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슈퍼 서브 (1) >
마리아는 노팅엄 TV에 올릴 직원 특집 영상을 위해 노팅엄의 두 스포츠 치료사, 파스칼과 폴린을 만나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 그들이 보는 선수들의 모습 같은 간단한 내용을 묻는 것이었기에 인터뷰는 금방 끝났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둘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분 언제부터 만나는 거예요?"
"예?"
"네?"
파스칼과 폴린이 동시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곰 같은 덩치의 파스칼은 얼굴도 붉어졌다. 폴린이 파스칼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젓는 순간, 마리아가 또 말했다.
"폴린도 티 나요. 평소보다 훨씬 어색하게 웃잖아요."
"하하··· 그래요?"
완전히 들켰다는 걸 깨달은 파스칼과 폴린이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리아가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부럽네요··· 저는 연애 시작하면 당당하게 말하고 다닐 텐데."
"여긴 직장이기도 하니까··· 서로 조심하기로 했거든요. 정식으로 만난 지는 6개월 정도 됐어요."
마리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몰라요··· 저 들어오기 직전까지 두 분··· 손도 잡고··· 음··· 붙어 있었잖아요? 창문으로 다 보였어요. 저기 커튼 틈이 벌어져 있잖아요."
"아."
둘은 마리아가 노크하는 순간 떨어졌지만, 창문의 커튼 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폴린과 파스칼이 이제부터 조심하자는 얘기를 했다.
마리아는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걸요? 이미 구단에 소문 다 났거든요. 저번에 스포츠 치료실에서는 동거 얘기까지 했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파스칼의 물음에 마리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둘이 너무 티를 내고 다니니까 그렇죠. 다들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모른 체하자고 직원들끼리 얘기했었는데··· 방금 인터뷰 전에 붙어계신 거 보니까 조만간 사고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실례였을까요?"
"아니에요···. 고마워요···."
폴린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파스칼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마리아는 둘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부러웠다.
마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핑크빛이네요. 나만 우중충한 회색빛이고."
마리아의 자조적인 말에 폴린과 파스칼이 고개를 들었다. 폴린과 파스칼은 서로의 눈치를 봤고, 폴린이 파스칼을 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래서 파스칼이 입을 열었다.
"마리아가 왜 회색빛이에요. 남자 직원들이랑 선수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파스칼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바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옆의 폴린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파스칼을 흘겨보고 있었다. 폴린은 마리아의 인기 중에 파스칼이 있는 게 아닌가 찝찝해하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고 화제를 돌렸다.
"도니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댔다가··· 차였거든요. 뭐, 차였다기보다는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아니, 이게 차인 걸까요? 간접적으로?"
마리아의 말에 폴린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폴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마리아가 말했다.
"너무 걱정 마요. 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순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마리아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 밖에 있을 사람에게 말했다.
"네!"
"김도운인데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예?"
방금까지 김도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당사자가 갑자기 들어온다는 말에 마리아는 당황해 어버버했다. 마리아는 대신해 파스칼이 말했다.
"예, 들어오십시오."
파스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도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도운은 방 안에 있는 마리아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폴린, 파스칼, 마리아··· 노팅엄 TV를 찍고 있었나 보네요?"
"맞아요!"
마리아가 조금 과장된 것 같은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폴린과 파스칼이 마리아와 김도운의 눈치를 봤다. 그러건 말건 마리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따 도니도 찍어야 해요. 직원 특집이거든요."
"아, 그래요···?"
"몇 시가 좋아요?"
김도운도 조금 어색해 했지만, 마리아의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노력에 화답하듯 점점 편안한 말투로 얘기했다.
"오늘은 다 괜찮아요. 자정까지 있을 거거든요."
"좋아요. 그럼 이따 메시지 보낼게요."
"네. 기다리죠."
김도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김도운을 보며 파스칼이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마리아를 만나기 위해서인 건 아닌 것 같았으니, 폴린 아니면 파스칼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도운은 파스칼의 생각대로 파스칼과 폴린 쪽을 보며 말했다.
"코치들에게 여기 있다고 들어서요."
"네? 누가요?"
"파스칼이요.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
촬영은 진작 끝났기에 파스칼은 자리에 남고, 폴린과 마리아가 사무실을 떠났다.
파스칼이 내게 물었다.
"무슨 일로···."
"아, 저랑 출장을 같이 가주셨으면 해서요. 이번 주 내로요."
"이번 주요? 박싱 데이 기간이라 경기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도 당연히 알고 있어요. 그래서 경기가 없는 날, 일이 끝나고 저녁쯤에 갔으면 하는데···."
파스칼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가기 싫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난 파스칼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폴린이랑 같이 살 준비를 하고 있죠? 그래서 열심히 저금하고 있을 테고··· 이번에 출장비 많이 챙겨줄게요."
내 말에 정곡을 찔렀는지 파스칼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니··· 단장님도 아시는 겁니까···?"
"저도 둘이 꽁냥대는 걸 지나가다 본 적 있거든요. 직원들 사이에서 소문도 돌았었고. 저는 두 분을 응원해요. 둘이 같이 살게 되면 꼭 말해 주세요. 가구나 전자기기 하나 놔 드릴게요."
"저희만 몰랐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둘 다 회귀 전에 최고의 스포츠 치료사가 된 만큼,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반드시 잡고 싶었다.
둘이 결혼해서 여기에 집도 사고, 애까지 낳는다면 그럴 수 있을 확률이 정말 올라갈 것이니까 제발 같이 살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었다.
아무튼, 나는 어벙한 상태가 된 파스칼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어때요? 출장 가고 싶어졌죠?"
"예··· 그런데 얼마나···."
손가락을 펴서 대략적인 금액을 보여줬다.
"무조건 가겠습니다. 내일 갈까요?"
파스칼이 순식간에 태세를 바꿨다.
나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낸 후,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상대방이랑 약속 잡을게요."
그제야 파스칼은 자기가 무언가 빠트렸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파스칼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출장입니까? 어디까지 가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아, 런던으로 갈 거고, 선수 영입을 도와주세요."
"선수 영입이요?"
**
-예, 그럼 그 호텔에서 만나죠.
"알겠습니다. 8시에 뵙겠습니다."
나는 이번에 임대로 영입해 올 선수와 약속을 잡았다. 바로 파스칼에게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전화가 오기 전까지 확인하던 서류를 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들고 있는 서류는 우리 팀의 후보 공격수, 스코틀랜드 출신의 루크가 2부 리그의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루크가 내 기대대로만 해 줬더라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임대 영입은 내 원래 계획인 여름에 진행됐을 거였다.
나는 루크가 찾아왔던 이번 달 초를 떠올리며 서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팀에는 제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루크는 나조차도 웨일즈 3인방, 스코틀랜드 2인방이라고 묶어서 생각하는 후보, 로테이션의 경계에 있는 선수 중 하나였다.
나는 원래 루크를 준주전급 선수로 생각하고 영입했었다. 2부 리그 경험도 많은 전성기 나이의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4부 리그부터 빠른 적응력을 보여준 할리가 2부 리그에 바로 적응했고, 사랑꾼 세자르마저도 적응기라고는 필요 없다는 듯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다.
잭슨은 공격수 두 명을 사용하는 전술을 즐겨 썼기 때문에 루크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루크에게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잭슨은 시즌 초만 해도 루크를 교체로 많이 썼었다. 루크는 후반전에 들어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하지만, 루크의 폼은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졌다. 11월 중순부터는 아예 경기에도 못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루크의 다음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보다 어린 선수들이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팀에서는 절대로 주전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습니다."
루크는 좌절감을 느끼고, 동기부여가 완전히 떨어졌던 거였다.
나는 루크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쉽네요. 11월 전까지만 해도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아침 일찍 와서 훈련하고, 코치들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이 정말 열정적이어서, 기대했었거든요."
루크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루크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아는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루크는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 나는 루크에게 한 가지 더 얘기해 주기로 했다. 그가 열심히 했던 걸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저뿐만 아니라, 잭슨 감독님도 루크가 열심히 한다는 걸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훈련장에 가장 일찍 출근하는 게 잭슨이랑 저거든요. 최근에는··· 조금 실망하셨었지만요."
루크는 경기력이 떨어진 11월 초부터 개인 훈련량을 줄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주전으로 뛸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도 꿋꿋하게 훈련할 수 있는 사람은 월드클래스의 숫자만큼이나 드무니까.
"사실 저는 조금 실망했었는데, 오늘 이유를 듣고 나니까 루크가 이해가 가네요. 루크, 이곳에서는 잘 풀리지 않았지만, 새 클럽에서는 반드시 잘 풀릴 거예요. 루크는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루크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루크를 차분히 기다렸다.
"절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내 말에 루크는 또 한 번 침묵했다.
그리고, 자조하듯 말했다.
"이 클럽은 정말 좋은 곳이었군요."
"네, 여기만 한 곳이 없죠."
루크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는 기회를 못 살린 거고요."
"그럼 남을래요?"
"아뇨. 이미 폼이 많이 떨어져서··· 상위권 경쟁을 하는 팀에서는 못 뜁니다. 제 나이가 28인데, 이 시기에 1년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2부 리그 하위 팀으로 가겠습니다."
루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고,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쉽네요."
이렇게 루크는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아무튼, 루크의 폼 하락으로 인해 할리와 세자르는 출장시간이 팀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잭슨의 전술은 공격수 두 명이 수비 때는 적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상황에 따라 압박해야 했고, 역습 때는 번갈아 가며 질주해야 했다.
한 마디로 둘은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열렸던 박싱 데이 첫날 경기에서 우리는 많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2-0으로 져버렸다.
잭슨은 내가 1월에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선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오늘 저녁 파스칼을 데려올 때부터 꼭 데려오겠다고 계획해뒀던, 회귀 전에 스페인 1부 리그를 주름잡았던 완벽한 골잡이를.
< 37. 슈퍼 서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