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위기의 10월 (2) >
로드는 드레싱 룸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선수들을 돌아봤다.
절반 정도의 선수들은 유니폼을 벗을 생각도 않고 바닥을 보고 있었으며 라이언과 테디는 심판 판정에 관해 불만스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나머지 선수들은 자기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드레싱 룸 안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
로드 또한 이들과 같은 심정이었지만,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 경기에서 노팅엄은 비겼다.
전반전까지만 해도 2-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경기가 끝나기 직전 2점을 연달아 실점하며 비긴 경기였기에 선수들의 충격이 더 컸다. 심지어 오늘 상대는 리그 18위, 그러니까 하위권 팀인 웨스트브롬위치였다.
경기장에서 뛰며 그 허탈함을 몸소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로드는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매주 잘하는 팀이 어딨어? 오늘 경기는 빨리 잊어버리고, 다음 주 경기나 생각하자고."
로드의 목소리에 선수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로드가 손뼉까지 몇 번 치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무패 팀이야. 아주 좋은 시즌을 보내고 있다고."
선수들이 하나둘 미소짓기 시작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로드의 말에 환호성을 보냈다.
드레싱 룸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밝아졌다.
오늘 한 골을 넣었지만, 세 개의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버린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기회를 너무 많이 날렸어. 다음 경기에서 꼭 만회할게."
"그럼 다음 경기에서 해트트릭 내기 고?"
세자르의 사과를 로드 나름대로 최대한 유쾌하게 받았다.
"그래, 해라!"
"캡틴, 만약에 세자르가 내기에서 지면 미스 오리아나한테 여자친구들 좀 소개해 달라고 해줘."
"오? 그거 좋은데?"
어느새 분위기는 완벽하게 괜찮아져 있었다.
로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다시 한번 손뼉을 크게 한 번 쳤다. 선수들의 시선이 로드에게로 모였다.
"자, 어서 샤워하고 짐 싸서 집에 가자고. 오늘 영양보충 하는 거 잊지 말고. 만약에 집에서 못 먹을 것 같으면 여기 있는 거 먹고 가."
"예스! 캡틴!"
선수들이 장난스럽게 대답하고, 각자 행동하기 시작했다.
"응, 리아. 어디서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씻고 나갈게."
세자르는 여자친구 오리아나를 만나는 것 같았고, 선수들도 각자의 일정을 활기차게 얘기하며 내일 보자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로드는 속으로 안심했다. 괜히 분위기가 처진 상태로 집에 돌려보냈다가는 훈련부터 시작해 다음 경기에도 영향을 끼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주장의 역할을 잘한 것 같아 왠지 뿌듯했다.
그리고 할리와 루카가 로드에게 다가왔다.
할리가 말했다.
"오늘은 좀 놀까? 내일은 오후 훈련이잖아."
로드 옆에 있던 라이언이 먼저 대답했다.
"미안. 같이 하고 싶은데 나는 약속이 있어서."
로드 또한 거절의 대답을 했다.
"나는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오셔서."
"아, 정말? 그럼 중간에 인사 한 번 하러 갈게."
할리는 로드의 옆집에 살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로드가 둘에게 말했다.
"둘 다 그래도 적당히 해. 오늘은 푹 쉬어줘야 하는 거 알지?"
"알지. 우리가 프로 몇 년 찬데."
할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루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가 이어서 말했다.
"오늘은 제대로 쉬고, 내일부터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훈련하면 될 거야. 감독님이 짜준 대로만 한다면, 분명히 무패행진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로드, 라이언,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날의 무승부는 무패행진의 중간다리가 아닌, 무승행진의 시작이었다.
*
"···."
로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몇몇 선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무승부였지만, 오늘은 졌다. 그것도 리그 14위 팀인 프레스턴에게.
8월부터 시작된 무패행진이 깨진 만큼 드레싱 룸의 분위기는 훨씬 더 침울했다.
오늘은 지난주처럼 격려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선수들의 실책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기 때문에 로드는 입을 여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잠시 후, 우울한 분위기의 드레싱 룸에 잭슨 감독이 나타났다. 잭슨이 무표정한 얼굴로 선수들에게 말했다.
"쓰레기 같은 경기였다."
잭슨은 냉정한 목소리로 오늘 선발로 뛴 선수들에게 한 마디에서 두 마디로 잘못된 점을 지적했고, 잭슨의 독설을 들은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로드의 차례가 됐다.
"오늘, 네 플레이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네 역할은 그것뿐만이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로드는 고개를 숙이며 경기 때를 생각했다.
한 골을 실점하기 전부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못 열었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선수들 대부분이 패스, 트래핑 같은 아주 기본적인 실수를 남발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선수들을 달래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었다.
선수들에게 한 마디씩 던진 잭슨은 빨리 씻고 버스 타러 오라는 말만 남기고 드레싱 룸을 떠났다. 오늘은 원정 경기였기에 구단 버스를 타고 노팅엄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이 로드를 한 번씩 흘끔거렸다. 지난 경기처럼 뭔가 한마디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로드는 지난 경기 때처럼 긴말할 힘이 없었다.
"수고했어. 빨리 씻고 버스로 가자. 노팅엄에 돌아가고 싶네."
로드는 씻으면서, 옷을 다시 입으면서, 버스를 타고 돌아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무패행진을 달리다가 지는 일은 로드 또한 겪어봤었다. 작년 3부 리그에서 우승했을 때, 시즌 중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분위기가 뭔가 달랐다.
그때는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면··· 이번에는 더 나빠지기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로드는 노팅엄에 도착하자마자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지난 시즌의 주장 알렉산더에게 다가갔다.
"제가 대신 들어드릴게요."
"응? 괜찮다."
"아니에요."
로드는 카메라 장비가 들어있는 알렉산더의 짐을 뺏어 들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로드가 먼저 말했다.
"요즘 얘기할 시간이 없네요."
"하하, 그러게 말이다. 요즘에는 전력분석실에서 밤을 새우는 게 당연하게 돼서 말이야. 나는 짧은 동영상을 이 정도로 긴 시간 동안 편집해야 하는 건지 몰랐거든."
로드는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축구 얘기만 하던 알렉산더가 동영상 편집 얘기를 하고 있다니.
다시 살펴보니 알렉산더의 눈 밑이 완전 퀭해져 있었다. 수염 또한 듬성듬성 나 있었고.
"반 폐인이 다 됐네요. 캡틴."
알렉산더가 머쓱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주장 일은 할 만하나?"
알렉산더의 물음에 로드는 잠시 멈칫했다. 새로운 분야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 괜히 고민 하나를 더 던져주는 건 아닌가 해서.
하지만, 알렉산더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니까 이렇게 짐까지 들어주는 거겠지. 편하게 얘기해봐라."
"역시 캡틴이에요. 그러니까요···."
로드는 입을 열어 선수들의 현재 모습과 자신의 기분을 설명했다.
선수들은 훈련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고, 자신감이 떨어진 것 같지도 않은데 경기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끼고, 실제로 경기력도 좋지 않다고.
"미안하다. 저번 주부터 경기장에 안 나가봐서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
알렉산더의 말에 허탈해진 로드가 고개를 픽 숙였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말은 계속됐다.
"그래도, 훈련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데 경기력이 떨어진다는 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분명 훈련에 뭔가 문제가 있을 거다. 그걸 찾아봐라."
로드가 다시 고개를 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주 간단한 인과관계였지만, 알렉산더가 말해주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로드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네요. 감사해요."
"그래."
알렉산더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로드와 잡담을 하며 전력분석실에 도착했다. 로드는 알렉산더에게서 뺏은 짐을 내려놓고, 땀을 닦은 후 말했다.
"그럼 가볼게요. 내일부터 캡틴 말대로 훈련 모습을 잘 지켜봐야겠어요."
"잠깐."
알렉산더의 단호한 목소리에 로드는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네?"
"남은 짐을 옮기는 것도 좀 도와줘라."
알렉산더의 진지한 얼굴에 로드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힘차게 답했다.
"네!"
*
첫 패배 이틀 후, 로드와 라이언은 팀 훈련이 끝난 다음에 남아 코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젤까?"
"으음···."
둘은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드가 어제 라이언을 만나자마자 알렉산더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고, 함께 문제점을 찾아보자고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이 의견을 제시했다.
"요즘에는 우리처럼 남는 사람이 적잖아. 추가 훈련을 안 하는 게 문제가 아닐까?"
"음··· 아닌 것 같아. 추가 훈련은 꼭 필요한 게 아니잖아. 선택인 거지."
"으아··· 어렵다."
라이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매트 위에 대자로 누웠다. 로드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고, 피트니스 룸 안을 둘러봤다.
"해리! 쉬엄쉬엄해!"
"아씨, 말 걸지 마. 놓칠 뻔했잖아."
"하하."
라이언 말대로 사람이 적긴 했다. 해리와 로드, 라이언 딱 세 명밖에 없었다. 필드 위에서 킥 연습을 하는 웨일즈 3인방과 스코틀랜드 2인방을 제외한다면 절반도 안 되는 숫자였다.
"하아··· 이대로 자고 싶다. 조용해서 좋네."
그때, 라이언이 중얼거리면서 매트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그리고 잠시 후, 로드가 큰 탄성을 내뱉었다.라이언이 깜짝 놀라 움찔하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왜. 갑자기 왜 그래."
"네 덕에 뭐가 문제인지 알았어."
"응?"
"다음 경기 전까지 계속 지켜보면 확신이 들 것 같아."
"그게 뭔데?"
로드는 신난 나머지 라이언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
"빌어먹을···."
늘 시끌벅적한 노팅엄의 홈구장이 조용했다. 로드는 전광판을 올려다 봤다. 전광판의 점수판에는
레딩-노팅엄1 – 0
라고 적혀 있었다.
경기 전에 계산해서 알고 있는데, 노팅엄은 이제 4위였다. 승격 직행이 가능한 2위에서도 두 계단 아래에 위치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상대가 리그 8위인 레딩이었지만, 그 핑계를 대기에는 노팅엄의 경기력이 좋지 않았다.
로드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드레싱 룸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선수들에게 한마디 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 지켜봐 온 문제점을 말이다.
로드는 터널을 걸으며 그동안 깨달은 문제점을 떠올렸다.
노팅엄의 선수들은 선수로서 해야 할 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해버린 게 아주 큰 문제였다.
리그 1위를 달리고 있어서 그랬던 건지, 무패행진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건지 선수들은 늘 자신만만하고, 충족감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즐거운 흐름에 몸을 맡겨 버렸다. 긴장이 풀려버린 것이다.
팀 훈련은 모든 걸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코치에게 의견을 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했다. 굳이 추가 훈련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팀 훈련을 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여유로워졌으니까.
예를 들어 하루에 훈련을 100을 해야 한다고 하자.
A매치 기간 전에는 어떻게든 다들 100, 또는 100을 넘어서 110, 120까지도 훈련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80만 하고도 만족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0의 부족함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결점투성이 경기력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간다면 틀림없이 팀은 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드레싱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수들이 모두 불편한 표정으로 대화 없이 앉아 있었다.
로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
"어으··· 문도 안 닫고···."
"경기장이 아닌 곳에서 저렇게 화가 난 로드는 처음 봤어요."
나와 마리아가 순서대로 말했다.
나와 마리아, 잭슨은 드레싱 룸 앞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로드는 정말 차가운 목소리로 선수들에게 나사가 풀렸다고 말하고 있었고, 그 천사 같은 라이언마저도 낮은 목소리로 동조하고 있었다.
몇몇 선수가 로드에게 반박했지만, 로드는 최근 2연패를 얘기하며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분위기가 참 살벌했다.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을까요?"
나와 마리아가 이렇게 걱정을 하는 동안, 잭슨은 말없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잭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2연패 후 선수단의 분위기와 잭슨이 걱정돼서 여기 찾아온 거였으니까.
"잭슨···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잭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예. 리그에서 가장 어린 팀이었기에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조치를 해야 했던 게···."
"여드름이 여물기도 전에 무리해서 짠다면 흉터가 생길 가능성이 아주 커집니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스마트폰의 화면을 끈 잭슨이 말했다.
"마리아, 고마워요. 시간도 별로 없었을 텐데 제가 원하는 영상을 정확히 찍어왔네요."
"스마트 시대잖아요. 직원들을 여러 장소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 하는 사람 붙잡고 인터뷰해서 보내줬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영상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네, 충분합니다."
잭슨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의 멋진 수염과 잘 어울리는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이어서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사람이 자라는데 성장통이 꼭 필요하듯이, 팀과 선수들이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통증이었습니다."
잭슨은 한 번 더 말하고, 드레싱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괜히 1군 선수단이 23명인 게 아닙니다."
< 33. 위기의 10월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