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입단 테스트 (6) >
나는 이태양과 당장 계약하라는 잭슨의 말에 잠깐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너무 급한 게 아닐까요. 아직 2주나 남았는데···."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가끔 보여주는 번득이는 모습과 새로운 걸 흡수하는 능력이 무척 뛰어난 선수입니다. 빨리 임대를 보내 실전경험을 시키고 싶습니다."
"으음···."
필드 위에 있는 이태양은 나와 잭슨을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나는 엄지를 들어주고, 다시 생각했다.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은 선수의 성장 방향과 속도, 한계를 결정짓는다.
선수들이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게 되면 급성장하고, 주변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수준 높은 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잘못된 스타일을 갖게 되면 성장이 멈춰버리거나 오히려 퇴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많이 봐와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회귀 전과 달라진 이태양의 플레이 스타일에 걱정부터 들었다.
회귀 전의 이태양은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스페셜 리스트였다.
[축구 선수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빠른 달리기로 상대 수비수를 휘청이게 하고, 백 숏이라는 개인기로 감아 찰 수 있는 각을 만든 후 인사이드로 감아 차기.]라는 단 한 가지의 확실한 무기가 있었다. 대신 이태양은 그 무기가 막히면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던 한계가 있는 선수였다.
물론, 그 원 패턴이 워낙 강력했기에 프리미어리그 중위권 팀에서도 핵심 선수로 뛸 수 있었던 거지만.
방금 이태양이 아웃사이드 슈팅을 가져가는 과정은 무척 매끄러웠다. 아마 여기 온 이후 내내 연습했을 것이다. 잭슨, 코치, 선수들의 영향으로 성장 방향이 바뀌게 된 거로 짐작됐다.
한 발을 주발로 사용하는 선수가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둘 다 잘 다루게 된다면 좋지만, 프리미어 리그 레벨에서 그게 되는 선수는 몇 되지 않았다.
나는 이태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태양이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회귀 전처럼 성장할 수 있을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아서.
"미스터 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혹시 썬에게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제가 데려온 선수인걸요."
하지만, 이태양의 성장이 불확실해졌다고 해도 내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회귀 전, 최고의 감독이 되었던 잭슨이.
잭슨은 이태양을 보고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쓸 수 있는 재목이라고 말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불안했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잭슨에게 말했다.
"잭슨에게 이태양 선수를 더 볼 기회를 주고 싶었거든요. 제 눈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사실 빠르게 계약하지 않으면··· 오늘 찾아온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라붙을 것 같아서요."
"아."
당장 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기장에는 에이전트나 스카우트 같은 축구계 관계자가 와 있을지도 몰랐다. 공개 훈련에 그런 사람이 오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아주 멍청한 거였다. 우리 팀은 시즌 초반에 강등권으로 예상되다가 현재 리그 4위를 달리고 있는 상위 팀들의 먹잇감 같은 구단이기도 하니까.
"경기가 끝나자마자 계약을 제안하겠습니다. 그러면 됐죠?"
"예. 만족스럽군요."
그 순간, 옆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오오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 주르르 앉은 알렉산더를 비롯한 코치들과 선수 몇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발목을 삐어 벤치에 있던 인간 확성기 할리가 내게 물었다.
"썬한테 지금 말해줘도 돼요?"
"응?"
"경기 끝나고 단장님이 조용히 가서 계약하는 건 재미없잖아요.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다 알려주는 거예요. 썬에게도 마찬가지고요."
할리는 재밌다는 이유로 말했겠지만, 내게는 충분히 좋은 아이디어로 들렸다.
이태양은 캐릭터 자체로도 좋은 스타성을 갖고 있었다. 지난번 공개 훈련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모인 게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거기에 멋진 장면과 연출을 덧붙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가 씩 웃고,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경기장의 이태양에게 외쳤다.
"썬! 감독님이 너 테스트에 합격했대!"
이태양이 넣은 골의 여파로 경기장은 어수선했었다. 하지만, 할리가 이태양의 테스트 합격을 외친 순간 경기장의 팬들은 할리와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파도가 퍼져나가듯 조용해졌다. 팬들은 할리가 한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동시에 경기장의 이태양은 제 자리에 선 채로 굳어져 있었다.
방방 뛰지도 않았고, 그저 고개를 아주 느리게 갸웃하며 옆의 미할리스에게 무언가 묻고 있었다. 아마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볼 만 하네요."
"그렇구나."
내 말에 알렉산더가 동의해줬다.
"제가 했던 영입 중에 가장 극적이네요. 보통 사무실에서 사인하고 끝인데.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할까요?"
"농담도 잘하는구나. 아무튼, 쟤가 성공하면 백 퍼센트 영화도 나올 거다."
알렉산더의 말은 몹시 그럴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구단에 도움은 되겠네요."
우리가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태양이 공식적으로 우리 팀 선수가 된다는 걸 알게 된 팬들이 이태양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썬! 썬! 썬!>
그리고 이태양은 그 한 가운데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흔드는 시늉을 해 줬다.
그제야 이태양은 환호해주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아아!>
나는 환호하는 팬들을 보며 감동 대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오늘 저 팬들이 본 건 뭘까?
전설적인 선수의 탄생일까···?
프리미어리그 중위권 선수, 아니면 프리미어리그 하위권 선수의 탄생일까?
물론, 회귀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노팅엄부터가 망해가는 게 아니라 건재했고, 그 영향인지 이적시장도 점점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팀에 데려온 선수들이나 정책은 무조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방향대로 가려 했고, 그렇게 했다.
그래서 지금 머리가 몹시 아팠다.
믿을 건 잭슨이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간 후에도 쓸 수 있는 재목이라고 말한 것뿐이었으니까.
나는 환희에 찬 이태양을 보다가 벤치에서 일어나 경기장을 나갔다.
일단은 이태양을 위한 계약서를 가져오기 위해서.
**
<노팅엄에 태양이 뜨다!>
어제 노팅엄 FC의 공개 훈련에서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다.
테스트 선수 신분이던 이태양(대한민국)이 중앙선부터 단독 돌파 후, 멋진 골을 넣자마자 테스트 합격 소식을 들은 것이다.
감독과 단장이 테스트 합격을 결정하고, 벤치에 앉은 할리가 이 소식을 경기장 전체에 알렸으며, 경기장에 모인 이천여 명의 팬들이 이태양을 축하해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멋진 광경이었다.
또한, 합격의 주인공 이태양은 영화 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군 복무 중이던 이태양을 김도운 단장이······.
기사의 남은 내용은 내가 이태양을 데려온 과정이 조금 과장돼서 적혀 있었다.
큰 문제는 없었기에 나는 신문을 접고, 벤치에 내려놓았다.
"킴, 안 가십니까?"
조깅 준비를 끝마친 잭슨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태양 선수의 기사가 나와서요."
"좋게 나왔겠죠?"
"예. 많이 기대하고 있는 분위기에요. 일단 뛰면서 얘기하죠."
"좋습니다."
지금은 새벽이고 이곳은 노팅엄의 훈련장이었다. 나와 잭슨은 일주일에 세 번은 꼭 하는 조깅을 시작했다.
"알렉스는 오늘도 결석이군요."
"하하, 어쩔 수 없죠."
원래는 알렉산더도 이 조깅의 멤버였지만, 요즘은 워낙 야근이 많아 못 나오고 있었다. 그 야근의 원인이 잭슨이라는 걸 생각하니 잭슨이 괜히 악마 상사로 보였다.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잘됐네요. 잭슨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잭슨은 뛰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잭슨을 통해 이태양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었다. 어제는 이태양에 관한 고민 탓에 퇴근도 못 하고, 스마트폰도 안 보면서 회귀 전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놓은 계획서만 몇 번이고 봐야 했었으니까.
나는 계속 말했다.
"아웃사이드 슈팅은 직접 조언해 주신 건가요?"
플레이 스타일 변화가 잭슨의 요구라면 이태양의 성장에 관해서는 안심하고, 미래의 팀 운영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잭슨이 제대로 써 줄 테니까.
하지만, 잭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스스로 연구한 것 같습니다. 참 대견하지 않습니까?"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나는 또 물었다.
"혼자서 그렇게 깔끔한 스타일을 완성했다고요?"
"아뇨. 썬이 먼저 제게 와서 달리기 말고 슈팅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가 가진 장점에 어울리는 슛을 연구해 봐라.'라는 식으로 얘기했고요. 그 뒤에 코치들이나 선수들을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묻더니, 며칠 후부터는 직선 돌파 후 아웃사이드 킥을 연습하더군요."
잭슨은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장기적으로 잘 어울릴까요?"
"음··· 예. 잘 어울립니다. 보통 오른발잡이들이 왼쪽 측면으로 직선 돌파할 때 어설픈 왼발 크로스나 어떻게든 오른발 각도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는 거죠. 아웃사이드 슈팅은 속도도 살릴 수 있거든요. 괜히 베일 같은 선수들이 아웃사이드 슈팅을 가끔 하는 게 아니죠."
"그렇군요···."
좋은 말이었지만, 내 마음에 확신을 주진 못했다.
회귀 전과 달라졌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답답하게 되다니, 앞으로가 걱정됐다.
그때, 잭슨이 말했다.
"뭘 그렇게 불안해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킴이 직접 골라온 선수 아니었습니까?"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이태양 선수에 관해 확신하던 게 있었는데, 그게 어그러져 버렸거든요."
잭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핵심을 찔러왔다.
"킴은 썬이 어떤 스타일로 크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예리하네요. 잭슨."
"아닙니다."
"그저··· 마치 왼쪽의 로벤처럼. 왼쪽 측면에서부터 속도를 이용해 중앙으로 치고 나간 후, 감아 차기로 골을 넣는 그림을 생각했었어요."
나는 회귀 전의 이태양에 관해 말했다.
"그게 미스터 킴이 본 썬의 미래였군요."
미래라는 말에 살짝 가슴이 찔렸지만, 잭슨이 회귀에 관해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예."
이후 우리는 말 없이 조깅을 계속했다. 잭슨이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해서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깅을 마쳤을 때, 잭슨이 말했다.
"킴의 아이디어도 정말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것도 그림이 잘 그려져요."
"예?"
"그러니까, 둘 다 가르쳐 보죠. 며칠 안으로 벨기에에 임대를 보낼 텐데··· 기술 코치를 하나 새로 고용해서 붙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예상치 못한 방향이 나와버렸다.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기 때문에 나는 잭슨에게 동의해야 했다.
내 고민은 오히려 더 커져 버렸다.
**
"으아. 좋은 아침이다!"
이태양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외쳤다. 기분이 너무 좋았기에 소리를 안 지를 수 없었다.
왜냐면 이태양은 어제 테스트에 합격했으니까.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K리그 2에서도 제대로 못 뛰던 자신이 챔피언십 리그 소속 팀의 선수가 되었으니까.
어제 단장님에게 계약서도 받았고, 밤새 읽었다. 이제는 사인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자세! 빠르게! 자세! 빠르게!"
어제 자신을 도와줬던 주문을 외운 이태양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였다. 아주 좋았다.
이태양은 벌떡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먹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이태양은 훈련장이 아닌 반대쪽 길로 향했다.
오늘은 오전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태양은 어제 저녁에 갑자기 생긴 약속 때문에 이렇게 일찍 나온 거였다.
이태양은 길을 걷는 내내 스마트폰으로 김도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단장님은 전화를 안 받으시네··· 얘기만 할 거라고 미리 말 해두고 싶었는데···."
곧 만날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도운에게 얘기를 해 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김도운은 어젯밤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도 안 들어왔었고.
그래서 이태양은 일단 그 사람을 만나고, 김도운에게 만남에 관해 얘기할 계획이었다.
이태양은 옷을 가다듬고 머리를 만졌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면서 들뜨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태양은 한 카페에 도착했다.
< 39. 입단 테스트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