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해외 유학 프로젝트 (2) >
김도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축구협회 언론홍보팀 최미영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자, 잠시만요. 끊지 마세요."
-예.
원래 전화를 받아야 할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워 자신이 전화를 받은 건데 정말 다행이었다. 장난 전화가 워낙 많이 걸려오니까 유명인을 사칭하면 바로 끊어버리라고 말해놨었기 때문이었다.
최미영은 유소년 총괄팀의 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책상에 붙은 전화번호표를 확인하고, 번호를 눌렀다.
유럽 축구 시즌이 끝난 작년 중순부터 김도운은 축구협회의 사람들의 입에 여러 번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리고 어제, 유소년 총괄 기술위원장과 자신을 포함한 팀장급 이상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도 김도운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특히, 축구협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노팅엄이 이러다 프리미어리그까지 올라가겠어요.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김도운 단장님에게 여러 가지 협조를 부탁해보죠. 축구협회의 직원이나 국가대표 코치 팀의 연수부터 시작해서··· 선수들의 단기 유학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여러 분야의 기술위원장들도 축구협회장의 말에 동의하며 우리 축구협회는 그쪽 구단에 뭘 줄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그리고, 내용을 구체화해서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대화를 시작하자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 김도운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이문국 기술위원장입니다.
"기술위원장님. 저 언론홍보팀의 최미영 팀장이에요.
-아, 최 팀장. 무슨 일이야? 혹시, 유소년 국가대표 선수 중에 누가 사고라도 쳤어?
"위원장님. 그게 아니라요."
최미영은 숨을 고르고 또박또박 말했다.
"김도운 씨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기술위원장님을 찾았는데···."
-뭐? 김도운 씨가 누군데?
최미영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뻐끔거리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노팅엄 FC의 단장 겸 사장 있잖아요."
그제야 이문국 기술위원장의 목소리가 의문에서 놀람으로 바뀌었다.
-정말이야?
"네! 전화 돌려드려요? 지금 기다리고 계시는데···."
-아이고, 빨리 바꿔줘.
"네."
최미영은 김도운 쪽으로 잠깐 통화를 돌려서
"바꿀게요."
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최미영은 김도운의 목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이문국 기술위원장에게 연결했다.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은 최미영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뭣 때문에 축구협회로 바로 전화한 걸까?
유소년 총괄 기술위원장을 찾았으니 한국에 마음에 드는 유망주라도 있는 걸까?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이곳에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최미영은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연결됐나요?"
-아, 예.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노팅엄의 사장 겸 단장, 김도운이라고 합니다."
-이문국 유소년 축구 총괄 기술위원장입니다.
나는 이문국의 걸쭉한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문국은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대표에도 뛰었던 선수였다.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세네갈전 골이었나요? 기술위원장님이 선수 시절에 넣은 아주 멋진 발리 골이."
-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거의 해외에서 살았지만, 국가대표 경기는 늘 챙겨봤거든요. 덕분에 아주 인상 깊었던 골이나 선수들은 기억하고 있어요."
-하하, 고맙군요.
이문국의 기분이 좋아졌는지 몹시 밝은 목소리가 되었다. 분위기가 풀어진 것 같아 좋았다.
이문국이 말했다.
-나중에 식사나 한번 하시죠. 한국이든 영국이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최대한 빨리 한 번 뵙고 싶은데···."
-아, 방금 전화를 연결해 준 친구한테 들었습니다. 저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거의 15년 전쯤 말입니다. 축구협회에서 해외 유학 프로젝트를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아! 압니다. 그거 다녀온 애들한테 부럽다고 많이 말하곤 했었죠.
나는 이문국이 추억에 잠길 틈도 없이 말했다.
"노팅엄과 함께 그 프로젝트를 부활시켜 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한국인으로서 한국축구를 돕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뿌리인 유망주들을 키우는 걸 돕고 싶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100% 진심은 아니었다.
국가대표팀은 좋아하지만, 당연히 노팅엄이 더 우선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축구협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축구협회의 인맥을 통해 최근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한국 기업들의 후원을 받는 게 더 쉬워질 것이고, 우리가 프로젝트를 한 해 한 해 진행할수록, 우리가 좋은 대우를 해준다는 게 퍼지면 한국 전체를 노팅엄의 유소년 양성센터처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다 국가대표급 스타까지 나온다면, 노팅엄은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문국은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스마트폰을 잠시 귀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정말 멋지군요!
"하하···."
-감동했습니다. 해외에 살면 애국심이 커진다는데··· 정말이었군요!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나는 웃음소리만 내며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문국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제가 한국에 언제 갈 수 있냐면···."
-아뇨. 한국에 올 필요 없습니다.
"예?"
-제가 가겠습니다. 노팅엄으로 가면 되나요?
예상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모습이라 살짝 당황했지만,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
"생동감이 넘치는군요."
그날의 통화 후 불과 일주일 만에 노팅엄에 찾아온 이문국은 유소년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 마시아 정도로 세분된 건 아니지만, 15세를 기준으로 다른 훈련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문국에게 이렇게 말하며 두 개의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15세 미만 팀과 15세 이상 팀이 동시에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실전 위주의 15세 이상 팀과 놀이 위주의 15세 미만 팀의 훈련은 눈으로만 봐도 구분이 확 됐다.
당장은 만 15세 이상의 선수들을 데려올 거지만, 장기적으로는 15세 미만의 선수들도 데려올 생각이 있었기에 이문국은 진지한 얼굴로 양쪽 훈련을 다 보고 있었다.
일부러 둘 다 훈련할 때 초대하길 잘한 것 같았다.
이문국은 유소년 단장 토비와도 인사를 나눴다. 이문국은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훈련 방식이 정말 인상 깊다고 하네요. 나중에 견학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김지민이라는 축구협회 소속 직원의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이문국은 훈련장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우리 팀의 슈퍼 유망주 레오가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며 중앙선부터 덩치 큰 형들을 제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는 5명을 제치고, 골까지 넣었다.
이문국은 정말 놀랐는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멍하니 있다가 내게 물었다.
"저 애 누굽니까? 앨런을 보는 줄 알았어요."
"우리 팀의 기대주에요. 실력은 충분한데 아직 피지컬이 조금 부족해서 데뷔를 못 하는 중인 선수죠."
"표정이··· 정말 축구를 즐기고 있는 것 같군요."
레오를 비롯한 선수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이문국은 계속 감탄하며 레오를 비롯한 선수단 전체를 봤다. 재능 넘치는 유소년 선수가 있는 팀은 자연스럽게 고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이문국이 내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훈련이 끝날 때까지 지켜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아, 그럼 일단 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와서 이것저것 설명해드릴게요."
"예."
훈련장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문국을 따라온 통역 직원 김지민도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날 따라왔다.
"여자 화장실은 여기에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김지민이 말을 걸었다.
"건혁이 잘 지내고 있죠?"
그 순간, 김건혁이 말했던 내부관계자라는 사람이 김지민라는 걸 깨달았다.
"프로젝트 얘길 해준 게 김지민 씨였군요?"
"네."
"김건혁 씨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독님이 특히 예뻐하세요."
내 말에 김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힘들어 죽겠다고 하던데요···?"
"그만큼 신뢰한다는 거예요."
김지민은 납득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아, 그래도 건혁이가 노팅엄이 정말 좋다고 했어요. 일단 인종차별이 아예 없고, 다들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일도 엄청 많이 배우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이런 식으로 직원의 속마음을 듣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아주 좋았다. 구단에 만족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런데··· 일 좀 줄여주시면 안 돼요? 얘가 요즘 화상 통화할 때마다 얼굴이 반쪽이라 걱정돼서···."
"그건 건혁 씨가 선택해야죠. 그런데 두 분, 많이 친하신가 봐요."
"음. 어어···."
김지민이 당황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혹시 사귀어요?"
"넵···."
"장거리 연애?"
"네, 제가 영국 유학 왔을 때 사귀었어요."
"그랬구나. 그럼 건혁 씨가 많이 걱정되겠어요."
"맞아요···."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럼 연락처 주세요. 건혁 씨한테 무슨 일 있거나 하면 연락해줄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직원 가족에도 신경 써주는 복지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화장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문국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줬고, 양쪽의 훈련이 모두 끝났다. 이문국과 김지민을 단장실로 안내했다. 둘에게 차를 내오니 이문국이 말했다.
"정말 잘 봤습니다. 배우고 싶은 게 정말 많네요."
"코치들의 연수 같은 것도 여유가 있을 때는 가능합니다."
"정말입니까?"
이문국의 눈이 반짝였다.
"예. 그럼 일단 프로젝트 얘기부터 해 볼까요?"
이문국이 금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돈 문제부터 얘기하죠. 해외 유학 프로젝트로 넘어오는 선수들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건, 우리 팀의 선수가 되었을 때입니다. 계약할지 말지 정하는 3개월 동안은 임시 선수로서 축구협회에서 체류비 등을 대 주셔야 합니다."
이문국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애초에 프로젝트는 하는 거로 되어있었기에 우리는 세부사항들을 조율했다.
프로에서 뛸 수준이라 판단될 때, 비자 문제는 제휴 구단 베스테를로에서 해결한다고 했고, 베스테를로의 시설은 직접 가든지 직원을 보내 달라고 말하는 등 한 시간 넘게 얘기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이문국이 말했다.
"조건이 너무 좋군요. 원하는 게 있습니까?"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준비했던 대로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유망주들을 원합니다."
"국가 규모의 유소년이라··· 뭐, 나쁘지 않군요."
"그리고."
이문국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계획하게 된 첫 번째 이유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태양이라는 선수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축구 팬들이 워낙 일 못 한다고 욕해대서 요즘에는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의 정보는 다 갖고 있습니다."
씩 웃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잠재력을 가진 선수인지는 모르겠죠?"
"예. 그렇죠···."
"저는 이태양 선수가 당장 국가대표팀 명단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군대 때문에 2년을 쉬고, 그전에도 K리그 2에서 뛰던 선수를요?"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숨을 고르고, 오늘 가장 중요한 말을 했다.
"이종학 감독님이 이태양 선수를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꼭 직접 봐 줬으면 합니다. 그것만 해주시면 프로젝트를 바로 다음 시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문국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을 뗐다 닫았다 하던 이문국이 어렵게 내게 물었다.
"청탁인가요? 그건 안 됩···."
"아뇨. 순수하게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한 경기를 다 봐 주셔야 합니다."
이문국은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진심인가요?"
"예. 녹음해도 괜찮습니다."
내 의중을 찾으려는 듯 날 빤히 보던 이문국은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진심이었으니까.
이문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그렇게 얘기하겠습니다."
< 40. 해외 유학 프로젝트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