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브라질리언 (3) >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수십 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계를 보니 2분 정도밖에 안 지나 있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부터 침대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몇 분 더 지났을까, 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오늘 경기 MOM인 루앙 카를로스가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죠?"
"네. 오늘 경기 봤어요. 굉장했어요."
루앙이 살짝 미소지었다. 그 상태로 내게 물었다.
"왜 로비로 안 나오셨어요."
"에이전트 로널드가 전화를 아예 안 받아서요. 당연히 저희와의 계약을 취소하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약속했었잖아요. 아, 참고로 로널드와의 계약은 해지했어요."
"···뭐라고요?"
루앙이 어깨를 으쓱하고 추가 설명을 해 줬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찾아오더니, 노팅엄과 계약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빅클럽에 보내주겠다면서. 그래서 잘라버렸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루앙은 천천히 걸어 작은 테이블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루앙이 말했다.
"수수료 좀 물면 돼요. 선수가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걸 쫓는 에이전트는 돈 좀 쓰더라도 해고하는 게 좋다고 아버지가 그랬거든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방해될 거라고."
루앙이 신줏단지 모시듯 따르는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루앙이 말하는 아버지의 말은 내게 정말 좋게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그 아버지가 누구인가요?"
"슬슬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으니까 말할게요. 아버지의 성함은 호베르투 카를루스, 브라질 사상 최고의 왼쪽 풀백이었던 분이에요. UFO 슛으로 유명한 분이라고 하면 알까요?"
"···예?"
오늘은 정말 당황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모두 루앙이 원인이었다.
루앙이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을 테니까 한 번에 설명할게요. 저는 늦둥이로 태어났고, 언론에는 올리베이라 카를루스라고 알려져 있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니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이 방해될 거라고 하시면서 제 미들 네임 중 하나인 '루앙'을 사용하라고 하셨죠. 부모님이 필요한 순간에는 대리인을 내세우셨었고, 그렇게 저는 언론의 시선을 피했어요."
"놀랍네요."
"덕분에 언론의 간섭 없이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아무튼, 이제 저도 실력에 자신이 생겼으니까 말해도 괜찮을 거예요. 무려 월드컵에서 MOM을 받았는데요."
전설적인 선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루앙의 자신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조언에 대한 신뢰와 그 조언의 내용이 왜 이렇게 올바른지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아버지는 절 진정으로 알아봐 준 팀과 계약하는 게 제 미래에 좋을 거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팀이 노팅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원래대로 계약하고 싶어요."
루앙의 말에 불안감이 싹 날아갔다. 월드컵에서 신인상, 혹은 그 이상을 받을지도 모르는 선수가 우리 팀에 오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팽개쳐둔 가방에서 준비해온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루앙에게 내밀었다.
그때, 내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계약서를 루앙에게 건네주고,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건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면에는 <루앙의 에이전트 로널드>라고 적혀 있었다.
"로널드에게서 전화가 왔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로널드가요?"
루앙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가 왜 전화를 걸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만요."
"예."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스마트폰을 대자마자 로널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뭐 하고 있습니까? 아, 아니.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까 전화 안 받으시더니···."
-그건 됐고. 혹시 지금 루앙이랑 같이 있습니까?
자기 용건만 묻는 게 딱 내가 상상한 대로였다. 루앙에게 계약 해지를 당해서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로널드는 남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에이전트였다. 이런 일은 절대로 흔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로널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로널드는 그것만으로 루앙이 내 곁에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로널드가 목소리를 엄포를 놓듯이 말했다.
-루앙과 계약하지 마세요.
"왜요?"
-그건··· 루앙이 제 자존심을 건드렸으니까요.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로널드가 점점 격양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묘한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보통 이런 말은 솔직히 못 하는데, 정말 열 받은 모양이었다.
-루앙은 날 무시했어요. 저는 루앙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요. 다른 선수들도 날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로널드의 말은 무척 거만했다. 자신이 선수들보다 위에 있다는 게 당연하다는 듯 들렸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로널드는 협박을 더 했다.
-만약 루앙과 계약한다면, 당신이 소속된 구단과 거래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저와 관계가 있는 에이전트에게 소속된 선수들과의 거래는 꿈도 꾸지 못할 겁니다.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에이전트에게 갑질을 당하는 건 회귀 전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래서 에이전트라는 족속들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에이전트는 말 몇 마디로 선수들의 이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들이었다. 선수들이 필요한 구단들은 그렇기에 에이전트들을 공손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에이전트들은 대부분 거만했다. 또, 대부분 돈 귀신들이기도 했다.
원래 깨끗하게 시작했더라도 돈맛을 보고 자신들에게 굽실거리는 구단 사람들을 보면서 점점 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루앙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조슈아가 루앙을 보고 '화려한 제 호베르투'가 될 거라는 말을 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루앙이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도 떠올렸다. 완벽한 킥과 움직임 같은 건 우연으로 될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루앙은 자길 진정으로 알아봐 준 우리 팀과 계약하고 싶다고 했다.
노팅엄은 이제 중소구단이 아니었다. 어엿한 4대 리그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큰 구단 중 하나였다. 남미와의 거래가 좀 막히면 어떤가, 돈만 좀 더 쥐여준다면 로널드가 아무리 방해한다고 해도 영입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괜히 굽혔다가 다른 에이전트에게 호구를 잡히는 것도 끔찍하게 싫었다.
노팅엄은 그런 일을 당할 정도로 가치 없는 구단이 아니었으니까.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끊죠.
로널드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기 싸움에서 질 생각은 없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당신과 계약하지 말라고 하네요. 자, 여기 사인하면 돼요."
상반된 말을 동시에 말하니 루앙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씩 웃으며 준비해 온 펜을 꺼내 사인했다.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죠."
"로널드가 플라멩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서 구단 차원에서 계약을 거부할 수도 있는데··· 그건 법적 분쟁을 일으켜서라도 이겨볼게요. 플라멩구는 이미 이적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계약서를 썼으니까요. 절대, 루앙이 뛰는 데 불편함을 겪게 하진 않게 하죠."
내 말에 루앙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 일은 제가 에이전트를 잘못 고른 탓이 크니···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볼게요. 우리 아버지가 남미 축구계에 여러 끈이 있으시거든요."
루앙의 말에 나는 갸우뚱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잘 처리했죠?"
로널드가 다리를 꼰 채로 앉아있는 곳은 플라멩구의 단장 사무실이었다. 플라멩구의 단장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말한 대로 했는···."
"좋군요."
플라멩구의 단장이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로널드는 말을 끊으며 차 한잔을 음미했다. 이어서 단장에게 말했다.
"5일 전, 루앙은 그동안 돌봐준 은혜를 잊고 멋대로 계약을 끊어버렸어요. 또, 노팅엄의 킴 단장은 내 '정중한' 부탁을 완전히 무시했죠. 둘은 대가를 치러야 해요··· 할 말 있어요?"
플라멩구의 단장은 로널드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로널드를 힐끗거리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다.
드디어 말할 기회를 얻은 플라멩구의 단장이 입을 열었다.
"제 말 끝까지 들으세요. 로널드가 부탁한 대로 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실패했어요. 엊그제 루앙이 노팅엄으로 이적하기 위한 모든 서류를 완성해서 넘겨줬어요."
"뭐요?"
로널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플라멩구의 단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로널드가 화난 표정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로널드가 쏘듯이 말했다.
"당신도 날 무시하는 겁니까?"
플라멩구의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로널드의 에이전시보다 더 큰 곳이 움직였으니까요."
"우리보다 더 큰 곳이요?"
"로드리게스 스포츠 매니지먼트요."
로드리게스 스포츠 매니지먼트는 남미 최고의 에이전시였다. 그 이름을 들은 로널드가 벙찐 얼굴을 하다가 뒤늦게 물었다.
"···대체 왜요?"
"난들 압니까? 아무튼, 그곳에 밉보이는 게 로널드에게 밉보이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로널드는 입을 다물었다. 단장의 말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로널드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기로 했다.
김도운의 뒷배인지 루앙의 뒷배인지 모를 누군가가 둘을 도운 것 같았으니까. 상대방이 누군지 파악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로널드는 단장실에 켜 놓은 TV에서 나오는 경기 장면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브라질이 이탈리아와 16강전을 치르고 있었다.
로널드는 궐련을 한 대 꺼내서 피우기 시작했다. 단장실에 연기가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로널드는 오늘도 선발 명단에 든 루앙이 경기에서 끔찍한 모습을 보이길 바라며 연기를 내뱉었다.
*
-도니! 기사 봤어?
"응, 보고 있어."
나는 노트북에 띄워져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월드컵의 라이징스타 루앙, 6개 빅클럽에서 관심>
루앙은 16강 경기에서도 한 골을 넣으며 MOM에 근접한 활약을 펼쳤다. 우리와 플라멩구는 아직 이적을 공표하지 않았고, 내 요청으로 각 협회에도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 아직 정보가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계약 사실을 모르는 기자들과 빅클럽들에서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퍼지겠지만, 한동안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루앙의 아버지인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인맥인 로드리게스 스포츠 매니지먼트의 도움으로 플라멩구 단장의 입도 막아버렸으니까.
-이미 우리 선수잖아. 팬들에게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
제임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제임스에게는 루앙과 필요한 계약서 작성을 다 마치자마자 연락해서 알려준 참이었다.
"아니, 조금 천천히 말해주자."
나는 조슈아의 '월드컵 신인상을 받을 만한 선수'라는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말하는 것보다 조금 더 기다려서 월드컵과 시상식까지 끝난 후에 발표한다면···.
"대단한 이적을 기다리고 있을 팬들에게 더 큰 선물을 줄 수 있을 거야."
< 48. 브라질리언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