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확장 (1) >
노팅엄은 저번 주 경기에서 상위권 후보인 레딩을 1-0으로 잡으며 두 번째 승리를 따냈다.
결승 골을 넣은 선수는 테디. 물론, MOM도 테디였다.
그래서 나는 테디와 테오의 에이전트 로빈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어때요. 헌터 형제를 우리한테 맡기길 잘했죠?"
"뭐··· 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네요."
"나쁘지 않다니요. 무조건 좋지."
오늘은 리그 세 번째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로빈은 지난주에 이어 또 한 번 경기장을 찾았고, 나는 시간을 내서 로빈과 함께 경기장 복도를 뱅 돌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의 상대는 중하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는 팀이었다. 우리가 이겨 볼 만하다는 생각 덕분인지 그런지 복도를 돌아다니는 팬들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다들 3연승을 기대하고 있을 거다. 나도 그렇고.
이 모습을 보는 로빈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손에 양념치킨 컵이 들려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은근슬쩍 말했다.
"다음 시즌에 아르망 보이스랑 페린 펠란드를 데려오고 싶은데···."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지 못한다면 대화할 생각도 없으니까 꿈 깨세요."
하지만, 그녀는 몹시 단호했다. 방금 언급한 둘은 프랑스 1부 리그 하위 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선수들이었다. 당연하게도 로빈이 담당하는 선수들이었고.
둘 다 2~3년 뒤에는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팀에서 뛰게 되기 때문에 미리 얘기해봤는데··· 너무 단호하게 거절하니 슬펐다.
나는 투덜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승격하면 진지하게 얘기해주셔야 합니다."
"뭐, 그럴게요."
로빈은 과연 될까? 라는 얼굴도 아니라 완벽하게 기대 안 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잭슨이 꼭 1부 리그로 올려줄 거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사실 나조차도 1부 리그로의 승격을 100% 믿지 않았기에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저 만약에 승격한다면 이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로빈을 압박해야겠다는 다짐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게 있긴 했다.
"당신 일 처리가 깔끔하다는 건 알았으니 급에 맞는 선수들을 얘기한다면, 긍정적으로는 생각해볼게요."
"오, 정말요?"
바로, 상위권 에이전트의 신뢰였다.
"네네. 대신 분수에 안 맞는 선수 얘기하지 말고요. 테디랑 테오 같은 경우도 특수한 경우였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겨울에 데려올 선수들 목록 정리해뒀으니까 오늘 경기 끝나면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해요."
"···준비성이 좋네요. 저녁은 안 되고, 차나 한잔할게요."
"좋습니다."
에이전트 대부분은 서로 연락하는 사이고, 수수료만 받을 수 있다면 서로의 선수들을 대신 구단에 소개해 주는 일도 있었기에 이런 인맥은 아주아주 중요했다.
로빈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지난주에도 생각했는데··· 노팅엄은 경기장 크기에 비해 팬들이 정말 많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아까 운전하면서 봤는데, 밖에 사람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네, 맞아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좌석 확장공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거의 20경기 연속 매진이라면서요."
"안 그래도···."
로빈에게 자연스럽게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취소 표가 더는 없다고요? 아니, 여기서 8시간을 기다렸는데···."
통로 번호를 확인하니 매표소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점점 험악한 목소리와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로빈에게 양해를 구했다.
"무슨 일인지 가봐야겠어요."
로빈은 잠깐 걱정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로빈이 피식 웃고 말했다.
"고생하세요."
"네, 이따 경기 끝나고 사무실로 오세요. 아르헨티나에서 사 온 맛있는 차를 준비해 둘게요."
"기대할게요."
나는 로빈에게 경기 잘 보라고 인사하고 매표소 쪽으로 향했다.
*
"무슨 일이에요?"
"아··· 미스터 킴. 그게···."
매표소 앞에는 외국인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왜 외국인인 줄 알았냐면··· 일단 동양인이 절반이었고, 차림새가 딱 봐도 여행하는 사람들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표소 옆에서 표 검사를 하던 직원이 내게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표를 못 구해서 현장 표라도 사려고 아침부터 줄을 섰는데··· 그마저도 다 떨어져서 취소 표를 기다린다고 지금까지 줄을 서 있었는데··· 결국 취소 표를 못 샀다는 거죠? 저 많은 사람이?"
"예. 잘 요약하시네요."
대충 봐도 백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매표소가 여기뿐만은 아니니 이런 사람들이 더 있겠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말을 들어보니 열 시간을 넘게 기다린 사람들도 있다는데, 여태까지 기다린 게 아무 쓸모도 없어졌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당신들 하는 게 뭐야. 암표라도 제대로 잡아서 자리를 만들던가. 암표 가격이 얼만 줄 알아?"
노팅엄 FC의 암표 가격은 프리미어리그 팀 중에서도 인기 팀 수준의 가격을 자랑한다.
경기장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암표를 근절해보려고 하고 있었지만, 암표상들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암표를 팔기 때문에 끝이 없었다.
참고로 매표소 직원은 그냥 문을 닫아 버렸고, 분노한 외국인들이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였다. 매표소 직원은 뒤쪽으로 나왔을 테니, 사실상 이들은 섀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경찰은 불렀어요?"
표가 없다고 저렇게 난동을 부리는 걸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동이 커지면 폭동이 될 수도 있으니까.
"네. 저렇게 되자마자 보안요원들이 바로 무전을 했는데, 연결이 잘 안 돼서 샌더스가 직접 데리러 갔어요. 경찰들은 근처에 있었으니까, 곧 올 거예요."
"샌더스요? 알렉산더?"
"네. 지나가다가 소란이 이는 걸 보고 도와주려고 왔다더라고요. 아, 저기 온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말을 탄 경찰들이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우리 팀에 관심이 있어서 온 팬 들이었지만, 경기장의 안전만큼 중요한 게 없었기에 참 좋은 대처였다.
나는 말 뒤에서 급히 뛰어오는 알렉산더를 보며 손을 들었다.
*
나는 자리에서 벗어나 알렉산더와 함께 관계자 전용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구단이 잘 되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그러게요. 행복한 문젯거리긴 한데···."
"현장 표를 더 많이 팔면 안 되냐?"
알렉산더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시즌권 판매량이 약 2만 장이라서요. 일반인들을 위한 표는 5천 장 정도밖에 없어요."
"아··· 정말 행복한 문젯거리구나."
"그렇죠."
문제점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조립식 푸드코트를 야외에 배치하고, 대형 스크린이랑 좌석도 경기장 밖에 몇 개 설치했는데··· 역부족이에요."
당장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를 하긴 했다.
하지만, 팬들의 숫자는 너무나도 많았다.
외국인 관광객이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 이후 급증하면서 우리 팀은 프리 시즌에도 늘 만원 관중으로 경기를 치렀다. 평균 관중 2만 5천 명이면 1부 리그의 하위권 팀에도 비길 수 있는 숫자였다.
이런 숫자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바로, 좌석 수 확장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프리미엄 석을 괜히 만들었나 싶고···."
그랬다면 몇천 명은 더 수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좋은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조금 후회됐다.
나는 진지한 얼굴의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런 얘길 털어놓을 수 있는 입 무겁고 형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좌석 확장공사에 관해 얘기해놨는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알렉산더가 짧게 말했다.
"고생 많구나."
"내년에는 더 고생할 거 같아요. 미치겠어요. 정말."
"그래도, 성과는 있었잖아."
알렉산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길게 징징댈 생각은 아니었기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죠. 우리가 2부 리그 1위죠."
"두 경기밖에 안 치렀지만 말이지."
"흐흐, 그러니까 즐기자고요. 곧 떨어질 테니까."
내 말에 알렉산더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이 구단은 어디까지 커질까요."
아무 생각 없는 질문이었음에도 알렉산더는 진지한 얼굴로 몇 초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노팅엄의 모든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하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럴지도 몰라. 여기라면 말이다."
알렉산더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온갖 우연이 모여서··· 나 같은 놈도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곳이니까. 그러니까 아마 될 거다. 이 경기장에는 온갖 운이 모여드는 것 같거든."
"참··· 이상한 근거네요."
"그건 그렇구나."
충분할 만큼 마음이 편안해진 걸 느꼈다. 그래서 진지한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나는 알렉산더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애 잘 돼 간다면서요. 축하해요."
"···감독님이 말했냐."
"네,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같이 조깅 하거든요. 캡틴도 같이할래요?"
"···생각해보고. 아, 이제 가봐야겠다. 넌 VIP 석으로 돌아갈 거지?"
어느새 꼭대기 좌석으로 향할 수 있는 터널까지 올라왔다. 오늘은 김건혁이 감독 옆에서 전력분석관 역할을 하고, 알렉산더와 이민호가 영상을 찍는 날이라고 했다.
나는 알렉산더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와 계시거든요. 구단 확장공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실 분이요."
"사업가라도 불러온 거냐?"
"아뇨. 알려드려요?"
"관심 없다. 네 일이잖아."
알렉산더의 말에 나는 작게 실소하고 말했다.
"그래요. 제 일이죠. 경기 시작 전에 아나운서가 소개할 거니까, 그때 보세요."
"그래. 그럼, 수고해라."
"아, 맞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알렉산더를 붙잡았다. 그리고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장 할 건 아닌데 미리 말해두려고요. 좌석을 확장하게 되면 캡틴 이름이랑 얼굴을 무조건 쓸 거예요."
"뭐?"
"좌석 이름을 알렉산더 샌더스 석으로 하려고요. 의자에 색도 칠해서 반대편에서 보면 알렉산더 얼굴이 보이게···."
알렉산더는 내 말을 잠시 상상해보는 듯 살짝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안 된다."
"왜요. 부끄러워요?"
내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거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어요. 계약서에도 있는 내용이라고요. 그러게 계약서에 서명할 때 꼼꼼하게 확인하셨었어야지."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가보겠다고 말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알렉산더가 허탈한 듯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알렉산더에게 손을 흔들었다. 알렉산더 또한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고, VIP 석에 도착하자마자 오늘 초대한 진짜 VIP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벌써 오셨네요."
"오랜만에 보는 축구 경기가 기대돼서요. 반갑습니다. 미스터 킴.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죠?"
"예, 시장님."
노팅엄 시의 시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 31. 확장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