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44화 (144/245)

< 44. 해외에서 온 손님 (3) >

두 시간이 흘렀다.

샬롯의 친구들은 모두 고주망태가 돼서 오늘 처음 배운 노팅엄의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직장에서 퇴근한 노팅엄의 팬들이 모여 있었다.

샬롯은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샬롯은 유일하게 술을 먹지 않아 친구들의 텐션을 따라갈 수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펍의 주인인 맥켄지의 앞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샬롯은 맥켄지가 요리할 때는 펍을 구경 하고, 돌아오면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은 맥켄지가 요리 중이었기에 샬롯은 찬찬히 펍 안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천장에 붙은 TV에서는 지난주 노팅엄의 경기가 나오고 있었고, 팬들은 선수들을 욕하기도 칭찬하기도 하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서는 다음 시즌 어떤 선수를 영입하면 좋을지에 관한 토론을 늘어놓고 있었고,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이 선수들만큼은 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헤실헤실 웃는 거야?"

그때, 맥켄지가 돌아오며 말을 건넸다. 샬롯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여긴 제가 꿈꾸던 곳이었거든요. 제 상상대로라서 너무 좋아요."

"꿈꾸던 곳?"

"전부 노팅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아요. 맥켄지도 제가 해외 팬이라는 이유로 친구라고 불러주고 있고요."

"뭐··· 그렇지."

"저도 이곳에 소속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정말 좋아요."

맥켄지는 샬롯이 감상에 빠지는 걸 방해하지 않았다. 조용히 빈 잔을 다른 음료수로 채워줄 뿐이었다.

한참 후, 이번에는 레모네이드를 담아준 맥켄지에게 샬롯이 말했다.

"고마워요."

"뭘. 그런데 왜 노팅엄에 온 거야? 너희 친구들은 팬들도 아닌 것 같던데."

"아, 특강 겸 현장체험을 하러 왔어요."

맥켄지가 갸웃하자 샬롯은 자신의 대학교와 학과를 말했고, 함께 노팅엄의 잔디관리사에게 수업을 받는다고 말했다. 맥켄지는 그녀의 대학교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쪽을 신기해했다.

"오··· 그 할아버지가 아직 일하고 있었어? 진작 은퇴한 줄 알았는데."

오랜 기간 팬을 해온 맥켄지는 노먼이 이곳의 잔디관리사를 맡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노먼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는 것이었다.

샬롯은 처음 와 보는 공간, 술에 잔뜩 취한 친구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왠지, 이곳은 좀 편안해도 되는 공간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또 다른 목표가 있어요. 그분의 제자가 되는 거죠."

"제자?"

"네. 노팅엄의 잔디관리사가 돼서, 이곳에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맥켄지는 갸웃하지 않았다.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진지한 눈으로 샬롯을 보다가 물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대단한 건 아녜요. 그냥··· 좀 길게 말해도 돼요?"

"얼마든지. 밤은 길다고."

"그렇다면야···."

샬롯이 입을 열었다.

샬롯은 부모님들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샬롯의 아버지는 미국인이었고, 어머니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외할머니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오셨고, 어머니를 미국인으로 낳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샬롯은 동양인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샬롯의 가족은 도심이 아닌 시골에 가까운 곳에서 살았기에 샬롯은 어린 시절부터 인종차별을 받으면서 자랐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난 여기서 태어났는데."

"흐음···."

설상가상으로 샬롯의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직장을 옮겼다.

그만큼 샬롯 또한 학교를 옮겨야 했고, 어느 학교에서는 적응하고, 어느 학교에서는 적응하지 못하며 나이를 먹었다.

그때부터 샬롯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다행히 샬롯은 공부를 정말 잘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조경학과를 선택했던 이유는 별거 없었다.

어느 도시로 이사하든 샬롯의 집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휘황찬란한 정원은 아니었다. 그저 나무 하나에 잔디밭이 있는 그런 정원이었다.

샬롯은 어느 도시에서든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 앞에 있는 정원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었다. 그게 샬롯이 생각했을 때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 잔디밭에 앉아 바람을 쐬면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잔디밭은 샬롯을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학교에도 제 자리는 없었어요. 하지만, 뭘 찾아야 할지 몰라서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던 와중,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인 에밀리가 <노팅엄 TV>를 보여줬다.

샬롯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축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경기가 있는 날에는 서로 얼굴도 모를 사람들이 어깨동무하고 응원전을 펼쳤다.

신기하고 부러웠다. 그래서 계속 봤다.

노팅엄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샬롯은 그 이야기를 보며 여러 감정을 느꼈고, 노팅엄 TV에서 나오는 현지 팬들과 댓글들을 통해 그들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으로 느끼는 소속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속할 수 있는 조건은 딱 하나뿐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노팅엄 FC를 사랑할 것.

정말 이것뿐이었다. 샬롯은 이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미 조건은 충족하고 있었으니까.

"딱히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명성을 갖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고 싶어요. 내가 있고 싶은 곳을 위해 살고 싶어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노먼 교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틈틈이 준비해 왔어요."

샬롯의 마지막 말에 맥켄지는 아무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샬롯 또한 속이 후련해졌다는 얼굴로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일 더 열심히 해 봐야겠어요. 노먼 교수님을 설득할 수 있게."

*

"늦으면 어떡하지···."

샬롯은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지난 시즌 말, 알렉산더에게 잔뜩 감동하고 샀던 알렉산더의 유니폼이었다.

이 유니폼이라면 노먼 교수님의 감성을 건드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못 하게 생겼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거야···."

이곳은 노팅엄의 훈련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 화장실 앞.

한 번 와봤던 길이었기에 샬롯은 일행에서 빠져 나와 화장실에 들렸고, 나오자마자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했다.

그녀는 구글맵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길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물 안은 그녀가 특히 길을 찾기 힘들어하는 곳이었다. 공부해온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니 까먹어 버렸다.

그때였다.

"애옹."

"응?"

"애오옹."

이상한 소리에 샬롯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종아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어머? 설마 티케니?"

"애옹."

노팅엄의 두 번째 마스코트, 검은 고양이 티케였다. 티케는 앙증맞은 로빈훗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샬롯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쪼그려 앉아 티케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묘하게 익숙한 남자의 짜증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똥고양이. 어딜 간 거야. 어?"

샬롯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 저 끝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노팅엄의 로컬 보이이자 주장, 로드 테일러였다.

놀라기도 전에 로드가 말했다.

"저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걔 좀 잡아주세요. 안 물어요! 약 먹여야 하는데 도망쳤어요!"

티케는 로드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도망치려고 했다. 샬롯은 급해져 일단 티케의 배를 붙잡았다. 그리고.

"아앗! 물잖아요!"

티케에게 물렸다. 로드가 당황해서 급히 뛰어오며 외쳤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다행히 티케는 샬롯을 세게 물지 않았다. 샬롯의 양손에 붙잡힌 티케는 고개를 돌려 샬롯의 팔을 물었다가 샬롯이 인상을 쓰자 자연스럽게 힘을 뺐다. 이어서 샬롯에게 붙잡힌 채로 멀뚱멀뚱 샬롯을 바라봤다.

"야, 티케!"

그리고 티케는 샬롯의 손에서 로드의 손으로 옮겨가자 전력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좀 가만있으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얘 때문에 훈련에 늦을 뻔했어요."

로드는 티케와 샬롯에게 차례로 말했다. 샬롯은 신기해서 가만히 로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선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로드 또한 샬롯을 보다가, 샬롯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며 괜히 티케에게 말을 걸었다.

"약 먹자."

"애오오옹!"

티케의 반항이 심해지는 걸 보며 샬롯은 티케 약 먹이는 걸 돕고, 이렇게 만난 김에 사인도 받고 길도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로드에게 말했다.

"저기, 약 먹이는 거 도와드릴까요?"

"네? 방금 물리기까지 하셨는데."

"고양이는 익숙해서요. 집에서 한 마리 키우거든요."

샬롯은 열 살 무렵 어머니가 데려온 자신의 몸집 절반만 한 털북숭이 거대고양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고양이에게 약도 먹여봤는데, 티케 정도의 작은 고양이는 당연히 쉽다고 생각했다.

"미스터 테일러가 먹일 건가요. 아니면 제가 먹일까요?"

로드는 대답 없이 멍한 눈으로 샬롯을 빤히 바라봤다.

샬롯은 시간이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먹일게요. 잡고 있어 주세요. 약은 어딨어요?"

"어, 여기요."

로드는 하얀 알약 하나를 꺼냈다. 샬롯은 그걸 보며 말했다.

"약 먹이기 힘드시면 간식이랑 같이 주는 것도 좋아요. 아니면 습식 사료랑 같이요.""아, 넵."

로드가 티케를 붙잡았고, 샬롯은 티케의 양 볼을 눌러 입을 벌리고, 약을 혀 안쪽에 놓고 왔다. 그리고 티케의 입을 꽉 붙잡고, 티케의 목젖 부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티케. 잘 먹을 수 있지?"

샬롯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티케를 계속 쓰다듬었고, 잠깐 반항하던 티케는 곧 얌전해져 알약을 꿀꺽 삼켰다.

샬롯은 싱긋 웃으며 티케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로드에게서도 떨어졌다. 로드는 떨어지는 샬롯을 아쉬운 듯 보며 말했다.

"어···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에요."

샬롯은 이어서 아까 생각해놓은 부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로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런데 누구세요? 제가 훈련장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당신은 처음 봐요. 지금 시간에는 관계자 말고는 들어올 수가 없는데··· 꿈인가··· 알렉산더의 옷을 입은 내 이상···."

로드의 눈에는 점점 의심이 싹터 오르기 시작했다. 샬롯은 역시나 시간이 없었기에 로드의 뒷말을 끊으며 바로 말했다.

"베리타스 대학교에서 견학 온 학생이에요. 길을 잃어서요.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겸사겸사 사인도 해 주시면 좋고요. 팬이거든요."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로드는 허둥지둥하며 샬롯에게 사인을 해 주고, 티케를 품에 안은 채로 샬롯이 말한 미디어실로 향했다.

"방향만 알려주셔도 됐는데···."

"아니에요. 티케 약 먹이는 거 도와주셨는데 당연하죠. 훈련까지는 아직 시간도 많고, 괜찮습니다!"

뭔가 어색할 정도로 씩씩한 로드를 보며 샬롯은 살짝 웃었다.

노팅엄 TV에서 나오는 평소 모범생 같이 잔소리를 하다가 허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연출인 줄 알았는데 실제였다는 게 괜히 기분이 좋았다.

로드가 물었다.

"그럼··· 일주일 이따 가시는 거예요?"

"음,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고요? 왜요?"

로드는 질문이 참 많았다.

샬롯은 그래도 화면으로만 보던 선수를 봐서 기뻤기에 성실하게 대답해줬다.

"노먼 포레스트 교수님 아시죠?"

"아, 잔디관리사님이요."

"네. 제가 그분 제자가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여기 취직하는 게 목표예요."

"정말요?"

로드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로드는 큼큼하고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 제자가 되는 거 잘 진행되고 있나요?"

"모르겠어요. 노먼 교수님이 일단 거절하셔서요."

"대체 왜요?"

로드가 다급히 묻자 샬롯이 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 더 어필해보려고요."

"응원할게요."

"어··· 고마워요."

어느새 둘은 미디어실 앞에 도착했다. 샬롯은 강의실 안이 아직 시끌벅적하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노먼 교수님이 안 오신 것 같았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인도 정말 감사해요."

"아··· 네."

"그럼, 가볼게요."

샬롯은 그렇게 인사하고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로드가 말했다.

"저기···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네?"

로드가 순간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허겁지겁 말했다.

"흑심이 있는 건 아니고, 꿈을 목표로 하는 모습이 정말 멋져서요. 응원하고 싶어졌달까요? 여기 머무시는 기간 동안 노팅엄을 안내해드릴 수도 있고, 노팅엄에 관해 궁금한 것도 대답해드릴 수 있는데. 선수들이 어떤 잔디를 좋아하는지도··· 뭐든···."

샬롯은 순간 당황했다가 흑심이 없다는 말을 듣고, 로드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선수, 그것도 주장의 도움이라면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폰 주세요. 저는 오늘 점심부터 시간 되는데, 테일러는 언제부터 시간 돼요?"

< 44. 해외에서 온 손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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