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슈퍼 서브 (2) >
"만나서 반갑습니다. 노팅엄의 단장, 김도운입니다."
"미할리스 파파도풀로스입니다."
미할리스의 야수 같은 두 눈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으로서의 본능 때문일까, 나는 악수를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대 계약 얘기를 하기 위해 만난 미할리스는 프로필에 적힌 키가 194cm인 거한이었다. 심지어 피터 크라우치처럼 마른 몸이 아닌 꽤 건장한 몸이었기에 키에 비해 덩치가 더 커 보였다.
마치 내 옆에 서 있는 우리 구단의 스포츠치료사 파스칼과 비슷하게 말이다. 나는 미소를 짓고, 옆의 파스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우리 팀의 직원인 파스칼입니다. 오늘 협상을 도와주러 왔어요."
"그렇군요. 이쪽은 제 아내인 비키입니다."
이어서 비키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비키를 잠시 바라보았다. 비키는 미할리스가 내 최종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으니까.
나는 비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미할리스를 비롯한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앉죠. 식사부터 합시다."
먼저 평범한 얘기부터 시작했다. 임대 영입은 확정된 거였고, 오늘 만난 이유는 추가 조항을 넣는 문제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노팅엄시의 어디에서 문화생활을 즐겨야 하고, 어디에서 생활용품을 사는 게 좋다는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나 있었다.
디저트가 나오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미할리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노팅엄에서 남은 시즌을 보내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임대 후 이적 조항을 원하는 겁니까?"
"우리 팀에서 오래 뛰어줬으면 하니까요. 미할리스는 1부 리그에 가서도 훌륭한 자원이 되어줄 게 틀림없거든요. 그만큼 주급도 보장해줄 수 있습니다. 지로나에서 받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을 거예요. 세금 떼고 말이죠."
내 말에 미할리스는 순간 아내 비키의 눈치를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할리스는 자신의 아내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할리스에게는 저니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저니맨은 여러 클럽과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선수들을 부를 때 흔히 쓰는 호칭이었다.
미할리스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스무 살부터 1~2년에 한 번씩 클럽을 옮겨 다녀야만 했고, 스무 살에 미할리스와 결혼한 비키 또한 미할리스를 따라 1~2년에 한 번씩 나라를 옮겨 다녀야 했다.
팬들은 간혹 쉽게 생각하곤 하지만, 계속해서 나라를 옮겨 산다는 건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좋은 조건으로 우리 팀에 오라고 제안해도 지금처럼 바로 대답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이건 회귀 전이 아니라 스카우트들의 인맥을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클럽에서 주전 경쟁을 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구단에 오면 최소 3선발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미할리스의 실력에 달려있겠지만요."
미할리스가 지금 소속된 클럽은 스페인 2부 리그의 지로나. 지로나는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맨체스터 시티의 제휴구단으로 맨체스터 시티가 유망주들을 수시로 임대 보내는 곳이었다.
미할리스의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개인적인 문제, 그러니까 만성적인 종아리 통증 때문에 그들과 제대로 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민을 마친 미할리스가 말했다.
"임대라면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저에게 결함이 있다는 건 미스터 킴도 잘 아실 텐데요? 저는 그 조항을 빼고 계약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미할리스가 험악한 얼굴을 했다. 지금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곧, 미할리스의 표정을 당황스럽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할리스의 만성적인 종아리 통증은 19살 무렵부터 시작됐고, 10년 동안 계속됐다.
어린 시절부터 피지컬로 주목받았던 선수였던 미할리스는 이 통증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2부 리그 상위권과 1부 리그 하위권을 오가며 그의 재능이 진짜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회귀 전에 미할리스는 이 만성적인 통증을 치료했다.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파스칼의 힘으로.
파스칼은 회귀 전에 맨체스터 시티의 스포츠치료사였고, 맨시티와 지로나는 제휴구단이었기 때문에 지로나로 파견되었었다.
그리고, 파스칼의 마사지 기술로 미할리스는 나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미할리스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미할리스는 속도보다는 힘을 중점에 둔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에 그에게 늦은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스페인 2부 리그와 1부 리그의 중앙 수비수들은 미할리스와 몸싸움만 붙으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헤딩 경합을 하면 튕겨 나갔다.
현대 축구는 우리 로드처럼 다재다능한 수비수를 원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발기술은 좀 떨어지더라도 몸싸움과 수비 기술을 중점으로 한 수비수들이 없어졌다.
이런 환경에서 미할리스는 막는 방법은 있는데 막을 사람이 없는 공격수가 되었다.
시대를 잘 만난 미할리스는 라리가에서 득점왕을 해내고, 내가 회귀하기 직전에는 맨시티로 이적했다.
그렇기에 파스칼을 데려올 때부터 미할리스를 꼭 영입할 계획까지 세워놨었다.
회귀 전, 파스칼이 맨시티의 도움으로 비시즌 기간에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걸 떠올려, 맨시티와 교류하는 대학교를 찾고, 지난 프리 시즌에 파스칼을 그 대학교에 보냈다.
다행히도 파스칼은 그곳에서 미할리스의 부상을 해결할 수 있는 최신 기술을 비롯한 여러 기술을 습득했다.
이런 준비를 통해 원래는 내년 여름에 미할리스를 영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크의 이적요청 때문에 임대 영입으로 수정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런 미할리스를 지로나는 우리가 주급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흔쾌히 임대를 보내준다고 했으며 영입을 원하면 100만 유로(약 13억 원)만 달라고 하고 있었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기회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할리스의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애도 둘 있으니, 최대한 이사는 피하고 싶은 거겠죠."
"···예."
미할리스의 아내 비키는 말 없이 나와 미할리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나는 미할리스에게 물었다.
"하지만, 뛰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로나에서 주전 경쟁에 밀린다면 어차피 지로나를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바에야 지금 이곳에 와서 정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방금도 말했다시피··· 여기서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그랬어요. 날 좋은 말로 꼬드겨서 클럽에 데려오고, 제 통증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해요. 그리고, 제 부상이 더 심해질까 봐 다른 클럽으로 이적을 권유하죠."
거친 미할리스의 말에서 그의 삶이 어땠을지 잠깐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아내 비키 또한 미할리스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미할리스가 말했다.
"여기서 실전 감각을 되돌리고, 다음 시즌에 지로나로 돌아가 다시 주전 경쟁을 할 겁니다. 저는 저 때문에 가족의 삶이 망가지는 건 더는 보기 싫으니까요."
슬슬 진짜 협상 재료를 꺼내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됐다.
나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봤자, 그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 텐데요."
"이 통증 앓으면서도 잘했습니다."
"그 통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요?"
"···뭐요?"
그 순간, 미할리스와 비키가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이 분을 왜 데려왔는지 궁금했겠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가만히 있으라고 사전에 얘기해뒀기에 파스칼은 조용히 있었다.
"높은 확률로 통증을 없애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미할리스와 파스칼은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미할리스를 향해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밑져야 본전으로 한번 해 보시죠. 만약 효과가 없다면, 임대 후 이적 조항 없이 계약하겠지만, 조금이라도 효과를 본다면 내일 제가 말한 조건에 동의해주셔야 합니다."
미할리스는 내 제안을 끝까지 고민했지만, 비키는 미할리스가 나을 수 있다면 당연히 이곳으로 와야 한다며 미할리스를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
이 호텔에는 마사지실이 있었다. 이미 예약해뒀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파스칼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파스칼은 그렇게 말하며 서로 대화 중인 미할리스와 비키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만성적인 종아리 통증의 치료법은 비시즌 기간, 파스칼이 뭘 배워왔는지 구체적으로 적어놓은 서류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절 데려오신 거군요··· 하지만, 통증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배워온 지 얼마 안 되는 기술을 이렇게 갑자기 사용하기에는···."
"제대로 배워오신 건 맞잖아요? 그리고, 그 치료법의 시작은 능숙한 마사지 기술을 통해 통증을 완화하는 것부터고요. 딱히, 설비가 필요없는 일이잖아요."
내 말에 파스칼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머뭇거렸다. 그래도 바로 하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아서 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오늘 특근에 대한 보수는 지급될 거예요. 아. 성공하면 꽤 많이 오를 수도 있겠죠. 그리고, 미할리스가 다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파스칼은 그래도 고민되는지 머뭇댔다. 그래도, 다행히 긍정적인 대답을 줬다.
"맞는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나는 긴장한 것 같은 파스칼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주세요. 파스칼이 선수 하나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파스칼은 준비를 마치고 마사지실로 들어갔다. 미할리스가 어색한 얼굴로 마사지 침대에 앉아있었다.
미할리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저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초면인데 이게 뭔지···."
190cm가 넘는 거한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가볍게 악수했다.
미할리스가 또 입을 열었다.
"제 아내가 그러는데 미스터 킴이 노팅엄에서 많은 기적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렇죠. 몇 달 열심히 일하다 보면 클럽이 훌쩍 커져 있거든요."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다 보니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이 미스터 파스칼을 자신 있게 소개해줬다는 거니··· 미스터 파스칼도 대단한 사람이겠죠?"
미할리스의 말에 파스칼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할리스의 기대 가득한 눈빛에 대고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미할리스가 말했다.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됩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파스칼은 속으로 김도운을 욕했다. 만약 자신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이 사람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해질 것 같아서. 하지만, 내심 김도운이 말했던 '선수 하나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파스칼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며,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미할리스에게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
어제 미할리스를 만난 후, 나는 파스칼을 데리고 노팅엄으로 돌아왔다. 파스칼에게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마자 훈련장에 출근해 알렉산더, 잭슨과 함께 조깅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아 미할리스에 관한 영상을 확인했습니다."
나는 뛰면서도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는 잭슨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실력이 참 훌륭하더군요. 세자르는 침투형 스트라이커, 할리는 만능형 스트라이커에 가까우니 타겟형 스트라이커까지 추가되면 저와 우리 팀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잭슨과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알렉산더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어질 잭슨의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할리스에게는 만성적인 통증이 있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킴은 임대 후 이적 조항까지 넣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나는 잭슨의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우리에겐 최고의 스포츠치료사들이 있잖아요. 충분히 조사하고 영입하는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감독을 안심시키는 것 또한 단장의 임무였다. 둘은 날 무척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내 자신만만한 말에 잭슨과 알렉산더는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알렉산더 역시 최근까지 선수 생활을 해서 그런지 달리면서도 숨 하나 차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괜찮은 영입이 될 것 같다. 폼이 좋을 때는 1부 리그 스트라이커급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언제쯤 우리 팀에 오는 거냐?"
잭슨 또한 궁금하다는 듯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내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미할리스 파파도풀로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씩 웃고 말했다.
"오늘요."
< 37. 슈퍼 서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