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메리 크리스마스 (1) >
"라이언, 이쪽 좀 봐 주세요!"
기자들의 요청에 라이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라이언은 파티가 열리고 있는 호텔 연회장에 들어섰다.
연회장 문 앞에는 <노팅엄 FC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적혀있었다.
연회장 문은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 앞은 보안요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흑인 보안요원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언 브라우니!"
"어··· 예?"
"팬입니다! 사인 좀 해 주세요."
"아."
험악한 얼굴에서 나온 귀여운 부탁에 라이언은 씩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안 해 주면 문도 안 열어주나요?"
"당연하죠."
"그럼 해드려야죠."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백인 보안요원이 끼어들었다.
"저도 좀···."
"예."
라이언은 둘 모두에게 사인을 해 주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연회장 입구에서 춤을 추고 있던 할리와 딱 눈을 마주쳤다. 할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라이언은 다급히 말했다.
"할리, 잠깐···."
"다들 집중해! 챔피언십리그 12월의 선수가 왔다고!"
할리의 외침에 직원들을 비롯한 선수들의 시선이 막 입장한 라이언에게 모였다.
라이언은 할리를 째려볼 틈도 없이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세례를 받아야 했다.
노팅엄의 사람들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라이언에게 한 마디씩 던졌다. 라이언을 일일이 그들에게 대꾸했다.
"12월도 받았으니까 1월도 받을 거야?"
"아니, 아직 12월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만 좀 놀려요···."
라이언이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최근 선수단 사이에서는 아직 12월의 선수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라이언이 받을 거라면서 놀리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왜냐면
"어제도 MOM을 받았잖아. 3연속 MOM인데 당연히 받는 거지."
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라이언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직 두 경기나 남았잖아요···."
"에이, 네가 경기장에서 바지 내리고 똥 싸지만 않으면 무조건 받을걸? 아니, 그런 짓을 해도 받으려나?"
라이언의 겸손한 말에 할리가 반박했고, 사람들은 할리의 말에 그럴 거라고 말하며 와하하 웃었다. 파티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웃고 있었다.
라이언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할리가 그런 라이언에게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라이언. 인사하고 여기로 돌아와. 내가 있던 곳이 솔로들을 위한 테이블이거든."
"두고 봐 진짜···."
"그래그래. 이따 봐."
할리는 장난스럽게 윙크하고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라이언은 이제야 고개를 제대로 들고 할리가 앉아있던 테이블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로드, 할리, 킹, 테오··· 정말 연인이 없는 선수들만 모여 있었다. 남자들만 모여 있으니 뭔가··· 파티보다는 경기장의 드레싱 룸에서 흔히 보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들 정장을 입고 있긴 했지만, 별다를 거 없었다.
그 근처 테이블도 솔로인 선수들, 직원들, 코칭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뭔가 우중충했다. 왠지 모르게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테이블에는 부부 혹은 연인들이 주로 모여 있었다. 솔로 테이블이 아닌 커플 테이블로 간다면 더 외로워질 거라는 걸 알았기에 라이언은 한숨을 쉬며 할리를 슬쩍 봤다.
할리가 어서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라이언은 천천히 걸어 인사를 하러 다녔다.
"알렉산더, 그분이···."
"하하, 그렇지."
이어서 알렉산더 옆에 뻣뻣하게 앉아있는 테디와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스칼렛. 테디."
"안녕하세요. 와, 친구 잘 둔 덕에 브라우니도 여기서 보네요. 영광이에요."
"친구요?"
라이언은 스칼렛의 인사를 되물으며 테디를 슬쩍 봤다. 라이언은 둘이 사귀고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테디는 얼굴을 붉히며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툭하면 스칼렛 얘기를 하고, 일주일에 세 번은 만나러 간다고 동생 테오가 그렇게 놀렸는데, 아직 연인 단계까지는 못 나간 모양이었다.
라이언은 솔로 테이블을 잠깐 보고, 다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한심하다기보다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은 즐겁게 놀다 가시라고 얘기하고, 자리를 옮겼다. 직원들과 차례로 인사했고, 중앙 테이블에 도착했다.
중앙 테이블에는 이 구단의 실세들이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단주 제임스와 그의 여자친구로 보이는 여인과 감독 잭슨 부부 사이에 단장 김도운이 앉아있었다.
김도운의 맞은편에는 밝은 표정의 마리아와 왠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행정팀장 조이도 앉아있었다.
김도운이 먼저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런던에서 여기로 오는 차가 좀 밀려서요. 기차를 탈 걸 그랬나 봐요."
라이언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노아를 배웅하고 온 참이었다. 사정을 아는 테이블의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볼일이 끝나 떠나야 했지만, 라이언은 잠시 머뭇거렸다. 김도운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단장님. 이따 얘기 좀 할 수 있나요?"
"설마, 이적한다는 얘긴 아니지?"
김도운이 농담 식으로 말했고, 라이언 또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가 어딜 가요."
"아주 좋은 대답이야. 그럼 이따 보자."
"네!"
라이언은 아직도 김도운에게 데브라이너를 코치로 데려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왜냐면 김도운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김도운은 12월 내내 노팅엄시에 거의 없었다. 겨울 임대선수 영입을 위해서라고 스카우트 하나가 알려줬었다.
라이언이 테이블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잭슨이 말했다.
"아, 선수들한테 아무리 음료수라지만 너무 마시지 말라고 전해. 지금 마시는 꼴을 보니까 잘못하면 배탈 날 것 같아. 그리고, 로드에게 파티는 열두 시에 딱 끝난다고도 전하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모레부터 프리미어리그 박싱데이보다 더 지독한 챔피언십리그의 박싱데이가 시작된다. 그래서 오늘 파티의 음료에는 알코올이 일절 없었다.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따 동영상 찍으러 갈게. 재밌게 놀고 있어."
"재밌게 놀다 가요."
마리아와 조이의 인사까지 받고, 라이언은 솔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라이언, 잘 왔어."
"왜 이런 데 모여 있는 거야."
"저쪽에 있으면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로드의 말에 라이언은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잭슨에게 들은 전달사항을 말했다.
로드는 바로 일어나서 선수들에게 공지를 전달하기 위해 움직였다.
라이언은 이어서 테이블 한구석에 모여 수상하게 속닥거리고 있는 할리와 테오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얘기해?"
할리와 테오는 얼마나 얘기에 집중하고 있던 건지 라이언이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랐다. 할리가 라이언의 얼굴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라이언, 우리가 아주 특별한 작전을 해보려고 하는데."
"특별한 작전?"
"저기 중앙 테이블을 봐봐."
"감독님 있는데?"
"응."
라이언은 할리의 말을 따라 중앙 테이블을 바라봤다. 방금 인사하고 온 곳이었기에 특별히 볼 건 없었다.
"뭘 보라는 거야?"
"조이랑 마리아."
라이언은 나란히 앉은 조이와 마리아를 바라봤다. 조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식탁보를 보고 있었고, 마리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김도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라이언이 물었다.
"뭐가?"
"미묘한 분위기가 안 느껴져?"
라이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할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마리아가 단장님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게 느껴지잖아."
"네 말을 들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단장님이 구단에 오고 우리 구단이 엄청 잘 나가고 있잖아. 그런데 정작 단장님은 일에 치여서 연애도 못 하고, 서른다섯이 되게 생겼다고. 이대로면 결혼도 못 하고 혼자 늙어 죽을지도 몰라."
라이언은 이제 할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이언이 말했다.
"그래서, 저 둘을 이어주자?"
"그렇지!"
할리의 말에 현혹된 건지 작은 헌터 테오 또한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라이언은 게임, 베팅, 낚시 같은 얘기만 이어지고 있는 테이블을 보며 '우리 연애나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도운을 돕는 일이라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김도운에게는 고마운 게 많았으니까.
그래서 라이언은 할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데?"
"요즘 억지 만남 같은 건 의미가 없잖아. 자연스러운 만남을 유도하는 거지. 업무가 아닌 사적인 상황에서 만나면 분명 둘 사이에서 뭔가 일어날 거야."
라이언이 감탄하며 대답하려는 순간, 로드가 돌아왔다.
"방법에는 찬성하는데, 마리아보다는 조이가 낫지 않을까?"
"야, 아까부터 무슨 조이냐. 조이는 단장님한테 관심 없는 것 같은데."
라이언은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물었다.
"너희 아까부터 이 얘기 하고 있었던 거야?"
"응. 단장님한테 여자친구를 만들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건 나도 찬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아보다는 조이가 더 어울린다고. 옛 연인이었기도 했고, 저거 봐. 가끔 저렇게 멍하니 단장님을 볼 때가 있다니까? 내가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저런 모습이 요즘 따라 훨씬 많아졌다고."
넷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로드의 말대로 조이가 김도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라이언은 왠지 모르게 조이가 할 말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할리와 로드는 자신들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다.
둘은 김도운과 조이, 마리아를 의식해서 목소리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심심한 선수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선수들은 할리와 로드의 주장을 듣고, 마리아를 지지하는 할리 세력과 조이를 지지하는 로드 세력으로 나뉘었다.
"너희들 무슨 얘기해?"
점점 판이 커져 커플 무리에 있던 세자르와 테디까지 합류했고,
"개인사에 간섭하는 건 조금 그렇지만··· 확실히, 도운은 이런 식으로라도 쉴 필요가 있지. 나도 찬성한다. 나는 조이 쪽으로 가겠다."
심지어 알렉산더까지 합류했다. 일부 직원들과 코칭스태프들은 덤이었다.
이들은 왜 그렇게 모여 있냐는 잭슨과 김도운의 물음을 박싱데이 성적 내기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잭슨과 김도운, 조이와 마리아는 할 얘기가 많은지 원래 테이블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조이 무리와 마리아 무리의 주장은 계속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조이와 마리아 둘 다 우연히 만나게 해 주자는 결론이 나왔고, 로드와 할리가 대표로 누구와 먼저 만나게 할지 가위바위보를 했다.
라이언은 몹시 황당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커졌나 해서.
그리고, 이들의 의논 끝에 자신이 김도운을 불러낼 역할을 맡게 돼서···.
*
-킴, 죄송한데 갑자기 기자가 붙잡아서요. 조금만 이따 갈게요.
"그래. 천천히 와. 좀 쉬고 싶기도 했으니까."
라이언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는 파티장 위층에 있는 카페에 와 있었다. 나는 적당히 구석 자리에 앉았고, 노팅엄의 야경을 감상했다. 한국에 비하면 대부분 불이 꺼져 어두컴컴했지만, 내게는 한국보다 훨씬 더 익숙한 풍경이었기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조이? 왜 여깄어?"
"로드가 부모님께 전화를 받았는데, 주급이 안 들어왔다고 해서."
"정말?"
"나도 확인해 봐야 해. 분명히 직원이 선수들 주급 입금 완료한 서류를 보고 결재도 했는데 말이야··· 아무튼, 부모님이랑 통화 좀 하고 올라오겠대."
"뭐, 별일 없겠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조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이에게 말했다.
"나랑 같은 신세네. 나도 라이언이 바람맞혔거든."
"그래? 그럼 잠깐 같이 앉을까?"
"좋아."
조이는 내 앞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잠시 후, 조이가 입을 열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할 말?"
"나 일 그만두면 안 돼?"
< 36. 메리 크리스마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