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03화 (103/245)

<어떤 기분이신가요?>

<실망스럽습니다.>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는 광고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일주일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노팅엄의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며 풀곤 하죠. 특히, 오늘같이 홈 경기가 있는 날에는 꼭 이기진 못하더라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경기장에 옵니다.>

남자의 말이 계속될수록 선수들의 얼굴이 굳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기운을 얻기는커녕 힘만 빠져서 돌아가네요. 다음 주에는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팬들이 차례로 오늘 경기에서 느낀 점들을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A매치 기간 전까지만 해도 투지 넘치게 뛰던 선수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누가 잡아라도 간 걸까요?>

<두 달 만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경기장에 왔는데··· 실망스러워요.>

<오늘은 응원할 맛도 안 나더군요. 괜찮은 선수는 로드, 해리, 라이언, 큰 헌터뿐이었어요. 나머지는 다 엉망이었어요!>

동영상은 거의 30분 동안 재생됐다.

*

동영상이 끝났는데도 선수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편집을 거치지 않은 생생한 팬들의 소감은 그만큼 이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잭슨이 침묵을 깼다.

"시즌 초의 너희들이 이 팀을 못 이겼을까?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선수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이길 수 있었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너희는 팬들을 실망시켰고, 동료들을 실망시켰으며, 날 실망시켰다."

오늘 경기에 뛴, 무패행진을 이끌었던 선수들은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잭슨은 그 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선수들을 아주 좋아한다. 어떻게 바뀔지 지켜보겠다. 그리고."

잭슨이 이어 분위기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지금은 살짝 고개를 들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말했다. 이들은 후보 선수들이었다.

"다음 주.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 나설 선발 명단을 미리 발표하겠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노팅엄이 주춤하는 사이 리그 1위를 탈환한 챔피언십 리그의 최강팀이었다.

잭슨은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후보 선수들의 눈이 반짝였다.

로드와 해리, 라이언, 그리고 테디를 제외하고 전부 후보 선수들이었다.

두 달 넘게 선발이었으나 이번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

다음 날, 노팅엄의 훈련장 드레싱 룸에서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할리, 벌써 왔어?"

"응··· 엄마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지더라."

늘 제시간에 맞춰오던 할리가 훈련이 시작하기 40분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로드와 할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할리는 드레싱 룸 반대편에 놓인 짐을 보며 로드에게 물었다.

"저분들은 언제 온 거야?"

"훈련 한 시간 전에는 오시더라고."

할리가 본 건 후보 선수들의 짐이었다.

할리는 잠시 그 짐을 멍하니 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드, 지금 나가서 패스 연습이나 할래?"

로드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 뿐만이 아니었다.

훈련이 시작하기 전, 루카가 옷을 갈아입으러 온 할리에게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할리, CD 돌려줄게."

"다 깼어?"

루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휴가 때 빌려줘."

할리 또한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과 로드는 그런 둘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드가 오늘 아침 라이언을 깨우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감독님 말이 효과가 있었나 봐.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준비 완전히 마친 루카가 바로 나왔어. 내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대단하네. 저것도 봐봐."

로드의 말에 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로드가 말한 곳에는 세자르가 스마트폰을 붙잡고 열심히 변명하고 있었다.

"아니야. 우리 리아 잘못이 아니라니까? 내가 정신머리를 놔서 이렇게 된 거라고. 아니, 나도 매일 보고 싶지. 하지만, 난 1억 파운드짜리 선수가 돼야 하잖아. 우리 조금만 참자? 응? 뽀뽀 소리 내 달라고? 알겠어···."

"그만 엿듣자."

"그래."

로드와 라이언이 황급히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훈련장에 나갈 준비를 마친 루카가 있었다.

"안 갈아입어?"

루카의 말에 로드와 라이언은 황급히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로드, 라이언, 루카, 할리는 나란히 훈련장으로 나갔다.

평소와 같은 잡담을 하던 중, 로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희들은 무슨 하루 만에 사람이 바뀌냐."

로드의 말에 할리가 하하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라이언이 로드의 말을 이었다.

"감독님 말 덕분이지?"

이번에는 루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감독님 덕분에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팬들 반응까지 보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루카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시무룩해졌다. 로드는 라이언과 눈을 맞추며 씩 웃고는 루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아직 리그는 2/3나 남았으니까."

**

"어떠냐. 벤치는 오랜만이지?"

"전 캡틴이랑 같이 경기 보니까 좋네요."

"태평한 녀석."

할리와 알렉산더가 잡담을 나누며 경기장을 보고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노팅엄의 선수들이 리그 1위 리즈를 상대로 열심히 뛰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하네요."

"그럼 처참하게 지기라도 할 줄 알았냐?"

"그걸 바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훈련 때나 실제 경기에서 뛰어봤을 때나 할리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보다 실력이 떨어졌었다.

원래 있던 선수들로도 리즈나 아스톤빌라를 상대하는 건 어려울 거라는 평가가 선수들 사이에서 있었다.

하지만, 웨일스 3인방, 스코틀랜드 2인방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침착하게 리즈의 공격을 막아내고, 오른쪽 윙 테디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역습 공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현재 스코어는 1-1. 리그 1위를 상대로 노팅엄은 분전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면 역전 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자신감이랑 밝은 거 빼면 시체니까요."

할리의 말에 알렉산더가 가볍게 웃었다. 할리의 두 눈은 필드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알렉산더가 할리에게 물었다.

"어떠냐. 네 실수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 못 하게 된 기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요?"

"너는 이번 시즌 전부 선발로 뛰었었다."

알렉산더의 말에 할리는 큰 반응 없이 그대로 필드를 바라보았다.

할리가 분한 듯 중얼거렸다.

"긴말이 필요한가요. 뛰고 싶어요."

알렉산더는 그 말을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옆에 나란히 앉은 선수들을 바라봤다. 원래 주전이었던 다른 젊은 선수들도 각자의 얼굴을 하고, 필드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란히 앉은 젊은 선수들의 바로 뒤 벤치에 잭슨이 앉았다.

잭슨이 젊은 선수들에게 말했다.

"보면서 들어라."

몇몇은 살짝 뒤를 보기도 했지만, 젊은 선수들은 필드를 가만히 보았다.

잭슨이 다시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벤치에서 경기장을 봐야 할 때가 있다. 자기가 누리던 게 소중한 거라는 걸 잊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잭슨의 말은 경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나도 너희들처럼 스페인 2부 리그에서 뛰던 프로 선수였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너희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정신 줄을 놔 버렸었지. 리그가 시작하고 7경기 만에 10골을 넣었었거든. 나는 중앙 미드필드였는데 말이다.

하루하루 어중간하게 놀고, 훈련은 팀에서 시키는 것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만큼 하면 충분하다고 자기 위로를 하며 안주했었다. 그게 잘못된 거라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시피 프로 선수는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으니까.

나는 서른 살이 되어서도 스페인 2부 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후회했다. '그때 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1부 리그에서 뛸 수 있었을 텐데.'라고."

처음 듣는 잭슨의 과거였기에 젊은 선수들 외에 코치와 다른 선수들도 잭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로 택한 이 직업에서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선수들은 나처럼 후회하지 않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관중들의 함성, 응원가 소리, 선수들의 외침이 뒤섞인 필드와는 대조적으로 노팅엄의 벤치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잭슨의 말만이 또렷하게 선수들의 귀에 박히고 있었다.

"적당히 훈련하고, 남은 에너지를 여가 생활에 쏟는 건 그 순간의 정신건강에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희가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았을 때, 아니면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찾아올 거다."

늘 무서운 이미지였던 잭슨이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길게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너희가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었다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거다. 너희들은 가능성이 넘치는 선수들이다. 모두 1부 리그에는 거뜬히 올라갈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지. 그러니까, 이번 주처럼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배우고, 발전하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프로 선수의 수명이 정말 짧으니까."

"···감사합니다."

할리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다른 선수들 또한 잭슨을 깊은 감명을 받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잭슨은 그런 선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너희들의 축구계 선배로서 하는 말이다. 이제는 감독으로서 얘기하겠다."

"예."

"너희 중 국가대표에도 뽑힌 선수가 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내 눈에 띄는 기량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출전시키지 않겠다. 팬들의 원성이 있어도 상관없다. 킴 단장은 내 편이니까."

선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잭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터치라인으로 내려갔다. 이어서 필드 위에 있는 선수들에게 전술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젊은 선수들은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리즈와의 경기는 결국 2-2 무승부로 끝났다. 후보 선수들의 투지가 만들어 낸 환상적인 결과였다.

젊은 선수들은 경기를 끝까지 집중해서 봤고, 다음 날부터 이전 주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하기 시작했다. 마치 실전처럼.

그다음 경기도 후보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었다. 노팅엄은 연패의 사슬을 깨고, 1승을 얻었다.

하지만, 다음 라운드에서는 패배했다. 리그 2위 아스톤빌라를 상대로 리즈와의 경기에서 보여 줬던 기적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노팅엄은 10월처럼 2연패를 하지 않았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는 기량을 되찾은 젊은 선수들이 주전으로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기는 승리했고, 노팅엄은 리그 4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리그 1위부터 8위까지 승점 5점 차.

노팅엄과 1위와의 승점은 불과 3점 차.

선수들과 감독은 이 험난한 일정을 예전보다 더 열정적인 훈련으로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 33. 위기의 10월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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