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잭슨 포터 (1) >
희미하게 들려오는 로빈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잭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지는 시각이었다.
잭슨은 잠들어 있는 자신의 동반자, 마사 포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으음···."
머리가 하얗게 세었음에도 아직도 잠이 많은 마사를 보며 잭슨은 미소지었다. 잭슨은 마사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문을 살살 열고, 소리나지 않게 닫았다.
잭슨은 먼저 세면대로 향했다.
짙게 난 수염을 능숙하게 정리하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남은 잠을 떨쳐냈다.
이어서 주방으로 향해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6시 전까지 훈련장으로 출근하는 게 노팅엄으로 온 후 매일같이 지켜온 루틴이었다. 물론, 훈련장에서 밤을 새울 때는 빼고.
하지만, 오늘은 주방에 잠옷 차림의 누군가가 있었다.
"하~암. 잭슨. 맨날 이런 시간에 일어나면 안 피곤해요?"
마사였다. 깨우지 않게 정말 조심했는데 어떻게 일어나 있는 건지 잭슨은 당황했다.
그동안 함께 살아온 세월이 길었기에 잭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마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깨웠다고 짜증 안 부려요."
"허허···."
마사는 원래 아들 부부와 함께 런던에 살았었고, 잭슨이 노팅엄 FC에 취직하자마자 노팅엄으로 이사를 오겠다고 했다.
잭슨은 괜찮다고 했지만, 마사는 이러다 남편 얼굴을 까먹겠다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영국 2부 리그에서 감독 생활을 할 때는 마사와 같이 살았었다. 하지만, 자신이 구단과 여러 문제를 일으켜 영국 생활이 녹록지 않게 된 후에는 외국에서 원거리 부부 생활을 했다. 이때는 아내를 고생시키기 싫었고, 무엇보다 구단이나 선수와 문제가 생기는 자신을 보여주기 싫었기에 잭슨은 혼자 살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잭슨은 노팅엄에 오기 직전 많이 지쳐있었다. 자신에게 제안한 구단이 노팅엄 FC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마사의 주장을 거절하지 못했다.
잭슨은 마사에게 미안한 게 너무 많았다.
마사와는 젊은 나이에 결혼했다. 그때 마사는 괜찮은 직장에 막 입사했었는데, 잭슨이 영국 내에서도 여러 번 팀을 옮기고 아이까지 생겼기에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됐다.
한데, 잭슨은 이후 마사를 영국에 두고 해외의 팀들을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그래서 마사는 아들, 딸을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잭슨은 적어도 노팅엄에서는 자존심을 조금 꺾더라도 오래 버티자고 결심했었다.
물론, 막상 일하기 시작한 노팅엄은 자신에게 있어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지만.
"당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어서 다시 침대로 가요. 평소보다 3시간이나 일찍 일어나면 어떡해요."
잭슨의 말에 마사가 졸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갈 거예요. 당신 아침 좀 차려주고."
잭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사가 냉장고 안을 뒤적여 달걀과 소시지를 꺼내왔다. 그리고 말했다.
"수프 데우고, 빵 찍어 먹으면서 대충 때울 생각이죠?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죠. 그래야 선수들에게 기가 안 눌리죠."
마사의 말은 팩트 그 자체였기에 잭슨은 멋쩍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잭슨은 마사가 시키는 대로 식탁에 앉았다.
마사는 순식간에 소시지, 계란프라이, 삶은 콩, 토스트와 토마토를 담은 영국식 아침 식사를 내놓았다.
"너무 많은데···."
"잔말 말고 먹어요."
마사의 마음이 고마웠기에 잭슨은 꾸역꾸역 식사하기 시작했다. 마사는 졸린 눈으로 잭슨에게 가끔 말을 걸어왔다.
"요즘 괜찮아요?"
"괜찮죠."
"피곤해 보이는데···."
마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잭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거울을 봐서 잭슨 또한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잭슨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으니까.
이번 시즌 초에 1부 리그 승격을 호언장담했지만, 잭슨은 1부 리그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또한, 잭슨은 리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40대~50대의 젊은 감독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프리미어리그나 챔피언십 리그에 남아있는 또래의 노장 감독들은 대부분 더 어린 시절에 큰 성과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자신 같은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깨어 있는 시간을 알뜰하게 써야 했으며, 필요하다면 수시로 잠도 줄여야 했다.
축구가 발전하면서 봐야 할 자료는 수없이 늘어났으니까. 그리고 그 자료를 모은다고 해도 경기에 이길 아이디어가 쉽게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잭슨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즌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번에는 일주일 정도 스페인의 섬으로 휴가라도 다녀올까요?"
"좋아요. 아들 가족이랑 딸 가족 다 모여서 함께 가요."
마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상만 해도 좋았기에 잭슨 또한 웃었다. 잭슨은 포크 질을 하다가 이제 접시에 음식이 안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접시가 비어있었다. 잭슨은 접시와 포크, 칼을 집어 들어 싱크대에 뒀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됐어요. 내가 할게요. 늦은 거 아니에요?"
"응? 어, 어어?"
잭슨은 시계를 보고 당황했다. 지금 딱 출발해야 여섯 시에 김도운과 조깅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잭슨을 보며 마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슴께로 다가와 잭슨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말했다.
"요즘, 당신을 보면 '세계 최고의 감독이 되겠다.'라고 말하던 젊은 시절의 당신이 떠올라요."
잭슨은 마사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둘은 키 차이가 꽤 났기에 넥타이를 묶는 내내 정수리 부근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영국에서 혼자 애들 키울 때는 당신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더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구단에게 버림받았잖아요. 당신 고집도 장난 아니었고. 근데,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네요. 60이 넘어서야 당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구단을 만나게 됐잖아요."
"그렇지···."
"저번 주에 킴 단장이 집에 왔다 갔었어요."
"미스터 킴이?"
마사는 다 묶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사가 말했다.
"남은 시즌 동안 당신이 정말 힘들어할 거라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갔어요."
"음···."
"그리고 이번 시즌에 승격에 실패하더라도 당신을 끝까지 믿을 거라고, 당신은 틀림없이 세계 최고의 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줬어요. 정말 기뻤어요. 그런 단장은 태어나서 처음 봤으니까요."
잭슨은 곧 만날 김도운에게 꼭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사가 물었다.
"힘들지만, 즐겁죠?"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적어도 나는, 여기는 당신을 안 버릴 테니까요."
마사는 활짝 웃고 있었다. 흰 머리고, 눈가주름과 팔자주름이 생겼지만, 잭슨에게는 젊은 시절의 그녀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마사가 말했다.
"다녀와요."
**
"킴, 마사를 만나고 갔었다고···."
"아··· 하하. 속도를 좀 올려볼까요."
김도운은 민망해서 그런지 잭슨을 훨씬 앞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잭슨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김도운은 한참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잭슨, 이럴 때야말로 더 열심히 운동해야죠."
"맞습니다. 아무튼, 그 질문 안 할 테니 속도 좀 낮춰주십시오. 킴을 쫓아가다가는 오늘 일 못 할지도 모릅니다."
"아, 그러면 안 되죠."
김도운이 순식간에 속도를 줄였다.
둘은 나란히 달리며 평소대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도운이 말했다.
"다음 프리시즌에는 동남아 투어를 가려고 해요. 아직 국가는 못 정했지만요. 그쪽 지역에 포레스트 펍 신청이 계속 들어오고 있고, 팔려나가는 굿즈의 양이 정말 어마어마하거든요. 중국보다 많아요."
"중국보다 많다니 대단하군요. 그런데, 투어 기간은 얼마나···."
잭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도운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리시즌 상대 팀들을 걱정하는 거죠?"
김도운은 정말 꼼꼼했다. 특히, 각 직책의 사람들이 뭘 생각하고 있을지 잘 알았다. 잭슨이 걱정할 걸 예상하고 대비해줬다. 지금처럼.
"투어가 끝나면 바로 중국으로 갈 거예요. 우리 구단이 중국에서 열리는 인터네셔널 챔피언스 컵(ICC)에 참가하거든요. 우리 구단이 세계적으로 인기가 점점 많아지고 있고, 웬만한 1부 리그 급 구단보다 인기가 많다는 이유 덕분이에요."
"정말입니까? ICC 라면 전 세계 최고의 팀들이 모이는 대회 아닙니까?"
"초청팀 자격이에요. 유벤투스가 자기들 일정 때문에 참가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쪽 협회에 질러봤는데, 잘됐네요."
"역시 킴입니다!"
잭슨은 몹시 기뻤다. ICC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팀들과 겨뤄볼 수 있었다. 물론,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김도운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물론, 프리미어리그 승격이라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요.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승격에 실패하더라도 훌륭한 상대들과 친선 경기를 치를 수 있게 지원할 테니까요."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김도운의 모습을 보며 잭슨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중얼거렸다.
"힘내야겠군요."
*
조깅하고, 샤워한 후 김도운과 가볍게 차를 마시면 오전 7시쯤이 되었다.
잭슨은 정확히 7시에 훈련장 건물의 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적막한 복도와는 달리 회의실 안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좋은 아침이지?"
"예."
"예에···."
전력분석관과 코치들이 모여 있었다. 잭슨은 이들과 함께 이번 주말에 있을 경기의 상대에 관해 분석할 것이었다. 전술과 대략적인 선수 명단, 그에 따른 훈련 프로그램을 짜는 아주 중요한 회의였다.
전력분석관들과 코치들의 시커먼 눈 밑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잠시 가졌던 잭슨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시작하지."
먼저, 전력분석팀의 팀장 알렉산더가 영상을 보여주며 상대 팀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아스톤빌라는 특별한 약점이 없는 균형 있는 수비를 보여주는 팀입니다. 하지만, 공격을 시작할 때 약점이 드러납니다. 보시죠."
알렉산더는 영상을 재생하고, 그 위에 빨간 선과 원을 이용해 아스톤빌라의 오른쪽 풀백이 공격 시 지나치게 전진해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걸 보여줬다.
알렉산더의 이후 설명도 이런 상황이 여러 경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이었다.
코치들은 이에 따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테오와 요한 위주로 경기를 풀면 되겠네요."
수석코치 존의 말에 다른 코치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잭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 경기의 핵심은 테디, 오른쪽이다."
"예?"
잭슨은 선수들에게는 늘 확신을 갖고 말하고, 이견은 잘 듣지 않았다. 하지만, 코치들과는 달랐다.
잭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 선수와 우리 선수의 자석 말판과 축구장이 그러진 보드 앞에 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자네 말대로 왼쪽을 공략하려는 움직임은 많았을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왼쪽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오른쪽으로 공격한다. 테오에게는 오버래핑을 금지하고, 요한만 왼쪽을 공격하게 하고, 테디는···."
잭슨은 코치들과 전력분석관들이 이해할 때까지 설명했다.
그렇게 전술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고, 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L-2 훈련과 R-1 훈련을 병행하면 될까요?"
"그래, M-3까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짜 놓겠습니다."
훈련에는 암호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잭슨과 코치들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코치들은 머리를 짜매며 훈련 프로그램을 짜고, 인원을 배분했다. 전력분석관들은 새로 분석할 것들을 확인하고 또 밤을 새워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시즌 내내 해 왔던 일이었기에 여덟 시쯤이 돼서 회의가 끝났다.
"수고했다. 이번 주도 꼭 이기자."
"알겠습니다!"
코치들과 전력분석관들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각자 정리해서 회의실을 떠났다. 다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할 것이다.
잭슨은 회의실에 남아 오늘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9시에 훈련장으로 나갔다.
*
"지각은 없지?"
"예! 전부 있습니다."
로드의 대답에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엄격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잭슨은 수십 년 동안 만들어온 무표정한 얼굴로 선수들을 대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이 있는 선수들이 몇 있습니다."
로드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잭슨은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선수들의 컨디션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부상은 언제 올지 몰랐다. 그런 것들을 다 조율하는 것도 감독의 숙명이었다.
"요한은 어제 집에서 아들이 갖고 노는 레고를 밟아서 발바닥에 멍이 생겼다고 합니다···."
"어이가 없군. 그런데, 이해는 되는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테디는··· 배탈이 났습니다."
잭슨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다음 경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선수들이었다. 후보 선수들로는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아스톤빌라는 노팅엄보다 한 단계 높은 3위 팀이었으니까.
"둘 다 팀닥터에게 갔지?"
"예. 요한은 저기서 조치를 받고 있고, 테디는 병원에 갔습니다."
"좋아, 알겠다. 훈련 시작하지."
"예!"
로드는 씩씩하게 말하고,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 합류했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장점이 하나 있었다. 경험이 워낙 많았기에 이런 일도 몇 번 겪어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잭슨은 머릿속으로 지금 있는 선수들을 이용한 새 전술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42. 잭슨 포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