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42화 (142/245)

< 44. 해외에서 온 손님 (1) >

"절 따라오세요. 교수님은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훈련장 필드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내 뒤로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안경 쓴 백인 남자와 다인종으로 구성된 20대 남녀학생들 열 명 정도가 따라오고 있었다.

시즌 막바지였고 다른 여러 일도 있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 이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 무리는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베리타스 대학교에서 조경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안경 쓴 백인 남자는 학생들을 이끄는 지도교수였다.

지도교수가 내게 말했다.

"먼저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킴. 포레스트 교수님은 우리도 만나기 힘든 분이거든요."

"제자였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내 말에 백인 남자가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학회나 공원 개장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초청장을 보내고 있는데,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네요. 일 년에 두세 번, 전화 정도만 하고 있죠."

이래 봬도 이 백인 남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공원 설계자이자 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대학교의 교수였다.

그리고, 이 남자가 언급하고 내가 지금 가는 곳에서 잔디를 만지고 있을 포레스트 교수님, 그러니까 우리 구단의 잔디관리사는 이 남자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포레스트 교수님은 내가 회귀하기 전부터 이 구단에서 일하고 계셨다. 그래서 회귀해서 계획을 짤 때 구단에서 유일하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할 때까지 교체할 필요가 없는 S급 능력자로 적어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포레스트 교수님은 잔디 관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여러 명문대학교의 명예교수로 활동을 하던 분이었다. 이 분 덕에 우리 경기장의 잔디는 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잭슨도 초반에 이 사실을 참 마음에 들어 했다.

지도교수도 학생들에게 포레스트 교수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포레스트 교수님은 자기 자랑을 안 하시는 분이니 내가 먼저 말하마."

"네!"

그의 뒤를 따르던 학생들이 하나둘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지난 학기 너희들이 공부했던 물속의 빛, 사계절이라는 정원을 직접 설계하신 분이고,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들의 정원과 공원을 컨설팅하던 분이다. 무엇보다,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아주 강하셔서 슈퍼볼이나 월드컵 같은 큰 대회에도 무조건 자문위원에 들어가셨었지."

그렇다. 그래서 나도 괜히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일부러 잘 안 만나는 분이기도 했다.

인맥 또한 어마어마했으니까. 사용하시지는 않지만.

학생들은 무척 놀란 눈으로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한 남학생이 물었다.

"그런 분이 여기에··· 계시는 건가요?"

내 눈치를 보며 최대한 무례하지 않게 말하려는 학생이었다. 충분히 이해했기에 별말 없이 계속 걸었다. 원래였다면 적어도 맨시티, 바르샤,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 같은 팀에 계실 분이지.

지도교수가 말했다.

"몇 년 전에 은퇴하셨으니까. 지금은 이 구단에서 잔디관리사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고 계실 거다. 명예교수로서 특강 정도는 하고 계시니까."

"그분의 제자는 없나요?"

이번에는 다른 학생이 물었다. 지도교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예전에는 있었지. 바로 나처럼. 그런데, 최근에는 없어."

"왜요?"

"이제 정원, 공원 설계 같은 건 아예 안 하시겠다고 선언하셨고··· 스포츠 분야의 잔디 관리 쪽은 가르쳐줄 수도 있지만, 진짜 노하우를 배우고 싶으면 노팅엄과 5년 계약을 하라고 말하고 다니시니까."

"5년이요?"

학생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분에게 배울 수 있는 건데 까짓거 5년 정도 하면 그만 아닌가. 아니면, 적당히 하다 그만두면 되지 않을까.

지도교수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했다.

"꽤 오래전에 5년을 채우기 전에 도망간 사람이 있었는데, 이쪽 분야가 워낙 좁기도 하고 여러 분야에 영향력도 큰 분이라··· 그 사람은 바로 매장됐다."

매장이라는 말이 참 섬뜩하게 들렸다.

학생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고, 나는 환한 햇빛과 푸르른 잔디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계시네요."

**

"노먼 포레스트라고 하네. 자네들도 사서 고생이야. 별 볼 일 없는 늙은이를 만나러 비행기까지 타다니."

포레스트 교수, 그러니까 노먼의 말에 지도교수가 답했다.

"아닙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브랜든, 몇 년 동안 살이 많이 찐 것 같은데? 몸 관리 잘해야겠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학생들이 놀라서 쑥덕거렸다. 브랜든은 아주 자존심 강한 교수님이었고, 남의 말을 고개까지 숙이면서 고분고분 듣는 걸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설계 수업에서 그의 '평가'를 들은 학생 중에 눈물을 안 글썽인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잘 왔네."

노먼의 인사에 학생들도 이구동성으로 인사했다.

베리타스 대학교에서는 다양한 진로를 보여주기 위해 한 학기에 수차례 특강을 편성했다. 물론, 이번 특강은 특별했다. 일주일간의 실습이 포함돼 있었고, 해외인 영국에서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특강은 보통 신청자를 받았는데 학교의 지원금을 받아 해외로 나가는 거였기에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도 많이 지원했다.

그래서 이곳의 학생들 대부분은 스포츠 잔디관리라는 분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공원이나 정원 설계에 관심이 많았지.

그래도 이 학생들은 모범생이었다.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여기 앉아서 할까? 영국에서 이런 날씨 보기가 정말 힘들거든."

브랜든의 말을 따르며 자리에 앉고, 바로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유난히 한 여학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노먼은 그녀를 빤히 보다가, 특강을 시작했다.

"오늘은 아주 간단한 얘기만 하도록 하겠네. 일단, 세계적으로 스포츠에 사용하는 잔디가 몇 종인지 아는 사람?"

학생들이 고민하는 와중에 유난히 눈을 반짝이던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20종 정도 아닐까요?"

"자신감은 좋았지만, 틀렸어. 2010년 후반에는 30~40종 정도였고, 지금은 훨씬 더 늘어났지. 공식적으로 50~60종 정도 돼."

여학생은 작게 쳇 소리를 내며 다시 집중하는 얼굴을 했다. 그 자신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노먼은 픽 웃고 이어서 말했다.

"골프는 일반적으로 공을 지지할 수 있는 뻣뻣한 잔디를 쓰지. 한지형 잔디인 켄터키 블루그래스, 크리핑 벤트그래스처럼 말이야. 테니스는 라이그래스 쪽을 쓰고, 미식축구는 인조잔디를 쓰지. 하지만, 이쪽 스포츠들은 내가 관심을 끊은 지 꽤 돼서 말이야···."

"그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허, 축구 얘기나 해 보지."

노먼은 브랜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 또 한 번 질문하겠네. 축구 경기장에는 어떤 잔디를 쓸까?"

"전부 천연잔디를 쓰지 않을까요?"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고, 노먼이 말했다.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있나?"

다른 학생들도 그 학생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까 자신 있게 손을 들었던 여학생이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하이브리드 잔디를 씁니다."

"오, 맞았네.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돼서 이제는 웬만한 구단에선 다 하이브리드 잔디를 쓰지. 그럼 하이브리드 잔디가 어떤 식으로 융합돼있는 건지 설명할 수 있나?"

"하이브리드 잔디는 천연잔디 90%. 인조잔디 10% 비율로 인조잔디를 골조처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천연잔디들 사이에 인조잔디를 기둥처럼 세워놓으면 천연잔디끼리 서로 잘 지지하게 돼 경기장 표면이 균일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경기에 들어가면 볼의 불규칙성이 줄어들고, 발목과 무릎의 피로도를 줄일 수 있죠."

노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여학생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이번에는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는 듯이.

노먼이 말했다.

"경기 내에서 장점만 있을까?"

"볼의 불규칙성이 필요한 팀에게는 안 좋은 잔디죠. 골키퍼들이 공을 막기도 힘들어지고요."

노먼이 씩 웃었다.

"···좋군. 이름이 뭔가."

"샬롯 그린이라고 합니다. 저는 교수님의 뒤를 이어 잔디관리사가 되고 싶습니다. 특히, 여기 노팅엄에서요."

"···뭐?"

뒤의 말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거였다. 노먼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학생들, 지도교수, 심지어 특강을 구경하던 김도운마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와중에 샬롯은 그래도 조금 긴장한 얼굴로 노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아하하, 이번에는 찾은 거 아닐까요?"

"모르지··· 그래도, 이런 식으로 첫 수업 때 얘길 꺼내는 학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유쾌한 기분이 됐기에 모처럼 높은 텐션으로 노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마음에 들더라고요. 용기가 있는 게 특히."

잔디 관리는 축구 경기장의 관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잔디 관리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잔디는 살아있는 생물이었고, 날씨를 비롯한 인간이 손대기 힘든 여러 변수에 따라 변화하니까.

그래서 제대로 된 잔디관리인을 구하는 건 구단의 숙제였다.

잔디가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 FA, 중계 매체, 팬들에게 시각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고, 선수들의 경기력을 올려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노먼 덕에 그런 고민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노먼은 모든 이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진짜배기였으니까.

그래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노먼의 나이는 잭슨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7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언제 은퇴하게 될지 몰랐다.

심지어 노먼은 잔디 깎는 기술자들이 따로 있어도 세세한 건 직접 하므로 나이가 더 걱정됐다.

그래서 나는 노먼을 설득해 세계에서 손꼽는 대학교들의 조경 분야 학과에 견학과 특강이 가능하다는 공문을 보냈고, 이번이 네 번째 견학생들이었다.

이런 대학교들에만 제안한 이유가 있었다. 노먼은 자신의 지식까지도 다 물려받을 후계자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먼이 샬롯에 대해 말했다.

"꿈과 현실, 용기와 만용을 구분 못 할 나이야.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지켜보지."

"알겠습니다."

나는 아까 특강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노먼의 냉정한 말이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5년이 장난으로 보이나? 그런 선택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노먼의 얼굴이 워낙 냉막해서 그런지 샬롯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었다.

노먼은 남자든 여자든 상관 안 했지만, 노먼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샬롯은 평균보다 작은 체구의 여학생이었고, 세계 최고의 대학교 중 하나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살면서 거의 공부만 했을 것이다. 대체로 기계를 쓴다지만, 직접 움직여야 할 때도 많고 비가 올 때 삽질을 할 수도 있어야 했다.

지식인과 몸을 쓰는 일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둘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슬프지만 사회의 시선도 조금 달라질 수 있었다. 샬롯은 그 모든 걸 고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학생이니까.

생각 중에 노먼이 말했다.

"머리만 쓸 줄 아는 놈, 몸만 쓸 줄 아는 놈은 필요 없어. 둘 다 쓸 줄 아는 놈이 필요해."

"예."

"그리고, 이 도시에서 오래 살아야 하고. 새로운 종의 잔디를 연구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어야 하고···."

"예. 늘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노먼의 마음에 들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내 말에 노먼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늘 자네와 제임스, 그리고 팬들에게 미안해."

원래 노먼은 자신의 인맥으로 구단 운영을 돕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팀을 말아먹은 전 구단주를 구단에 소개하는 여러모로 끔찍한 일을 하기도 했다. 돈에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셨다면 많은 재산을 축적해 놓을 수 있으셨겠지만, 노먼은 노팅엄으로 오며 재산을 다 기부해버려 돈도 없었다.

그래서 노먼은 내가 노팅엄에 부임한 이후에도 쥐 죽은 듯 조용히 일만 하면서 지냈다.

물론, 회귀 전에는 그 스노우 볼로 제임스가 좋지 않은 선택을 하고 노팅엄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실 거 있나요. 오히려 지금이 훨씬 잘 됐는데. 덕분에 제가 온 거 아닙니까."

나는 일부러 허세를 부리듯 말했다. 노먼이 희미하게 웃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하지만, 그 죄책감은 쉽게 떨칠 수 있는 게 아니야. 조금이라도 구단에 더 이바지해야지. 그러니까, 제대로 된 후계자를 만들어놓고 은퇴할 거네. 은퇴한 후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노팅엄을 최대한 돕겠지만."

노먼 나름의 속죄 방법이라고 이해한 나는 노먼의 다짐을 긍정했다.

"예, 기대 하겠습니다."

샬롯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희미한 이미지의 다른 학생들도 떠올렸다.

견학은 일주일 남았다.

나는 속으로 그들 중에 노먼의 뒤를 이어 노팅엄의 잔디를 맡아줄 사람을 찾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 44. 해외에서 온 손님 (1)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