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기대감 (2) >
잭슨은 사흘 전, 김도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드레싱룸 문 앞에 서 있었다.
*
챔피언십리그 1위 팀인 리즈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경기가 끝난 직후 김도운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왔었다.
"잭슨! 오늘 경기 내내 벤치로 뛰어가고 싶은 걸 참았어요. 잭슨이 노팅엄에 온 후 최고의 경기였던 것 같아요. 리즈를 잡다니!"
"감사합니다."
"이제 승격 직행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리그 2위와 4점 차이밖에 안 나요."
김도운이 흥분할 만큼 엄청난 성과였다. 잭슨 또한 1위를 잡을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했었다. 국가대표에 다녀온 선수들이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잭슨은 100% 기뻐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퍼져버린 여섯 명의 선수를 봐 버린 후였기 때문이었다.
라이언, 로드, 할리, 킹, 헌터 형제.
이들은 경기 시간 60분부터도 급격한 체력 저하를 보였다.
잭슨은 부상이 우려되는 로드와 라이언, 그리고 테오 헌터를 교체로 빼야 했다. 전술적인 결정이 아닌 선수 보호를 위한 결정이었다.
운이 좋아 그 이후 실점하지 않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셋은 교체로 빼 줬는데도 마치 풀타임을 뛴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체력적인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잭슨의 걱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김도운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요?"
"예···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좀 끼얹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도운이 고개를 갸웃하기도 전에 잭슨이 말했다. 어차피 불편한 얘기, 빨리해 버리자는 생각에서.
"지난주 국가대표에 다녀온 여섯 명의 선수에게 휴가를 주고 싶습니다."
"예?"
"확실한 건 팀 닥터를 비롯한 스포츠과학팀의 측정과 검사를 통해 나오겠지만, 뭐··· 겉으로만 봐도 방전된 게 보입니다. 지금 그 여섯은 퇴근도 못 하고 파스칼과 폴린의 집중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잭슨의 말에 김도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승격 직행이 가능할 것 같다며 잔뜩 기대해서 왔는데, 잭슨에게 '안 된다.'라는 말을 들어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김도운이 말했다.
"빌어먹을 국가대표 놈들 때문이군요."
"뭐··· 어쩔 수 없지요. 월드컵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요. FA 컵이랑 리그 컵까지 버리면서 체력을 온존해놨는데, 그걸 홀랑 다 써버린 거잖아요. 그쪽에서요.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잭슨은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예전에 만났던 단장이나 구단주였다면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전후 관계를 볼 줄은 알지만, 자신을 어떻게든 쥐어 짜내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김도운은 달랐다. 마치 어떻게 말하면 자신의 마음이 가장 편해지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북아메리카까지 장거리 비행에 풀 타임 출전, 그리고 국가대표팀 내의 월드컵 최종명단을 향한 신경전까지··· 애들 체력소모가 심할 거라고는 생각했었어요. 오늘 경기 보고 애들이 젊어서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요."
"예."
"좋아요. 이해했어요. 그럼 어떤 식으로 도와드리면 될까요?"
대화가 빨라서 좋았다.
"일단, 남은 시즌 운영 계획에 대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예. 일단 프리미어리그 직행 승격은 사실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네?"
김도운이 당황하는 걸 보며 잭슨은 계속 말했다.
"1위 리즈 유나이티드는 오늘 이겼어도 우리와 승점이 6점이나 차이나죠. 2위 아스톤빌라도 우리와 4점 차이가 납니다. 득실차도 10점 넘게 나죠. 앞으로 전승을 한다고 해도, 리즈와 아스톤빌라가 패배하지 않으면 자력 승격은 불가능합니다."
"그 두 팀이 패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낮습니다. 앞으로 남은 경기는 7경기. 두 팀의 남은 상대들은 전부 6위권 밖의 팀입니다. 강등권에 있는 팀들의 강등되지 않겠다는 몸부림 말고는 믿을 게 없습니다."
반면 노팅엄은 7경기 동안 현 리그 4위, 5위, 6위를 차례로 만났다. 다들 적어도 플레이오프에 나가기 위해 동기부여가 잘 되어있는 팀들이었다.
상위 팀이 실수하기만 기다리는 건 수동적인 접근법이었다. 그쪽이 실수할지라도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잭슨은 한발 먼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김도운은 잭슨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고 말했다.
"플레이오프를 노리겠다는 거죠?"
"맞습니다.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만한 팀들을 알렉산더를 비롯한 전략분석팀들이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에 따른 전술을 준비하고 있고요. 물론, 주전 선수들이 이렇게 체력이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요."
플레이오프 진출이 목표가 되면 2위가 아닌 6위 안에 들어가는 게 목표가 된다. 좀 더 여유 있게 선수단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도운이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원래 후보 선수들을 쓸 계획도 있으셨겠네요. 플레이오프는 총 4경기니까."
"이렇게 극단적으로 쓸 생각은 없었지만요. 원래는 적당히 섞어 쓰면서 전술 노출을 줄이고··· 전부 승리하는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잭슨의 허세 따윈 하나도 없는 말에 김도운이 눈을 크게 떴다.
잭슨은 진심이었다. 계획대로라면 가능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잭슨은 축구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경기 도중 계획을 수정했다.
김도운이 훨씬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도울 건 뭐죠? 일단 언론과 팬들의 민심 관리를 해야 하겠고··· 후보 선수들의 동기부여도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오. 예. 필요합니다. 그쪽으로 몇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김도운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첩을 꺼냈다. 잭슨은 요구사항을 몇 가지 말해주기 시작했다.
*
그렇게 잭슨은 다음 날, 로드와 라이언, 테오에게 5일간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고, 할리와 테디, 킹에게는 3일간 휴가를 다녀오라고 말하며 훈련장에서 쫓아냈다.
여섯은 우리 없이 되겠냐고 걱정했지만, 잭슨은 강행했다.
그렇게 남은 선수들에 부족한 인원을 유소년에서 끌어와 훈련을 진행했다.
하지만, 후보 선수들은 기대한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후보 선수로서 거의 한 시즌을 다 채웠기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잭슨은 오늘 드레싱룸에 여섯 명의 후보 선수를 모았다.
회상을 마친 잭슨이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고, 심호흡한 뒤 문을 열었다.
여섯 명의 후보 선수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핀레이, 데클란, 오스카, 프레디는 작년 여름에 영입한 선수였고, 빌과 행크는 이번 겨울 이적시장 막바지에 뎁스를 위해 영입한 선수였다. 원래 루크라는 공격수도 있었지만, 김도운과 상의 후 조용히 팀을 떠났었다.
잭슨은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간이들아. 내가 왜 불렀는지 알겠지?"
이들이 주축으로 상대할 다음 팀의 이름은 버튼 FC. 리그 18위의 팀이었다.
공격에 방점을 찍어줄 미할리스와 세자르, 공격 전개의 핵심인 루카는 그대로 있었기에 이들이 평소 실력만 보여주면 충분한 상대였다.
그다음 팀은 레딩이라는 리그 4위의 유력한 플레이오프 결승전 상대였지만.
그런데 이들은 후보로서의 습관이 남아있는 건지 훈련 내내 수동적이었다. 경기에서도 그렇게 뛴다면 18위 팀도 이기기 힘들었다.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김도운에게 몇 가지 부탁도 한 거였고.
두 팀을 상대로 승점 3점을 따내는 게 잭슨의 계획이었기에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잭슨의 말을 들은 선수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잭슨은 훈련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직설적으로 얘기했기 때문에 사흘 동안 가장 많이 혼났던 이들은 전부 잭슨이 자신들의 훈련 태도에 불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핀레이. 중앙수비수. 11경기 출전, 선발 출전은 3회. 출전한 경기의 평균 실점 1.4점."
잭슨의 말에 한 선수가 고개를 들었다. 잭슨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데클란. 역시 중앙수비수. 13경기 출전, 선발 출전은 2회. 출전한 경기의 평균 실점은 1.2점. 오스카. 왼쪽 풀백. 10경기 출전, 선발 출전은 4회······."
여섯 명의 선수들은 자신의 기록을 줄줄 읊는 잭슨을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잭슨이 행크까지 이야기를 마치니 어느새 여섯 명의 선수들은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게 너희들의 기록이다. 물어볼 게 있다. 너희들이 만약 축구 팬이라면 이런 기록을 가진 선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선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씁쓸한 얼굴을 했다. 핀레이가 대표로 말했다.
"아뇨."
"그럼 또 묻겠다. 지금이 아닌 시즌이 끝난 후에는 너희를 기억할 수 있을까? 경기에 출전시켜주겠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하는 너희들을?"
선수들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오스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한 경기밖에 못 뛰지 않습니까. 그 뒤면 저희 자리로 돌아갈 텐데요."
잭슨은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치켜들었던 오스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잭슨은 '최소 두 경기 선발 확정에 리그 종료까지 중용할 생각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동기부여는 하나 마나 못하니까.
"그럼, 너희는 너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섯 명의 선수를 순수하게 실력으로 이길 수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잭슨이 계속 물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2부 리그에서 뛰면서 월드컵까지 진출하는 저 재능들을 이길 수 있냐는 거다."
여섯 명, 그중에서 여름에 온 네 명의 표정이 특히 나빠졌다.
이 넷은 시즌이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노팅엄의 주전 선수들과 큰 기량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즌 초반에는 잭슨도 선수들을 번갈아 가며 썼었다.
하지만, 시즌이 진행되고 주전 선수들이 국가대표에 선발되며 그 차이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난 여기서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다. 너희들은 주전 경쟁에서 졌다. 아마 이번 시즌이 끝나면 대부분 이적을 하게 되겠지. 그게 너희들과 내가 겪어온 축구계의 생리니까."
여섯 명의 선수 중 가장 어린 선수가 스물다섯이었다. 다들 프로 축구 선수 생활을 해볼 만큼 해본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잭슨의 계속되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오스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감독 생활을 이십 년 넘게 해 오는 동안, 수많은 후보 선수를 봐 왔다. 다들 너희들과 똑같았지. 주전 경쟁에서 지면 적당히 생활하다가 시즌이 끝나면 구단을 떠나고··· 팬들도 금세 녀석들을 잊고···."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진 건 진 거지만··· 적어도, 너희들의 커리어에 남을 한 줄을 의미 있게 바꿀 기회와 시간이 남아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왜 그 기회마저 일부러 버리냐고 묻고 싶었다."
오스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선수들이 조용해졌다. 그때, 잭슨이 말했다.
"존."
"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석코치가 드레싱룸에 들어왔다. 존이 드레싱룸에 설치된 대형 디스플레이를 켰고, 잭슨이 미리 말한 영상을 재생했다. 여섯 명의 선수는 자연스럽게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김도운이 마리아에게 부탁해 가져다준 영상이었다.
먼저, 노팅엄 머플러를 두른 아저씨 하나가 나왔다.
-핀레이 선수에 대해 아시나요?
-좋은 선수죠. 경쟁자가 로드와 킹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팀의 주전으로 부족하지 않은 선수죠. 개인적으로 킹보다 더 침착한 플레이를 보여줘서 더 많은 경기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무슨···,"
핀레이의 물음에 잭슨은 턱 끝으로 영상을 가리키며 영상에나 집중하라는 시늉을 했다. 핀레이에 관해서 모르면 말할 수 없는 내용 들이 줄줄 나왔다.
-팬 서비스도 좋았어요. 6라운드 경기였나? 유니폼에만 사인해달라고 하니까, 공은 없냐면서 막 찾고 그랬었는데.
핀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핀레이에 관한 인터뷰가 몇 개 더 이어졌고, 이어서 화면이 바뀌더니 오스카에 관한 인터뷰도 나왔다.
이번에는 노팅엄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오스카 선수에 대해 아시나요?
-그럼요! 8라운드 경기에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은 선수잖아요. 얼마나 슛이 강했는지, 속이 정말 시원해졌었거든요. 루카와 라이언이 잘한다지만, 더 자주 나와도 좋을 선수라고 생각해요.
오스카는 영상을 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선수마다 인터뷰가 몇 개씩 있었고, 선수들은 영상을 끝까지 봤다.
검은 화면이 나왔는데도 여전히 말 없는 선수들에게 잭슨이 말했다.
"축구 팬들은 시즌 중에는 23명의 선수를 다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며 차근차근 잊어버리지. 그들이 끝까지 기억하는 선수들은 자신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선수뿐이다. 예를 들면··· 프리미어리그 승격 같은 거 말이다."
잭슨이 진지한 눈으로 선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았다.
"구단 역사상 첫 프리미어리그 승격에 이바지한다면, 너희들의 일 년은 헛된 게 아니게 될 거다. 이곳의 팬이라면 너희들을 기억해 줄 거다. 단장 또한, 프리미어리그에 승격만 한다면 너희들 모두를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을 만들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선수들의 눈이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잭슨은 목소리에 힘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시기다. 기회를 주겠다. 아니, 기회가 생겼다. 너희의 잠재력을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는 멍청한 내게 경기장에서 한 방 먹일 기회 말이다."
프로 선수들은 모두 돈만 바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 선수들에게 돈만큼 중요한 게 바로 명예와 인정이었다.
"너희들의 이름은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남길 수 있길 바라겠다. 그럼, 내일 훈련에서 보자."
잭슨은 그렇게 말하고 드레싱룸을 나왔다. 선수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잭슨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선수들의 표정이 무척 좋았기 때문이었다.
< 45. 기대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