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지니 스카우트 (1) >
"하하하핳."
할리가 벽면에 걸린 큰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방송을 보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할리는 몇 번 더 킬킬거렸다. 할리와 어깨동무를 한 채로 옆에 앉아있는 로드도 마찬가지였다. 파티가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우리의 캡틴은 혀가 잔뜩 꼬여 있었다.
"꼴 좋다아···."
로드가 큭큭 거리며 웃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같은 방송을 보고 있던 나는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징그럽기만 하잖아. 빨리 끄자니까."
"안 돼요. 좀 더 봐야 한다구요!"
노팅엄이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고 이틀이 지났다. 어제는 시청 앞 광장을 꽉 채우는 퍼레이드를 했고, 오늘은 시즌 종료를 기념한 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티장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서는 스카이스포츠에서 진행하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2026월드컵 파헤치기>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여기에는 잭슨을 열심히 씹어대던 제럴드가 분홍색 란제리 차림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꾸 한숨을 쉬고, 차마 카메라를 못 보는 모습이 정말 수치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진심으로 징그러웠지만, 잭슨이 심심하면 방송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선수들과 직원들, 코치들이 저 영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걸 보고 방송을 끄는 걸 사실상 포기했다.
나는 그저 준비한 행사가 진행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는 선수들과 남는 선수들 모두를 기념하기 위한 걸 준비해뒀거든.
하지만, 그 시간까지는 앞으로 30분가량 남아있었기에 나는 방송을 보며 옆에 앉은 마리아와 잡담할 수밖에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니, 정말 의외의 매치업이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당연했지만,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원맨 팀 느낌이 정말 강했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제럴드?
-예···.
-가슴 좀 쭉 펴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어요?
란제리 속옷을 사 온 해설자 데니스가 얄밉게 제럴드를 놀렸다. 파티장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마리아가 까르르 웃고 내게 말했다.
"데니스 참 얄밉지 않아요?"
"내가 제럴드였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 것 같아요."
마리아가 더 크게 웃었다. 방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럴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큼큼, 뭐··· 의외긴 합니다. 뉴캐슬의 에이스인 니콜라스 마카키스와 이제는 명장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감독 리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팀원들을 강제로 끌고 온 모양새였으니까요. 그래도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네요. 니콜라스 마카키스도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주목할 선수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니콜라스는 지난 월드컵 득점왕이자 우승자니까요. 많은 팬이 이번 월드컵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죠.
나는 방송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둘이 칭찬하는 저 니콜라스 마카키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최종 보스 같은 존재였다. 니콜라스는 지난 시즌 리그 38경기에 출전해 무려 41골을 넣었다. 프리미어리그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뉴캐슬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도전하고 있는 지난 시즌 최강팀이었다.
그 바로 아래에 첸웬과 바비가 함께하고 있는 맨시티가 있었고, 그 아래로 리버풀, 첼시, 브라이튼, 레스터, 아스날, 맨유 등의 팀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빈 와인 병을 붙잡고 노래를 부르는 중인 주정뱅이 로드에게 물었다.
"로드야, 너 니콜라스랑 훈련해 본 적 있지. 내년에 리그에서 만나면 몇 골로 막을 수 있냐?"
"으음. 두 골은 기본으로 먹힐걸요. 몸싸움부터 너무 압도적으로 지니까 제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머리도 좋아?"
"할리랑 비교도 안 돼요."
로드의 단호한 말에 할리가 발끈했다.
로드가 뭐 틀린 말 했냐고 말하기 시작해 나는 둘의 테이블에서 시선을 뗐다.
-니콜라스는 스타 군단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이자 지난해 발롱도르 수상자인 크리스 앨런과도 친구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친구요? 그 말 들으면 닉이 정말 싫어할 텐데요. 정확히 말하면 서로 엄청나게 지기 싫어합니다. 지난 시즌에는 크리스가 전날 해트트릭을 했다고 니콜라스가 경기 중에 자길 교체하지 말라고 네 골을 넣겠다고 방방 뛴 적이 있었어요.
-아, 데니스는 닉과 친분이 있었죠.
-아무래도 아들이 같은 에이전시 출신이니까요.
인터넷에서 축구 기사만 찾아보면 무조건 볼 수 있는 이름, '크리스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우리 팀이 챔피언스리그에 올라가게 된다면 만나게 될 괴물이었다.
방송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딴 세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은퇴 직전의 메시와 호날두의 자리를 저 둘이 물려받았고, 둘은 현재 진행형의 전설을 쓰고 있었다. 저 둘처럼 세 골, 네 골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천상계에 있는 선수를 데려올 방법 같은 건 회귀 전 지식에도 없었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마리아가 물었다.
"도니, 무슨 생각 해요?"
"다음 시즌 생각이요. 그리고, 더 미래 생각도 하고 있어요."
"들려주면 안 돼요?"
별거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 두 선수를 데리고 있는 팀들을 이길 수 있는 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 방송 보니까 우리가 세계 최고를 경쟁할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는 게 실감 나서요."
"와··· 정말 멋져요."
"멋지긴요. 이제 슬슬 밑천도 다 떨어져 가는데, 걱정돼 죽겠다니까요. 프리미어리그 수준에서는 한 번도 단장 일을 해 본 적도 없고···."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단장이 처음이셨잖아요. 그동안 잘했으니까, 틀림없이 잘할 거예요."
마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때론 회귀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게 답답할 때가 있었다. 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고마워요. 자신감이 생겨요. 그럼 다음 시즌에는 니콜라스 마카키스의 뉴캐슬에게 적어도 한 방 정도 먹일 수 있는 팀을 만들어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고, 내년에는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노려볼게요. 그럼 또 사상 최초가 되겠죠?"
나는 잘 될 수 있는 최선의 경우의 수를 얘기했다.
당연히 마리아가 당황해서 벙찔 줄 알았다. 그때 농담이라고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농담이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너무 기대되네요. 이번에도 도니만 믿을게요."
*
마리아와 김도운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선수들도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또, 한 테이블에서는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을 얘기하고 있었다.
라이언이 대형 스크린에 떡하니 올라온 니콜라스 마카키스와 그의 유니폼을 보며 물었다.
"너 이제 어떡해?"
"하하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가는 팀인데 주전 못 하는 거 아냐?"
"망할 거야. 그러니까 가지 마."
테오는 가지 말라고 말한 킹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자신을 놀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투덜거렸다.
"리찌 감독님이랑 직접 통화도 했어요. 감독님이 나 잘 써줄 거라고 했다고요."
"와, 엊그제까지 잭슨 감독님한테 '알겠습니다! 보스!' 하던 놈이 벌써 리찌 감독님이라고 하냐."
"너무하다! 사과해라!"
"사과해!"
라이언을 포함한 선수들은 일부러 테오를 짖궃게 대하고 있었다. 리버풀 이적이 확정된 옆 테이블의 세자르 또한 테디와 미할리스 등에게 대차게 까이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의 후보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남을 선수들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받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라이언이 말했다.
"가서도 잘 해야 해. 알았지?"
테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 지 몰랐다. 옆을 보니 세자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전 팀에서 이적해오고 일 년 밖에 안됐지만, 이 팀에서의 밀도가 너무 높았기에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팬들은 사랑스러웠고, 선수들과 직원들은 친구나 가족 같았으며 이번 시즌 내내 모두 힘을 합쳐 기적을 만들어냈으니까.
그때였다. 대형 스크린의 방송이 꺼지고, <복도 디자인 변경 계획>이라는 제목의 프리젠테이션 파일이 스크린에 비춰졌다.
앞에는 단장 김도운이 나와 있었다. 김도운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아아, 모두들. 파티가 즐겁겠지만, 잠깐만 집중해주세요. 이번에 고생한 노팅엄 FC의 모든 구성원에게 보여줄 게 있어서요.
김도운의 말에 파티장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었고, 스크린을 바라봤다.
김도운은 그 광경이 만족스러운지 씩 웃고 말을 이었다.
-바로 설명할게요. 이번 시즌 우리는 전설을 썼잖아요?
"맞아요!"
"대단했죠!"
파티장의 곳곳에서 큰 호응이 일어났다. 김도운은 시끌벅적함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업적은 이곳에 모인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 선수들, 모든 직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번 시즌을 기념하기 위해 경기장의 북쪽 구역 전체의 디자인을 바꿀 생각이에요.
화면이 바뀌었다.
노팅엄의 경기장 내부 복도가 3D모델로 만들어져 있었고, 이곳에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의 전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 선수 하나를 확대해 볼게요.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은 테오 헌터의 전신 그림이 화면을 꽉 채웠다. 화면 속 테오는 진지한 얼굴로 크로스를 막 올릴것만 같은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웃었고, 테오는 얼굴을 붉혔다.
-선수가 가장 활약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아서 이런 식으로 전신 그림을 벽에 그릴 겁니다. 그리고, 여기 아랫부분 보이죠?
아랫부분에는 QR코드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경기장 투어를 할 때, 우리의 메인 스폰서 엑스피아에서 대여해주는 휴대용 VR기계를 접촉시키면···.
테오의 전신 사진이 사라지고 영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노팅엄의 시민이었다.
[테오 헌터는 훌륭한 선수였어요. 수비와 공격 양면에서 완벽한 활약을 보여줬죠.]
[그는 엄청나게 빨랐어요. 적어도 속도 때문에 답답할 일은 없었죠.]
[늘 헌신적으로 뛰었어요. 저는 그를 잊지 못할 거예요.]
시민들이 차례로 나오며 테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줬다. 테오가 어떤 선수인지, 팬들에게 어떤 모습인지 보여줄 수 있었다.
영상의 당사자인 테오 헌터는 멍한 얼굴로 영상을 볼 뿐이었다.
마지막 시민이 사라지고, 테오의 스페셜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 저 때 태클이 기가 막히긴 했지."
"아, 저건 스페셜 영상에 들어가기 좀 그런데. 테오가 크로스를 이상하게 올려줬는데, 내가 잘 넣은 거라고."
"저 골도 내가 다 먹여준 건데."
선수들은 제각기 떠들며 이번 시즌을 추억했다.
약 5분 가량의 영상이 끝나고, 김도운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뭐, 이런 식으로 리그에서 한 번이라도 뛴 적 있는 선수라면 전부 같은 방식으로 전신 그림과 영상을 제작할 겁니다. 이렇게 해 두면 선수들 뿐만 아니라 팬들도 이번 시즌을 노팅엄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기억하게 될 겁니다. 어때요. 괜찮죠?
"예에에에에!"
"멋져요! 단장님!"
김도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수들과 직원들이 환호했다.
-칭찬은 마리아와 친구들에게 해 주세요. 홍보팀, 영상팀이 정말 고생하고 있거든요.
이어서 김도운이 말했다.
-그리고 한 공간에는 저를 비롯한 직원들, 코칭 스태프의 이름과 직책을 새긴 명패 같은 걸 만들 계획이에요. 이건 아직 디자인이 안 나왔으니까, 나오는대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예!"
-이제 할 말은 끝났는데, 혹시 나한테 할 말 있나요?
파티장에 모인 노팅엄 FC의 모든 구성원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최고입니다!"
< 47. 지니 스카우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