모전 하는 게 너무 바쁘기도 하고···."
그나마 쉬었던 주말에는 이제 축구도 보러 가야 했다.
"네 이상형이 테디 헌터라고 했지?"
그때, 친구 뒤에 있던 남자가 움찔했다.
그 순간 스칼렛은 남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테디 헌터가 카페에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거였다.
물론 친구는 눈치채지 못했기에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이 좋다고 했잖아. 테오를 은근히 챙기는 모습도 좋고. 심지어 팀에서 몸값도 가장 비싸고."
"음··· 그랬지."
"처음에는 라이언이라고 했으면서."
"라이언은 귀엽고 멋진 거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야, 근데 좀 부끄럽다."
"뭐가? 누가 듣는다고?"
테디로 추정되는 남자가 다시 한번 움찔했다. 스칼렛이 눈짓으로 친구 뒤를 슬쩍 바라봤고, 친구는 '모르는 사람이 듣는 게 뭐 어때서?'라는 표정으로 스칼렛을 보았다. 스칼렛은 계속 고개를 저었고, 친구는 이내 수긍해줬다.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대. 나 수업 들으러 가봐야겠어. 너는 이제 수업 없지?"
"응. 그래서 여기에서 과제나 좀 하려고."
"그래. 이따 저녁 먹을 때 보자."
"수업 잘 들어."
그렇게 친구가 떠나갔고, 스칼렛과 테디로 추정되는 남자만 남았다.
무척 한적한 카페였기에 졸고 있는 가게 주인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잠시 후, 남자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칼렛은 잠시 고민하다가 테이블을 지나쳐 가려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마셔요. 저 사실 과제 다 했어요."
"예···? 갑자기 왜···."
"테디 헌터 선수."
스칼렛의 말에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가 우물쭈물하며 스칼렛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선글라스 쓰면 못 알아볼 거라고 했는데."
"혹시 했는데 정말이었네요? 아니면 좀 민망할 뻔했는데. 아무튼, 우리 얘기를 엿들어서 알고 있을 테지만··· 당신의 팬이에요.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스칼렛은 이런 기회를 부끄러움과 망설임 때문에 놓칠 여자가 아니었다. 스칼렛이 싱글벙글하며 가방에서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내밀자 테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이어리를 받아들었다.
"이름이 뭐예요?"
"스칼렛 벨이요."
테디는 정성스럽게 사인하고, 스칼렛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요. 그리고 죄송해요."
"뭐가요?"
"제가 좀 더 잘했더라면 짜증 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에이, 아니에요."
스칼렛은 손을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정말 신기하네요. 경기장 멀리에서나 화면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선수를 이렇게 눈앞에서 보다니. 영광이에요."
스칼렛은 양손의 엄지 검지로 카메라 모양을 만들어 테디를 담았다. 테디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한 스칼렛이 물었다.
"왜 여기에 변장하고 온 거예요? 커피 마시는 거 좋아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요."
기분 전환이라는 말에 스칼렛은 테디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했다. 스칼렛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말했다.
"첫 단추를 나쁘게 끼워서 어떡해요?"
"뭐··· 운이 없었던 거죠."
"그래도요."
"미움받는 건 익숙해요. 어릴 때도 그렇고, 지난 팀에서도 그렇고··· 잘할 때는 칭찬 받고, 못할 때는 욕 먹는 게 반복되는 게 축구선수의 삶이니까요."
씁쓸한 표정을 하는 테디는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테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절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
펍 <파인즈>에는 서포터즈의 리더들이 모여 있었다.
"데뷔전이 별로였다니? 경기력이 안 좋았다니? 기사를 뭐 이딴 식으로 쓰냐?"
"맞아. 한 경기 밖에 안 치렀는데. 너무 악의적이야."
"기자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갖고 놀려고 하는 게 한두 번이야?"
"기분 더럽네. 보통 팬들은 기자들의 말이라면 다 그럴듯하게 들리니까 테디에 관해 안 좋게 생각할 거 아냐."
그리고 리더들은 테디에 관해 떠들고 있었다.
내가 직접 만들려고 했던 여론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5부 리그로의 강등과 각종 언론의 포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팬들이라 그런지 대부분 흔들림 하나 없이 핵심을 볼 줄 알았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보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우리라도 잘 응원해 주자고."
"좋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번 주말부터 시작인데··· 어때, 스미스. 다 만들어 가?"
"거뜬하지. 이제 두 개 정도만 더 만들면 돼."
리더들은 여기 모인 진짜 이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근데, 미스터 킴. 정말 일반 관중석에서는 깃발 흔들면 안 되나?"
서포터즈는 2부 리그 승격을 기념해서 한두 개에 불과했던 대형 깃발을 대폭 늘리기로 결정했다. 나는 축구 협회의 규정과 우리 구단의 입장을 알려주기 위해 이곳에 온 거였다.
"네. 조용히 경기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깃발 사용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홈 서포터즈석으로 한정하려고요."
"그래··· 아쉽구만."
리더들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포터즈 마다 대형 깃발을 몇 개 가져갈지 정했고, 깃발을 어떻게 언제 휘두르고 주변에서 호응해줄지 의논했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그리고 앞으로 추가할 깃발 형태 말인데··· 괜찮은 아이디어 없나?"
지금 만들고 있는 대형 깃발에는 소규모 서포터즈의 이름에 맞춰 소나무,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 여러 나무를 새겼다. 나와의 의논을 통해 녹색 배경에 검은색, 흰색만 사용해서 만들었다.
대형 깃발은 이렇게 정해졌지만, 앞으로 추가할 깃발은 의논을 통해 정하자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해 온 의견을 냈다.
"선수들의 얼굴을 넣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선수들의 등 번호와 이름을 함께 적는다던가."
"오?"
"괜찮은데?"
예상대로 호응이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구단이 깃발에 사용하고 있어서 자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여기에 온 목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장 먼저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테디의 깃발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기왕이면 이번 주에요."
내 말이 끝나자 리더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괜찮네."
"나쁘지 않은데?"
"다른 신입 선수들이 서운해하면 어떡해?"
"그런데 알렉산더 걸 가장 먼저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순서가 있지."
여러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차분하게 의견을 모아보려고 입을 열려던 그때, 한 리더가 말했다.
"그냥 다 만들면 되잖아. 헤이, 스미스! 가능하지? 우리 선수들을 위해서인데. 응?"
스미스는 깃발, 현수막 등을 인쇄하거나 기계로 직접 만드는 가게의 사장님이었다.
스미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자식들··· 자기들이 할 일 아니라고···."
"돈 주잖아. 돈!"
스미스는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까짓것 경기 전날까지 밤새우면 되지 뭐."
"오우!"
리더들이 각자의 맥주잔을 들고 환호했다.
나는 이들과 함께 맥주잔을 나눴다.
우리의 선물에 테디가 기뻐할 걸 상상하니 내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았다.
< 30. 테디의 노팅엄 적응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