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기대감 (3) >
바다색의 촬영장을 배경으로 정장을 입은 세 중년 남자가 테이블에 앉은 채로 화면을 향해 인사했다. 가운데 있는 밝은 인상의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챔피언십리그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주의 경기>에서는 지지난 주, 리그 1위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고 반등하나 했으나, 이번 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노팅엄 FC의 경기를 분석해보려고 합니다."
화면에는 자막으로 스포츠 아나운서 게리 블랑캣, 축구 해설자 데니스 캐머런, 스포츠 기자 제럴드 스미스라고 나오고 있었다.
"으, 벌써 1분이나 지났네요. 디렉터, 우리 편성 시간 좀 늘려줘요. 제럴드랑 처음 보는 사인데 인사할 시간도 없잖아요."
게리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투정에 웃는 목소리의 배경음이 깔렸다.
게리가 말했다.
"아무튼, 이번 방송에 게스트로 모신 BBC 스포츠의 챔피언십리그 전문 기자, 제럴드 스미스입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하하, 우리 방송이 잡담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아니니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게요. 양해해 줘요."
"괜찮습니다."
게리가 씩 웃고, 반대편을 보며 말했다.
"데니스? 시작해 줄래요?"
"난 이제 소개도 안 해 주나?"
해설할 때와는 다르게 데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고, 게리 또한 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청자분들이 데니스는 다 알잖아요. 이 방송 맡은 지 1년이나 됐는데."
"아이고, 잘 넘어가네. 아무튼, 바로 들어가 보죠."
데니스가 순식간에 진지한 톤으로 목소리를 바꿔버리자 데니스와 제럴드가 가볍게 웃었다. 데니스는 자신 옆에 있는 투명한 디스플레이를 터치했다.
노팅엄 FC – 버튼 FC
0- 2
두 팀의 스코어를 시작으로 점유율, 슈팅 숫자, 유효 슈팅 숫자, 기회 창출 등의 여러 수치가 주르륵 나왔다.
누가 봐도 버튼 FC라는 팀이 훨씬 더 좋은 경기를 보여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코어와 기록만 봐도 많은 팬이 왜 이 이번 경기에 의문을 가졌는지 알 수 있죠. 노팅엄은 리그 3위, 버튼은 리그 18위였어요. 노팅엄이 고의로 패배했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경기력이 나빴거든요. 선수 선발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이 많았고요."
"데니스, 그런 말은 좀···."
"여론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잭슨은 진심으로 이기려고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게 잘되지 않았을 뿐."
데니스의 말에 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럴드는 진지한 얼굴로 데니스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데니스가 말했다.
"제가 준비한 건, 경기 초반 15분을 편집한 영상이에요. 일단··· 보시죠."
디스플레이에 경기 영상이 재생됐다.
전반전 3분. 노팅엄의 선수들이 버튼의 페널티박스 근처에서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데니스는 루카가 공을 잡는 순간 화면을 멈추고, 디스플레이 위에 손가락을 움직여 빨간 선을 그으며 설명했다.
"자, 여기서 루카가 공을 잡자마자 세자르와 행크가 거리를 두고 동시에 뛰어요. 루카는 둘 중에 수비수들이 덜 달라붙은 후보 공격수, 행크에게 패스했죠. 이렇게."
다시 영상이 재생됐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알다시피 행크는 완벽한 일대일 찬스를 맞이했음에도 골대 한참 위로 넘어가는 슛을 하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행크는 작년에 리그 10위를 했던 아스톤빌라에서 리그 11골을 넣었던 선수예요. 올해는 주전 경쟁에서 밀렸지만, 기본기는 탄탄한 선수라고요. 행크의 이어지는 실수들을 보면··· 마치 제가 선수 시절 때, 지나칠 정도로 의욕이 넘쳤던 경기가 떠올라요."
"그 경기 결과도 나빴나요?"
"네. 완전히 엉망이었어요. 축구 선수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해요. 그걸 넘어서면··· 이렇게, 일대일 찬스를 네 번 연속으로 날려 먹게 되죠. 또, 행크 뿐만이 아니에요."
데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중앙수비수 듀오의 플레이 영상을 보여줬다. 먼저, 핀레이가 이상한 타이밍에 슬라이딩 태클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핀레이와 데클란, 특히 핀레이는 장점이었던 침착한 수비는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전반 10분 무리한 태클로 옐로카드를 받았죠. 그 이후에는 퇴장을 안 당하려고 소극적인 플레이만 했고요. 그에 영향을 받은 데클란은··· 뭐, 이렇게 자동문이 돼서 상대 공격수에게 길을 내줬죠. 그렇게, 전반 20분에 노팅엄이 첫 실점을 하죠."
데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오스카가 무리한 오버래핑을 주구장창 반복하다가 한 골 더 먹혔고, 프레디와 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번 경기의 패인은 파격적으로 투입했던 후보 선수 여섯이 제 기량의 반의반도 못 발휘해서예요."
데니스의 마지막 문장은 무척이나 냉랭하게 들렸다. 데니스가 덧붙였다.
"잭슨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감독이에요. 이번 경기를 보면서 후보 선수들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후보 선수들과 주전 선수들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전술을 불과 일주일 만에 구상해 냈어요. 방금 말한 후보 선수들이 아마추어 선수들도 안 할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이번 경기에서 이겼을 겁니다."
"그렇군요. 데니스는 이번 경기의 패인을 그렇게 보는군요. 그럼···."
데니스의 말이 끝나고, 게리가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제럴드의 분석으로 이어가려고 했지만, 제럴드가 말했다.
"잭슨이 매력적인 감독이라니 동의하기 어렵군요."
제럴드의 날카로울 수 있는 말에 중간에 낀 게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불렀다.
"제럴드?"
"아··· 죄송합니다. 조금 흥분했군요. 하지만, 제 의견은 그대롭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목소리가 너무 날카로웠다는 걸 깨달은 제럴드가 몇 번 헛기침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경기는 잭슨 감독의 완벽한 실패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흥미롭군요. 데니스와 반대 의견이 나왔어요."
"들어보죠."
게리와 데니스의 말에 제럴드는 자신의 쪽에 있는 디스플레이를 눌렀다. 지난 경기의 선수명단이었다.
"언제 선수 선발을 하고, 체력 온존을 할지··· 어떻게 팀을 운영해야 할지 정하는 건 감독의 역량입니다. 이번 경기에서 후보 선수들을 절반 이상 기용하면 안 됐습니다. 1위를 잡고, 기세를 탔으니 조금 무리하는 한이 있어도 주전 선수를 기용했어야죠."
제럴드는 그렇게 말하며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특이한 모양의 순위표가 나왔다.
"지난주 순위표와 이번 라운드가 끝난 후, 순위표입니다. 2위 아스톤빌라와 노팅엄의 승점 격차를 보세요. 그대로죠? 오늘 주전을 다 내보냈어도 그대로였을까요?"
아스톤빌라 또한 노팅엄처럼 이번 경기에서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다.
"승점 1점 차에서 도박을 하는 것과 승점 4점 차에서 도박을 하는 건 엄연히 다릅니다. 선수들의 체력 문제로 후보 선수들을 쓸 거였으면, 적어도 승점 차를 한 경기 내로 좁히고 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니스가 말했다.
"그건 너무 선수들을 생각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또, 아스톤빌라가 언제 질 줄 알고요? 저는 잭슨 감독이 적절한 시기에 후보 선수들을 투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 명의 선수는 올해 정말 힘든 일정을 보냈어요."
"출전 시간을 조정하는 식으로 관리해주면 되죠."
"출전 시간만 조정한다고 체력이 온존되는 게 아닙니다. 평소 훈련도 그렇고, 정신적인 부분의 체력은 완벽한 휴가만이 해결 방법입니다."
데니스와 제럴드가 날카롭게 말을 세웠다.
어색하게 웃던 아나운서 게리가 둘을 중재하기 위해 말했다.
"워워, 두 분 잠깐 심호흡하시고, 한 명씩 차례로 말해보죠. 제럴드, 계속 얘기해볼래요?"
제럴드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 데니스에게 말했다.
"···선수들의 체력 관리에 관련해서는 제가 실언했습니다. 데니스, 죄송합니다. 덕분에 새로운 걸 알았습니다."
데니스는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적 있는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선수였다. 데니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지만, 잭슨 감독이 잘못 판단한 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저는 잭슨이 10년 전에 똑같이 실수하는 걸 봤으니까요."
제럴드의 말에 게리가 눈을 반짝였다. 10년 전이라는 말은 자신이 아는 한에서 처음 듣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데니스 또한 팔짱을 끼며 진지한 눈을 했다.
게리가 물었다.
"10년 전요?"
"예. 제 고향 팀인 루튼 타운이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앞두고 있었을 때, 잭슨은 비슷한 일을 벌였습니다. 시즌 중반, 애매한 1위를 달리고 있을 때 후보 선수들의 기량도 괜찮다며 적극적으로 투입했고, 팀은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습니다."
게리와 데니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제럴드가 억울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 시즌이 끝나고, 전문가들과 다른 감독들, 그리고 잭슨 밑에서 뛰던 선수들이 얘기했습니다. '체력 관리를 위한 거였다면, 압도적인 1위를 만들어 놓은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라고요.
하지만, 잭슨은 '후보 선수들을 그 시기부터 기용하지 않으면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고, 주전 선수들의 체력 관리도 시즌 전체를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잭슨 감독이 노팅엄을 맡기 전, 25년 동안의 경력 중 가장 성적이 좋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물 좀 마시고 얘기하세요."
제럴드의 목에서 쉰 소리가 나서 스탭이 물을 가져다 줬다. 제럴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선수들은 사람입니다. 후보 선수로 뛰다 갑자기 선발로 뛰게 되면 아까 데니스가 말한 것처럼 더 잘해보려고 흥분하고,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위축됩니다. 그런데 잭슨 감독의 머릿속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이상만 가득 들어있습니다."
루튼 타운은 그 이후, 잭슨을 경질했고 2부 리그 하위권을 전전하다가 3부 리그 토박이가 되어버렸다. 제럴드는 속에 담고 있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전 노팅엄의 단장 김도운과 구단주 제임스 휘팅엄은 정말 높게 평가합니다. 프리미어리그의 팀을 맡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에요."
"킴 단장은 그렇다 치고··· 휘팅엄 구단주도요?"
"예. 휘팅엄은 희망도 없는 팀을 오직 애정으로 인수 하고, 구단에 자금만 지원한 후 유능한 단장에게 다 맡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돈을 쓸데없는 곳이 아니라 팬들과 선수들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죠. 아주 이상적인 구단주입니다.
그리고, 킴 단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수 보는 눈은 미친 수준이고, 그가 벌인 각종 프로젝트는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나이를 속인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예, 말씀하세요."
"잭슨은 둘 덕에 고평가받고 있습니다. 잭슨은 딱 2부 리그 감독일 뿐입니다. 이거 보시죠."
긴 말끝에 제럴드가 디스플레이를 손가락으로 눌렀고,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화면이었다.
잭슨 감독의 인터뷰 사진이 있었고, 제목이 보였다.
<다음 경기에도 선발명단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제럴드가 말했다.
"잭슨은 10년 전과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럴드가 화면을 넘겼다.
김도운의 인터뷰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논란이 될 건 알고 있었다. 이미 나와 대화를 통해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가 필요했고, 후보 선수들로도 충분히 승점을 따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김도운 단장이 이런 인터뷰를 내긴 했지만, 김도운 단장도 만약에 이번 시즌에 승격에 실패한다면 결단을 내려야 할 겁니다. 고집쟁이 잭슨이 이 유망한 팀을 망치기 전에요."
**
"조용하네요···."
"그렇지?"
포레스트 펍의 사장, 사라와 알렉스는 펍 안의 분위기를 보며 작게 얘길 나누고 있었다.
리그 4위 레딩과의 경기가 시작하기 불과 5분 전이었지만, 펍 안은 그저 맥주를 홀짝이거나 감자튀김을 씹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펍 안에 비어있는 테이블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경기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최근, 잭슨의 선택을 비판하는 전문가들이 <이 주의 분석>을 기점으로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팬들이 전문가들에게 바로 휘둘리는 건 아니었다. 팬들은 잭슨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여준 훌륭한 리더십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 후보 선수들을 내보내는 그의 판단이 불안하긴 하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믿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팬들은 이번 경기에서 적어도 비기길 바랐다. 잭슨의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십 년, 많으면 수십 년 동안 축구를 봐온 팬들은 알고 있었다. 후보 선수들이 괜히 후보 선수가 아니라는 걸.
그래서 경기 시작 전인데 이런 우울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라가 말했다.
"진짜 비기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맞아. 또 지면 분위기가 많이 나빠질 테니까···."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그동안 노팅엄을 응원하며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봤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였던 시즌이 분명 있었다. 팬들이 지지해주는 시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건 간사해서 그동안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한두 번 지기 시작하면 열이 받고, 그게 계속되면 팀을 비난하게 된다.
알렉스는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제발 좀, 오늘 비기기라도 해 달라고.
< 45. 기대감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