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12월의 라이언 (2) >
잭슨과의 대화를 마친 라이언은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라이언은 드레싱 룸에서 다시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필드로 나갔다. 그리고,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대자로 누워있는 루카를 발견했다.
루카가 실눈을 살짝 떠 라이언을 확인하고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왔어?"
"퇴근 안 했어?"
"햇볕이 따스해서. 이 나라에서는 쬐기 힘든 거잖아. 그리고···."
그때, 억울한 표정을 한 로드가 훈련장 건물에서 필드로 나왔다. 로드의 양손에는 음료수가 쥐어져 있었다.
루카가 그런 로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기 상품도 받아야 해서."
"자, 마셔."
로드는 라이언에게 왔냐고 가볍게 인사한 후 루카의 옆에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루카는 일어나는 게 귀찮은지 누운 채로 캔을 따고, 그대로 음료를 마셨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로드가 루카에게 말했다.
"야,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아."
"음음··· 내가 이렇게 몇 년을 마셨는데. 괜찮아."
루카는 음료수를 다 마시고 꺼억 소리를 냈다. 텅 빈 캔을 자신의 옆에 두며 로드에게 말했다.
"치워 줘."
"예, 예. 내 것좀 다 마시고."
로드는 루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라이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것도 사올 걸 그랬네. 개인 훈련하러 온 거야?"
"응. 근데 둘이 뭐 하는 거야?"
라이언은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왜 로드가 루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움직이는지 의문이었다.
루카가 로드 대신 말했다.
"쟤, 내기에서 졌거든."
"···맞아. 아, 근데 진짜 억울해."
"실력으로 진 거잖아."
"그래서 더 억울해. 말도 안 됐다니까?"
라이언은 로드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로드의 한풀이를 들었다.
"골포스트 윗부분 맞추기 대결을 했어. 지면 내일까지 하인으로 지내기로 했고."
"응. 근데, 그런 승부면 네가 불리한 거 아냐?"
"그래서 조건을 걸었지. 열 번 차는 것 중에 쟤는 다섯 번을 더 맞춰야 하는 거로 말이야."
"루카가 다섯 번을 맞춰도 네가 한 번도 못 맞추면 이기는 거네?"
"응. 맞아."
"근데 왜 졌어?"
골대 맞추기 놀이는 할리, 로드, 라이언 셋이 자주 하곤 했다. 의외로 감만 잡는다면 골대 맞추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기에 로드 또한 두 번 차면 한 번은 맞추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물어본 건데 로드가 루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 열 번 차서 열 번 다 맞추더라."
"아···."
"난 열 번 차서 네 번밖에 못 맞췄고. 사기당한 기분이야."
라이언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로드는 더 화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넌 누구랑 점심 먹고 온 거야? 부모님이라도 온 거야?"
루카 또한 흥미가 있다는 듯 실눈을 뜨고 라이언을 바라봤다.
둘에게는 밖에서 먹는다는 얘기만 했었다.
라이언이 말했다.
"감독님이 점심 사 주셔서 같이 먹었어."
감독님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며 라이언은 말했다. 로드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정말? 주장인 나랑도 한 번도 한 먹었는데···."
로드는 섭섭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시 눈을 감고 햇빛을 즐기는 루카가 말했다.
"할리 말대로 감독님이 너 진짜 좋아한다니까."
루카의 말에 로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뭐, 내가 감독이었어도 나나 할리 같은 시커멓고 커다란 놈들 보다가 라이언을 보면 천산 줄 알았을 거야."
로드의 이어지는 말에 루카가 누운 채로 낄낄거렸다.
라이언은 민망해서 한쪽 입꼬리만 올려 미소만 지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어?"
루카의 물음에 라이언은 잠시 멈칫했다.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감독님에게 피해가 안 갈지 생각하느라.
어차피 루카에게도 물어볼 게 있었기에 라이언은 적당히 꼬아서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요즘 부담이 많아 보인다고 격려 차 불렀대."
"오."
"그리고 요즘 감독님이 날 따로 불러서 훈련 시키잖아. 공격 훈련."
"아, 그랬어?"
루카는 오늘처럼 남는 일이 별로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고,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이어 말했다.
"응, 그래서 나한테 공격적인 능력까지 기대하냐고 물었어. 그렇다고 하시더라."
루카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라이언은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천재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루카가 있었던 바르셀로나는 세계에서 '패스'로 가장 유명한 팀이었으니까.
"감독님은 내게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고 하셨어. 수비적인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까지 얘기하고 헤어졌어."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루카는 이 얘기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루카의 물음에 라이언은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나는 선수로서 한 단계 발전하고 싶어. 감독님의 기대도 충족시켜주고 싶어. 그래서 말인데 루카···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어?"
"흐음···."
루카는 라이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연습량 부족 아닐까?"
"연습량?"
라이언 본인이 아닌 로드가 끼어들었다. 라이언이 듣기에도 조금 황당했다. 자신은 병원에서 나왔던 열 살 이후 늘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카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응. 내가 봤을 때, 라이언은 똑똑하게 움직일 줄 알고, 시야가 넓어. 그리고 무엇보다 큰 경기에서 대담해. 마치 바르셀로나의 DNA를 가진 것 같···."
"바르셀로나 DNA? 이 첩자 자식. 우리 라이언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루카의 진지한 말은 로드의 난입으로 끊겼다. 라이언 또한 바르셀로나 DNA라는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기에 로드를 이해했다.
바르셀로나 DNA는 바르셀로나에서 다른 팀의 선수들을 영입할 때 주로 하는 말이었다.
"아씨, 별생각 없이 말한 건데 너무하네. 나도 거기서 쫓겨났는데 라이언을 왜 거기로 보내냐?"
루카는 투덜댄 후, 끊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무튼, 너는 그만큼 똑똑하게 움직일 줄 안다고. 근데 패스는 수많은 연습으로 만들어지는 건데··· 너는 그동안 공격적으로 어떻게 패스해야 할지 연습하는 것보다는 수비 연습하는데도 많이 투자했잖아?"
루카의 말에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바르셀로나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패스 방법을 연구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훈련장 관리인이 제발 나가 달라고 할 때까지, 그리고 유소년 팀에 올라가서도 제발 훈련 끝나고 공 좀 차지 말라고 할 때까지 패스 놀이를 했어. 딱 게임에 빠지기 전까지."
"내가 내기에서 진 이유가 있었구만···."
로드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루카와 라이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라이언은 루카의 말을 듣고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 훈련 시간을 늘리면···."
"아니, 그럴 수 있는 건 어릴 때나 프리시즌뿐이야. 우리는 지금 시즌을 치르고 있잖아. 훈련 늘렸다가 괜히 다친다?"
루카의 현실적인 말에 라이언은 시무룩해졌다. 방법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루카는 인상까지 쓰며 고민하다가 탄성을 내며 말했다.
"맞다. 연습량도 중요하지만, 너한테 맞는 스타일을 찾으면 훈련이 좀 빨라질 거야."
"그래?"
"응. 6관왕의 전설을 쓴 바르셀로나의 3인방, 이니에스타-사비-부스케츠도 패스 스타일이 다 달랐잖아. 어릴 때는 자연스럽게 자기 스타일을 찾지만, 지금은 아니지. 영상 찾아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
"오? 그거라면 할 수 있겠다."
라이언은 기뻐했고, 루카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루카는 다시 로드가 만든 베개에 누웠다.
"이제 됐지? 나 다시 일광욕이나 한다."
"그래. 고마워."
"도움이 된 것 같아서 좋네. 아침마다 너무 미안했거든."
루카의 말에 라이언이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루카가 말했다. 로드에게.
"야, 로드. 선크림 좀 갖다 줘."
"선크림? 발랐을 거 아냐."
"샤워하면서 다 닦은 걸 까먹었어."
"귀찮게···."
"갔다 와."
"젠장, 그래."
로드는 부들부들하면서도 벤치로 가서 선크림을 가져왔다. 둘의 모습을 보며 기분이 한결 나아진 라이언은 소리 내서 웃었다.
로드가 돌아와 루카에게 선크림을 내밀었다.
"발라 달라는 얘기는 안 하겠지?"
"설마 내가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할까. 아무튼, 고맙다."
"그래. 평생 거기에서 자라."
"덕담 고맙다."
말싸움에서 패배한 로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라이언은 그런 로드를 보며 계속 웃었다.
"그만 웃어 라이언··· 아무튼, 영상 보러 같이 갈래? 이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추가 훈련은 이따 하고,"
"응?"
라이언은 웃음을 멈췄고, 곧 로드의 뒤를 따라 훈련장의 한 방으로 향했다.
**
라이언은 로드를 따라 전선과 기계들이 잔뜩 놓인 실험실 같은 공간에 도착했다.
이곳은 노팅엄 훈련장의 자랑 VR 룸.
메인 스폰서의 지원으로 최신식 VR 기계들이 잔뜩 들어차 있는 곳이었다.
가끔 전력분석팀에서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을 영상화해서 미리 체험해보게 해줄 때만 사용했던 방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로드가 말했다.
"야, 너희들 또 게임 하냐?"
라이언도 아는 아이들이었다. 슈퍼 유망주 레오와 쓰리 제이라고 불리는 존, 조, 잭. 노팅엄 유소년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었다.
VR 기계를 쓰고 있던 아이 중 하나가 말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잭 같았다.
"얘들아. 잔소리 마왕 캡틴이 온 것 같은데?"
"젠장."
"망했네."
서로 같은 게임을 하고 있었는지, 아이들은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로드는 그 말들을 들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망할 꼬맹이들아. 다 들리거든?"
잠시 후, 아이들은 VR 기계에서 빠져 나와 로드와 라이언 앞에 서 있었다. 로드는 팔짱을 낀 채로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로드를 보고 있었다.
레오가 아이들을 대표해 말했다.
"캡티인. 조금만 더 하면 안 돼요? 딱 보스전만 끝낼게요."
"양보해. 네 개는 안 되고, 나머지 두 개는 써도 돼."
"네 개 다 써야 해요."
아이들이 방금까지 쓰던 기계는 지난달에 나온 최신 기종이었다. 실감 나는 4D 효과까지 추가돼 훨씬 더 높은 몰입도를 주는 기종이었다.
로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개만 쓰면 되잖아. 나머지는 저걸로 하면 되고."
"안 돼요. 다른 기계에서는 렉 걸린단 말이에요."
"그럼 둘이 깨."
"4명이 한 팀인 게임이라고요. 혼자서 레드 드래곤은 못 잡는다고요. 그것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두 개로 하든지 그만하든지 해. 안 그러면 알피나 토비한테 말한다?"
"너무해!"
라이언은 로드와 레오의 대화를 들으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로드, 네가 말한 영상은 이 기계들로도 볼 수 있지?"
라이언이 가리킨 건 구형 기종이었다. 구형이라고 해도 작년에 나온 아주 좋은 기종이었다. 라이언이 애들한테 양보하자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단 걸 깨달은 로드가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에이씨, 될 수 있으면 좋은 거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괜찮아. 애들 가면 쓰면 되지."
"에휴, 그래."
그 순간, 네 명의 아이가 일제히 소리질렀다.
"역시 우리 팀의 유일한 천사님이야!"
레오와 쓰리 제이는 라이언 둘러싸고 절을 하는 시늉을 하고, 로드에게는 한쪽 입꼬리만 올린 비웃음을 네 명이 동시에 보여주고 VR 기계로 도망쳤다.
로드는 헛웃음을 내뱉고, 한숨을 쉰 후 투덜거렸다.
"골치 아파 죽겠어. 쟤네가 성인팀에 온다고 생각해봐. 엄청 끔찍하다 진짜. 쟤네 넷 다 내년이면 월반해서 U16 팀에서 뛴다고 하고, 가끔 우리 훈련에도 참여할 거라고 하던데."
"내년? 우리보다 빠르네."
"응. 우리보다 일찍 데뷔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로드와 라이언은 잠시 말을 잊고 VR 게임에 열중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라이언이 중얼거렸다.
"몇 년 뒤면 데뷔할지도 모르는 애들을 보고 있으니 나이 먹은 게 실감 난다."
"스무 살밖에 안 됐으면서 무슨."
라이언과 로드는 서로를 보고 킥킥대고, 아이들처럼 VR 기계를 착용하고 앉았다.
라이언은 로드의 지시에 따라 영상 파일을 찾고 있었다.
"자, 여기로 들어가서 고르면 돼."
"뭐 이렇게 많아···?"
라이언의 눈앞에는 수많은 선수 목록이 나왔다. 보이지는 않지만, 로드의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캡틴이 우리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구단에 요청해서 다른 클럽에서 사 왔어. 캡틴한테 꼭! 고맙다고 해."
예전부터 현재까지, 유명한 선수들은 대부분 있었다.
잘 정리돼 있었기에 라이언은 중앙 미드필더 항목을 찾았다.
"어떻게 하는지 알겠어."
"그래. 그럼 나도 옆에서 다른 거 보고 있을 게. 오늘은 저녁이나 같이 먹자."
"응. 혹시 먼저 끝나면 부를게."
"오케이."
라이언은 바로 보고 싶은 선수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이니에스타, 사비, 모드리치, 사비 알론소, 크로스, 피를로, 스콜스 등 패스 마스터라고 불린 선수들은 정말 많았다.
오늘 이 영상을 다 보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10분 단위로 맛보기만 보자고 결심했다.
라이언은 전설의 선수들의 영상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 35. 12월의 라이언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