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08화 (108/245)

< 35. 12월의 라이언 (3) >

"야, 벌써 여섯 시야. 저녁 먹으러 가자."

로드가 라이언의 기계에 대고 말했다. 라이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VR 기계를 느릿하게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드가 라이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말도 안 돼··· 이런 걸 어떻게 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라이언의 얼굴은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로드는 라이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웃으며 말했다.

"너무 잘하지?"

"응. 같은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플레이들을 하더라."

라이언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비랑 이니에스타 시점으로 보다가 토할 뻔했어. 멀미가 날 정도로 시시때때로 계속 주변을 살펴. 그리고, 정말 잠깐 본 선수에게 과감하게 패스를 해. 그 패스는 당연히 성공하고···. 주변 선수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다 예상한다는 거잖아. 말도 안 돼···."

"하하··· 나도 네스타 영상 보면서 어떻게 저런 스타일리쉬하고 과감한 수비를 할 수 있는지 엄청 막막했어."

"그렇지? 거기에 사비 알론소같이 키 큰 선수들은 나랑 시점이 달라서 그런지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누구 걸 주로 봤어? 너 엄청나게 오래 있었잖아."

"폴 스콜스."

폴 스콜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 시절 중앙 미드필더로서 특별한 개인상은 없었지만, 동료와 다른 선수들에게 늘 극찬을 받는 패서였다.

"근데··· 시점은 얼추 비슷해서 좋았는데··· 테크닉이 너무 좋아서 도움이 안 돼··· 아니, 어떻게 발만 툭 갖다 댔는데 공이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선수 앞에 딱 떨어지지? 그것도 달리고 있는 선수한테, 받기 딱 좋은 속도와 높이로!"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영상을 보면서 어떤 선수를 주로 참고할지 정하려고 했는데, 전설적인 패스 마스터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최고 수준에 올라 있어 정할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다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다.

로드는 좌절해있는 라이언에게 말했다.

"좀 더 찾아보면 어때? 나도 말디니, 네스타, 칸나바로 같은 선수들을 따라 하는 건 포기했거든. 내 스타일이랑 비슷한 선수를 찾으니까 어느 정도 따라 할 생각은 들더라."

"넌 누굴 참고하고 있는데?"

"헤라르드 피케! 나랑 키도 비슷하고, 플레이 스타일도 비슷해서 배울 게 정말 많아."

바르셀로나의 주장 단이었던 중앙수비수 피케는 트레블을 두 번이나 달성한 전설적인 멤버 중 하나였다.

라이언은 오늘 모든 중앙 미드필더의 플레이를 본 건 아니었다. 자료도 많고, 중간에 혼란이 와서 집중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이언은

"일단 저녁이나 먹자. 오늘은 스테이크 어때?"

"좋지."

일단 저녁 식사를 하며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

다음 날, 노팅엄시에는 모처럼 눈이 내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수십 년 동안 이 정도로 눈이 온 적이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자연재해 때문에 노팅엄의 선수들은 훈련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리인이 일찍 출근해서 치워본다고 했지만, 워낙 두껍게 쌓였기 때문에 훈련장에 아직도 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감독, 코칭스태프, 직원, 선수들이 함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이든 훈련장 관리인이 한 선수에게 말했다.

"아유, 고마워."

"다 훈련하려고 그러는 건데요."

테디가 부끄러운지 툴툴거렸다. 테디의 옆에서 눈을 밀어내던 로드가 구단 관리인에게 말했다.

"얘가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야."

"하하, 알지. 우리 큰 헌터가 마음씨가 얼마나 착한데."

테디는 부끄러웠는지 제설용 삽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로드와 관리인은 함께 웃었다.

그리고 로드는 자신의 근처에 다가온 한 꼬마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모처럼 놀러 왔는데 훈련하는 것도 못 보여주네."

선수들의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 않는 아이는 로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그··· 할아버지? 그건 안 해?"

"나중에 심심하면 할래요."

"하하, 그래."

아이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얼굴은 마치 노인처럼 주름져 있었다.

조로증과 싸우고 있는 노아가 무려 2년 만에 돌아온 거였다. 구단에서는 오랜만에 돌아온 노아에게 훈련 참관과 다음 경기의 관계자 석 입장권을 주었다. 대신, 노아의 옆에서는 마리아가 영상을 찍고 있었다.

노아는 자기를 찍든 말든 2년 전과는 달라진 선수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노아가 말했다.

"근데 세자르는 정말로 애인이랑 사이가 좋나 봐요."

"응?"

노아의 말을 들은 로드가 세자르를 바라봤다. 세자르는 눈을 치우다 말고 애인과 눈을 배경으로 영상통화에 한창이었다.

로드가 한숨을 쉬고 세자르를 향해 걸었다. 노아는 로드 뒤를 졸졸 따라갔다.

"우리 리아··· 아악!"

로드가 세자르의 귀를 잡았다. 세자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화면 너머에 있던 세자르의 연인 오리아나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저번에도 영상으로 인사드렸죠? 로드 테일러입니다."

-아··· 네.

로드가 화면에 나타나자 영상 너머의 오리아나가 애써 차분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이 자식이 청소 시간에 전화를 하고 있는 거라서요. 죄송합니다만, 전화 끊겠습니다."

-정말요? 세자르! 그러면 안 되죠!

"눈이 쌓인 게 너무 예뻐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자기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세자르와 오리아나는 다시 꽁냥 거리기 시작했고, 로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노아를 데리고 물러났다.

노아가 말했다.

"노팅엄 TV에 나오는 것보다 더 심하네요."

"애들은 저런 거 보면 안 돼."

스마트폰에 쪽쪽 거리기 시작한 세자르를 보며 로드가 말했다.

노아는 킥킥 웃고, 다른 선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아는 헌터 형제, 킹 같은 새로 온 선수들에 관해 로드에게 짧게 소개받고, 인사도 했다.

모든 선수와 직원, 코칭스태프와 인사한 노아는 아직도 못 찾은 한 선수에 관해 로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라이언은 어디 갔어요?"

"걔는 저기 구석에 있네."

라이언은 노아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잭슨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드가 말했다.

"요즘 라이언이 고민이 많거든."

"고민이요?"

"응, 더 발전하고 싶어 하는 데 방향을 못 잡고 있어. 이따 라이언이랑 점심 먹기로 했지?"

"네."

노아와 라이언은 2년 전 크리스마스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할 만큼 친한 관계였다. 라이언은 아직도 골을 넣을 때마다 노아를 위한 세레머니를 해줬으니까. 할리는 둘을 보며 삼촌과 조카를 보는 것 같다고도 했다.

로드가 말했다.

"격려 좀 해주라. 가끔은 선수가 아닌 사람에게 듣는 조언이 도움이 될 때가 많거든."

노아가 사명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마리, 미안한데 카메라 좀 꺼도 될까요?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점심 식사 장소에 라이언과 함께 도착한 노아가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고,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찍을 만큼 찍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둘의 대화를 들으며 라이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지한 얘기?"

오래 연락하면서 라이언과 노아는 자연스럽게 말을 편하게 하게 되었다.

"캡틴한테 부탁받았거든요. 라이언을 격려해 주라고."

"로드가?"

"네!"

라이언은 황당해 했고, 둘의 대화를 들은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나도 들어도 돼?"

"괜찮을 것 같아요."

라이언과 노아가 동시에 말했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고 노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저한테 고민을 털어놔 보세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라이언이 노아에게 물었다.

"로드는 뭐라고 했는데?"

"'발전하고 싶은데 방향을 못 잡고 있어.'라고 했어요."

라이언은 말해서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다가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

라이언의 고민을 끝까지 들은 노아가 자그마한 양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역시, 라이언은 멋진 사람이에요. 스무 살에 챔피언십 리그에서 뛰는 건 정말 엄청난 건데, 여기서 더 발전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저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내가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근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

"한 교수님이 연구에 참여시켜 줘서 매일 열심히··· 아니 아니, 지금은 라이언 얘기를 하는 중이었잖아요."

노아가 뾰루퉁해 졌고, 라이언과 마리아는 잠시 웃었다.

노아는 진지하게 하라는 말을 하고는 잠깐의 고민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이언은 지금 자기랑 어울리는 스타일의 레전드 선수를 찾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저는 축구 선수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굳이 그 레전드 선수들과 똑같을 필요가 있을까요? 라이언이랑 잘 어울리는 걸 한두 개만 떼서 쓰면 되잖아요."

"응?"

"조금 부정확해도 괜찮잖아요. 연구할 때도 그렇거든요. 전체적으로 완벽한 걸 찾는 것보다 되는 것부터 하나하나 하다 보면 전체적인 그림이 만들어질 때도 있고···."

노아의 말을 들으며 라이언은 점점 뭔가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노아에게 물었다.

"노아, 나는 어떤 스타일이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냥 가볍게 말해도 돼."

"음··· 가끔 중거리 슛을 하는 걸 보면 발목 힘이 엄청 좋은 것 같아요. 솔직히 할리 슛보다 라이언 슛이 훨씬 더 시원하거든요. 그러니까 강한 슛이나 강한 패스?"

"강하게···."

라이언은 중얼거리면서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마리아와 노아 또한 입을 다문 채로 라이언을 바라봤다.

한참 후, 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의 두 눈은 무척 맑았다. 그 모습을 보며 노아가 말했다.

"내 덕에 실마리라도 찾은 거예요?"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덕이야. 빨리 먹고 훈련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저는 이 주 있다가 돌아가거든요. 그때까지 성과를 볼 수 있을까요."

"응. 조금은."

그때, 마리아가 끼어들었다.

"어떤 선수의 기술을 배워보게?"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강한 패스로 유명한 선수들을 찾아보면 괜찮지 않을까요? 제라드도 강한 패스를 하지 않았나요?"

마리아가 말했다.

"지난 시즌에 은퇴한 케빈 데브라이너는 어떨까?"

케빈 데브라이너는 수년간 프리미어리그에서 최상위권을 달린 맨시티의 중심 선수였고, 리그 역사에 손꼽을 수준의 플레이메이커였다. 라이언이 아직 보지 못한 영상에 포함된 선수이기도 했다.

그의 장점은 다른 선수들보다 배는 빨라 보이는 긴 패스와 강한 발목을 이용한 바닥에 깔리는 패스.

분명 노아가 말한 자신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스타일일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영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진 라이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 다 고마워요."

**

나는 로드에게서 라이언의 고민을 전해 들었다. 어떻게 격려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한테까지 찾아온 거였다.

나는 로드에게 농담을 던졌다.

"라이언은 정말 기특하네. 너도 좀 본받아봐."

"뭘 본받아요. 저도 열심히 하거든요?"

로드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라이언에 관해 생각했다.

라이언은 지금쯤 노아, 마리아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노아를 위해 만든 일정인데··· 괜히 고민 많은 애한테 구단의 일을 맡긴 건 아닌가 싶었다.

저녁에 직접 불러서 얘기라도 해 봐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비슷하거나 본받을 만한 스타일의 선수를 찾아주고 싶은데···."

로드의 말에 나는 바로 생각나는 선수를 말했다. 라이언이 중요한 순간에 강한 발목으로 만들어내는 슈팅들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케빈 데브라이너는 어떨 거 같냐?"

내 말에 로드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괜찮은데요? 지난 시즌에 은퇴해서 생각도 못 했어요."

"영상자료는 있어?"

"네. 제 기억으로는 있었어요."

"다행이네."

잭슨이 나와 함께 조깅을 하며 라이언에 관해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지금 루카에게 너무 부담이 쏠려 있다고, 라이언이 꼭 성장해줬으면 한다고. 그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겨울에 플레이메이킹도 가능한 중앙 미드필더를 데려와 줄 수 있냐고.

하지만, 라이언은 스스로 해법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무척 기특했다.

기특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이었다. 또한, 단장으로서 해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나는 로드에게 물었다.

"영상으로 충분할까?"

"뭐··· VR이라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긴 한데 실제보다는 못하죠."

"그렇지? 그럼 데려올까?"

"예?"

"데브라이너라면 가능할 것 같거든."

"가능이라뇨?"

"코치로 데려올 수 있다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드가 눈을 크게 떴다.

< 35. 12월의 라이언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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