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메리 크리스마스 (3) >
"같이 해 보자···."
조이가 김도운이 했던 말을 중얼거리며 직원 전용 구단 출입구로 들어섰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보통의 영국 사람이라면 박싱데이(12월 26일) 휴일이기 때문에 집에서 쉬겠지만, 이 기간에 축구 선수들은 이틀에 한 번 경기가 열리는 가혹한 일정을 시작해야 하므로 선수들을 지원해야 하는 직원들은 출근해야 했다.
"조이!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조이는 복도에서 만난 직원과 가볍게 인사하며 속으로는 어제부터 계속하고 있는 고민을 했다.
'도운의 말대로 정말 난 이 구단에서 쓸모 있는 걸까? 나도 도운이 말한 것처럼 발전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공부해야 할까?'
어제 부모님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이 고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부모님이 걱정할 정도로 식사도 대충 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는 행복한 날이어야 할 텐데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같이 해 보자···."
조이는 다시 한번 김도운의 말을 중얼거려봤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왠지 모르게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조이는 어느새 사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조이는 일단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오늘 해야 할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
"조이, 어떡하죠. 버스가 고장 났대요. 두 시간 뒤에 선수들을 태우고 원정을 가야 하는데···."
노팅엄은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거리라면 경기 당일에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그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났다는 거였다.
이 소식을 전한 직원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조이는 직원들 달래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점검을 안 한 거예요?"
"어제도 괜찮았고,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책임은 나중에 묻고··· 잠시만요."
조이는 바로 스마트폰을 켜서 전화를 걸었다. 노팅엄시에서 가장 실력 좋은 자동차 정비사 스텐에게.
"스텐, 아침부터 미안해요. 오늘 쉬는 날이죠···?"
-그렇긴 한데··· 무슨 일이야?
"구단 버스가 고장 나서요. 보수는 두 배 지급해드릴 테니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이고, 그래. 누구 부탁인데. 혹시 버스 빌릴 수 있는 곳도 알아봐 줘?
"그건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면 돼?
"그러니까···."
조이는 직원에게 전화기를 넘긴 후, 사무실 전화기로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버스를 고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그쪽 직원에게 이야기까지 마쳐놓은 후, 표정이 밝아져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됐죠?"
"고마워요. 역시 조이에요. 스텐 아저씨는 제 전화를 받지도 않아서···."
"정말요?"
"네. 그래서 조이를 보면 신기해요. 노팅엄시의 모든 전문가와 다 친하잖아요. 막막한 일도 조이를 통하면 다 해결돼요."
"그 정도는···."
조이는 직원의 말을 들으며 어제 김도운이 했던 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조이는 작은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
"혹시, 내가 그만두면 어떨 거 같아요?"
"예에? 절대 안 돼요! 사고 하나라도 나면 다 공황에 빠질걸요? 노팅엄시의 전문가들도 우리 말을 잘 안 들어줄 거고요."
직원의 말에 조금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직원들과 전문가들이 만날 자리도 만들어 줘야겠다고 조이는 생각했다.
조이는 평소처럼 계속 일을 했다. 그리고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김도운의 말 덕에 조이는 그동안과 다른 시점으로 직원들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직원들은 정말로 자신을 의지하고 있었고, 자신의 말은 정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자신은 노팅엄시의 전문가들에게 노팅엄 FC의 대표자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평소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게 아니었던 거다.
조이 자신이 쌓아 올린 건 분명히 큰 의미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김도운은 그런 부분까지 자신을 봐 주고,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조이는 점심 먹을 시간이 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김도운의 사무실로 향했다.
*
"들어오세요."
조이는 김도운이 사무실 안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이? 무슨 일이야?"
"차부터 줄래?"
"아··· 응. 잠시만. 서류 정리 좀 하고."
조이는 티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김도운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김도운의 서류를 넘기는 손짓, 진지한 두 눈에서 자신이 고민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동안 김도운은 잔뜩 성장했다는 걸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김도운이 차를 타 왔다.
김도운은 자신이 여기 온 게 어제 일 때문이라고 짐작한 건지 기대 어린 두 눈을 하고 있었다.
조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잠깐 장난을 칠까도 생각해 봤지만, 진지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솔직한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해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래서, 어땠어?"
"오늘 출근하고, 일하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어. 내가 구단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네 말대로였어."
김도운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이가 말했다.
"고마워. 더 해 볼게."
"하아··· 진짜 다행이다. 네가 없었으면 내 계획이 몇 년은 차질이 생겼을 거야. 우리 구단의 살림을 네가 다 맡고 있으니까···."
조이는 그런 김도운을 보며 살짝 웃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워. 너만큼 대단할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는 해 볼게. 네 말대로 선수들처럼 발전할 수 있게 노력도 할 거고."
"좋아. 필요한 건 지원해줄 테니까 얼마든지 말해."
자신만만해진 김도운을 보며 조이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훌륭한 단장이 될 수 있었어?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가끔은 네가 우리 구단에 오고 만들어낸 것들이 너무 대단해서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은 사람 같거든."
그 순간, 김도운이 살짝 움찔했다. 조이는 민망해서 그러는 거겠지 라고 알아서 해석했다. 김도운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동물이잖아. 열심히 한 거지 뭐."
"그렇구나."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도운이 입을 열었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조이는 김도운이 말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김도운은 정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여나 밖의 사람들이 들을까 조심하는 것처럼.
"사실, 비밀이 하나 있어."
"비밀?"
김도운은 뻐끔뻐끔하다가 한숨을 쉬고 이렇게 말했다.
"어··· 미안. 괜히 말을 꺼냈네."
"뭔데?"
두루뭉술한 김도운의 말에 조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김도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밀이야."
"너무하네···."
조이는 김도운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때, 절대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이는 뭔가 말해줄 듯하다가 입을 다문 김도운에게 살짝 화가 나 김도운이 당황할만한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그럼 다른 얘기로 가자. 궁금한 게 있는데, 어제 마리아랑 잘 됐어?"
푸흡. 하는 소리와 함께 김도운의 와이셔츠에 차가 튀었다. 조이는 어제 김도운을 일찍 만나며 마리아에게 약속을 다시 잡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저녁 약속을 잡았다며 고맙다고 조이에게 연락했었다.
의도대로 김도운이 당황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찝찝했다.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이미 말을 시작했기에 조이는 어쩔 수 없이 물었다.
"사귀어?"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러자는 얘길 들었구나?"
"어떻게 아는 거야?"
"마리아가 나한테 고민 상담했거든. 나랑 네 지금 관계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아아···."
김도운이 어떻게 된 건지 다 알겠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저녁도 먹고, 술도 먹었어. 그리고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얘기도 들었어. 요즘 이십 대는 정말 대담하다니까."
조이는 그래서 어떻게 됐어?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는 조이 본인도 몰랐다.
조이가 말이 없자 김도운이 알아서 이어 말했다.
"나도 솔직히 말하면 호감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은 사람이 마음에 들어올 여유가 없단 말이지."
그 순간, 조이의 말문이 트였다.
"그래서, 거절했어?"
"응."
"구단 경영 때문에?"
"응. 준비해뒀던 게 다 떨어져 가고 있어서··· 정말 열심히 해야 하거든."
"뭐라고 거절했어?"
"궁금한 게 많네. 그냥··· 내 최종 목표까지 이루거나 정말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쯤이면 연애를 다시 할 생각이 들 것 같다고 말했어."
"최종 목표가 뭔데?"
김도운은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솔직하게 답해줬다. 그리고, 최종 목표에 관한 대답은 너무 솔직하면서도 황당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마. 잉글랜드 리그 최초의 쿼트러블. 그리고, 보너스로 클럽 월드컵까지 따는 게 목표야. 나는 펩 바르셀로나가 스페인에서 이뤘던 전관왕을 우리 노팅엄에서 꼭 쓰고 싶어."
말문이 트였던 조이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그만큼, 김도운이 말한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미쳤구나? 평생 혼자 살게?"
김도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말 안 될 것 같다,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
김도운의 대답을 들은 후 조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평생 혼자 살겠네."
"나도 사람이거든. 나도 자주 실패해. 아주 큰 실패를 해 본 적도 있고."
그렇게 말하는 김도운의 눈동자가 순간 무척 어두워졌었기에 조이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김도운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마리아는 어리니까 나보다 괜찮은 사람을 찾을 거야."
"우리 나이대에 너만 한 사람이 어딨냐?"
"오오. 칭찬해 주는 거야?"
"설마."
조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물론, 기분이 좋은 건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조이는 고개를 들었다.
김도운의 사무실에는 산타 모자를 쓴 구단의 마스코트 로빈 새와 루돌프 코를 달고 있는 구단의 마스코트 티케 피규어와 크리스마스 장식이 몇 개 있었다.
아마 제임스가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조이는 그걸 보며 문득, 어제 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야."
"너 때문에 배드 크리스마스였어."
김도운의 센스있는 대답에 조이는 크게 웃고 난 후 말했다.
"하하··· 미안."
김도운 또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면 앞으로 열심히 해. 그런데, 하고 싶은 공부는 있어? 없으면 추천해 줄게. 관리직 사람들이 듣는 커리큘럼 중에 괜찮은 게 몇 개 있거든? 먼저 트렌트 대학교에···."
조이는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공부는 이미 정해뒀었다. 어린 시절, 김도운과 제임스가 노팅엄의 선수가 된다면, 조이는 이걸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를 겪으며 다시 기억해낼 수 있었다.
김도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하려고?"
"일단 회계 자격증부터 딸 거야."
"회계?"
"응. 난 노팅엄의 CFO(최고재무관리자)가 되고 싶거든."
김도운은 노팅엄의 사장 겸 단장이었다. 김도운은 구단의 목표와 미래를 이야기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김도운이 목표와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조이는 그걸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 특히 재정적인 요소들에 관해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김도운은 조이의 포부에 놀란 건지 잠시 멍한 얼굴로 조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멍한 얼굴은 점점 풀어져 부드러운 미소가 되었다.
"괜찮네. 세계 최고 구단의 CFO라니."
조이 또한 김도운을 보며 따라 웃었다.
그리고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 36. 메리 크리스마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