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52화 (152/245)

< 46. 28년 17일 (2) >

"미안한데 끌게요."

잭슨의 부인 마사가 TV를 꺼 버렸다. 거실을 가득 채우던 제럴드와 데니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잭슨은 씁쓸하게 미소지었고, 마사는 작게 투덜거렸다.

"저 사람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재수 없는 소리나 하고···."

"하도 들어서 신경도 안 쓰여요."

잭슨은 마사를 위로하기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마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요. 그리고, 솔직히 당신도 기분이 나쁠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잭슨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잭슨은 프로 축구 감독이었기에 오직 결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그만두던가.

"내일 기자회견 있다고 했죠? 아침 든든하게 먹고 나가야겠네요."

"일찍 안 일어나도 된다니까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보나 마나 기자들이 또 물어뜯을 거 아녜요? 내가 축구 하루 이틀 본 줄 알아요?"

마사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에 잭슨은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됐어요. 간지럽게. 아무튼, 이제 슬슬 잘 준비해야죠. 먼저 씻을 거예요?"

잭슨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사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내용이라는 듯한 지나가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모레 경기에 애들 가족이 온다고 해서 같이 경기 보려고요."

잭슨과 마사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과 딸 모두 훌륭하게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손자 둘에 손녀 하나가 있었다.

마사가 말하는 애들 가족이라는 건 이들 전부를 말하는 것이었다.

잭슨이 처음으로 불편한 표정을 했다.

"안 돼요. 오지 말라고 하세요."

"오고 싶다고 그러던데··· 플레이오프 최종전까지 휴가도 냈다고···."

"내가 부담돼요. 다 끝나고 보자고··· 아니다. 그냥 휴가 낸 김에 가족여행이라도 가라고 해요."

잭슨은 다 끝나고 보자고 할 수가 없었다.

플레이오프 최종전에 진출을 못 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고,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패할 가능성도 있었다. 축구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니까.

무엇보다 잭슨은 비참한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잭슨이 워낙 단호하게 나와 마사는 잭슨을 더 설득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잭슨이 말했다.

"씻으러 갈게요."

그때, 마사가 말했다.

"내가 축구는 잘 모르지만요··· 잭슨. 아까 그 기자가 말한 변화무쌍한 전술을 이번에도 사용할 거죠? 또 그러다가 질 거라고 하니까 걱정돼서···."

잭슨은 마사를 가만히 쳐다봤다.

처음에는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새로운 무기가 있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인생의 동반자였던 마사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잭슨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잭슨이 입을 열었다.

"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승리할 확률이 가장 높은 길이니까요."

**

미들즈브러의 훈련장 내에 기자회견을 위한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미들즈브러의 감독과 선수 하나, 그리고 잭슨과 할리가 기자들을 상대로 열심히 인터뷰하고 있었다.

"하하하, 할리 선수는 정말 자신이 있나 보네요."

"당연하죠. 시즌 중에 1승 1패였다지만 우리는 최근에 6연승이나 했다고요. 그러니까 이번 경기도 좋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을 거예요."

미들즈브러의 선수, 감독을 넘어 할리와 잭슨이 번갈아 가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해주고 있었다.

기자들은 이번 경기에 임하는 각오를 물었고, 이번 시즌 상대전적이 1승 1패라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는 다음 경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선수를 데려오는 게 관례였다. 할리는 잭슨이 자신을 데리고 나와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잔뜩 긴장했었으나 지금은 긴장을 풀고 평소대로 편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한 기자가 새로운 질문을 했다.

"그러면 할리 선수. 최근, 잭슨 감독님에 관한 논란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 그거요···."

"제 논란을 굳이 할리에게 물어볼 필요 없죠.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할리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려는 순간 잭슨이 막았다. 할리가 살짝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잭슨의 눈빛에 바로 딴청을 피웠다.

기자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럼, 제럴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잭슨은 이미 대답을 준비해왔었다.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 시절, 제럴드와 나의 팀이었던 루튼 타운의 승격을 못 이룬 건 아직도 내 가슴에 후회로 남아있습니다."

기자들의 눈이 반짝이며 손이 빨라졌다. 프리미어리그가 끝났기에 기사 소재라고는 월드컵 준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FA컵 결승전밖에 없었기에 다들 가장 빨리 기사를 올리려고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난 그 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났고 그 팀과의 관계도 끝났죠. 그러니까 지금은 노팅엄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잭슨은 머리가 아파 왔다. 이제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별의별 질문을 다 하겠지.

하지만, 그 순간 잭슨의 옆에 가만히 서 있던 김도운이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할 말은 다 했습니다."

기자들이 아우성쳤다.

"저기, 킴 단장님?"

"아직 질문이 남았는데요!"

김도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할리와 잭슨에게 어서 나가라고 눈짓했다. 할리는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빠져나갔고 잭슨 또한 자신들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보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

기자회견장에서 빠져나온 김도운과 잭슨은 노팅엄 FC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 원정팀의 드레싱룸에서 다시 만났다. 선수들의 유니폼부터 축구화, 정강이 보호대까지. 내일 경기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잭슨을 보며 김도운이 말했다.

"할 말 다 했고, 추가 질문은 쓸데없는 게 뻔하니까 그만하겠다고 했어요."

"논란이 될 겁니다. 기자들한테 나쁜 이미지도 박힐 수 있고···."

"제가 워낙 이미지가 좋아서 한두 번은 괜찮아요. 저도 딱 오늘만 이러는 거예요. 그리고 정 안되면 나중에 저기 있는 사람들에게 술이라도 사 주면서 기분 풀어주죠."

잭슨은 김도운의 오늘만이라는 말을 이해했다. 내일 경기에서 승리해 여론을 아예 바뀔 거라고 믿는 거였다.

기쁘긴 했지만, 잭슨은 가슴에 무거운 게 살짝 얹히는 느낌을 받았다.

잭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언론담당자는 어쩌고 직접···."

"우리 언론담당자한테 이런 거 시키면 '단장님! 저 죽이려고 합니까?'라고 말할 게 뻔한데요. 저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 말리려면 저나 제임스 정도는 나와야죠."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심 불안했다.

김도운은 늘 이런 자리에서 자기를 격려하고 응원해줬었다.

늘 자신만만한 대답을 해줬었지만, 경기가 막상 내일로 다가오니 조금은 불안해졌다. 그래서 잭슨은 대답할 말을 준비하며 김도운의 격려를 기다렸다.

하지만, 김도운의 입에서 나온 건 격려가 아니었다.

"아, 물어볼 게 있었는데···."

"예? 예."

잭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도운은 잭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잭슨은 깜짝 파티를 좋아하나요?"

"예?"

"그냥 대답해주세요."

깜짝 파티 같은 건 젊을 때, 마사에게 받아본 적이 있었다. 딸아이와 아들에게도 두어 번 받아본 적이 있었다. 잭슨은 몇십 년도 더 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잭슨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지만, 김도운은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늘 똑같이 잭슨에게 부담을 덜어주려는 말이었다.

"하하, 내일 져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하세요. 자, 이거나 한 번 해요."

김도운이 주먹을 내밀었다. 잭슨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 소리를 내고, 김도운에게 주먹을 맞부딪쳤다.

**

"할리, 내가 이 경기에서 뭘 하라고 했지?"

"수비 뒷공간이 좁아도 우리 팀이 패스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일단 달려라."

"좋아. 그리고?"

"루카는 어지간하면 다 패스할 수 있으니까 루카가 공을 잡았을 때는 그냥 달려라. 단, 오프사이드 라인은 신경 쓰면서."

미들즈브러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이 불과 20분 앞으로 다가왔다. 잭슨은 어제 김도운과 주먹 인사를 나눴던 드레싱룸에서 선수들에게 개인 전술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할리의 자신만만한 말을 들으며 잭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완벽해. 할리, 네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거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어제 경기 전 인터뷰까지 참여했기에 할리는 잭슨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잭슨이 바로 옆에 앉아있는 선수에게 가서 말했다.

"세자르, 너는?"

"할리가 만들어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해 패스받자마자 슛할 수 있는 위치를 계속 찾아 움직인다."

"좋아."

"루카의 예상치 못한 패스, 라이언의 초장거리 패스를 받는 것도 우리끼리 따로 연습했습니다. 이번 경기에서 꼭 잘하겠습니다."

선수가 스스로 경기를 위해 노력하는 건, 감독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잭슨이 좋아하는 위닝 멘탈리티가 있는 선수들이 특히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잭슨은 순간 찡해졌지만, 표정을 관리하며 다음 선수에게 말했다.

"···그래. 라이언."

"공격 시에는 루카를 보조하는 게 1순위, 공격 전개가 어렵다면 할리와 세자르가 만들어준 공간으로 돌진하는 게 2순위입니다. 또······."

잭슨은 일일이 선수들에게 지침을 확인했다. 선수들은 자신 있게 오늘 할 것들을 얘기했다.

모두와의 얘기가 끝나고, 입을 다물고 있는 선수들에게 잭슨이 말했다.

"알려주고 연습한 대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해내면 이길 수 있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오늘도 지난달처럼 이기는 거다. 알겠나?"

"예! 보스!"

"그럼, 준비하고 나와라. 먼저 벤치로 나가 있으마."

잭슨은 그렇게 말하고 드레싱 룸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조용히 있던 주장 로드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 잠시만요. 경기 전에 다 같이 구호 한 번 외쳤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당연하죠."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잭슨은 속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선수들 앞에서 그런 걸 티 내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코치님들이랑 치료사님들도 오셔서 원 만들죠."

잭슨과는 다르게 코치들과 치료사들은 별말 없이 모였다. 잭슨 또한 발걸음을 옮겨 로드, 라이언과 어깨동무를 했다.

로드가 말했다.

"자, 할리. 말해."

할리가 전술을 얘기할 때와는 다르게 긴장된 얼굴을 했다. 잭슨은 무슨 말을 하려나 가만히 지켜봤다.

할리가 후, 소리를 내며 몇 번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 욕은 저희만 할 수 있습니다··· 아?"

"뭐?"

잭슨이 눈썹을 꿈틀했고, 선수들과 코치들은 할리의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로드 또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잖아.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양보했더니."

"아니, 잘 할 수 있어. 감독님. 제가 순서를 틀리게 말했어요. 다들 그만 좀 웃어."

할리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시작했다.

"감독님. 저희는 최근 제럴드를 비롯한 방송이나 언론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감독님을 음해하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감독님 욕은 저희만 할 수 있는데, 감히···."

"순서를 바꿔 말해도 이상하게 들린다만··· 할리, 네가 나한테 그렇게 불만이 많은 줄 몰랐다. 경기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하는 게 어떠냐?"

할리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더듬거렸다.

"예? 제가 불만이 있는 건 사실이긴··· 아니아니. 야! 로드. 네가 짜 준 대로 말했는데 감독님이 화나셨잖아."

"네가 단어 선택을 계속 이상하게 하잖아. 아무튼, 이미 망한 거 계속해. 곧 나가야 한다고."

선수들과 코치들은 미소짓고 있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 있었다.

할리는 울상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오늘 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경기에서 꼭 이겨서 프리미어리그에 가고 말 겁니다. 특히, 대표적으로 까불대는 제럴드라는 녀석이 란제리만 입고 방송하게, 아니··· 부끄러워서 앞으로 일을 못 할 정도로 잘 해보겠습니다. 자, 노팅엄. 가자!"

"가자!"

원래 이들의 계획대로라면 진지해야 할 순간이었지만, 할리의 첫 횡설수설 때문에 다들 입에 웃음을 한가득 머금으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당황해서 함께 구호를 외치지 못한 잭슨은 말없이 선수들과 스탭 들의 얼굴을 쭉 돌아봤다.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들 해내겠다는 의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잭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가자!"

선수단과 스탭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보스!"

< 46. 28년 17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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