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노팅엄의 주방 (1) >
선수단과 코치들이 아시아로 떠난 지 꽤 됐지만, 노팅엄의 훈련장 식당은 직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경기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신청한 사람에 한 해 점심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평일에도 절반가량 문을 여는 푸드 코트의 음식들도 맛있긴 했지만, 매일 먹기에는 너무 자극적이라 직원들 대부분은 훈련장 식당에서 식사하는 걸 선호했다.
식당의 한 테이블에서는 각자 다른 직책의 여자 직원 넷이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테이블의 풍경은 조금 기묘했다.
한 직원만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세 직원은 포크도 들지 않고 한 직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직원이 입에 든 걸 꿀꺽 삼키고 말했다.
"으음~ 맛있다."
"정말?"
"응!"
"다행이다."
노팅엄의 팬으로 시작해 팀닥터 보조 일을 하고 있는 마야가 환하게 웃었다.
이어서 조이와 마리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이가 말했다.
"입맛이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안심이네요. 훈련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거의 다 식당을 이용하거든요. 원한다면 세끼 전부 다 제공해줄 수도 있으니까 입맛만 맞다면 여기서 식사하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정말요? 엄청 좋은데요?"
샬롯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샬롯은 세계 최고의 잔디전문가 노먼의 밑에서 일하기 위해 먼 미국에서 이틀 전에 비행기를 타고 온 대학생이었다.
어제는 시차 적응을 위해 노먼과 잠깐 인사만 했고, 오늘은 노먼 교수가 출장을 가는 바람에 또래인 마야가 구단 안내를 도와주고 있었다.
조이와 마리아는 점심때 합류했다.
노먼 교수가 조이에게 샬롯을 좀 신경 써달라고 말했기에 조이는 샬롯에게 연락해 점심을 함께 먹자고 해서 셋이 됐고, 마지막으로 조이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온 마리아가 합류해 자연스럽게 넷이 됐다.
마리아가 말했다.
"노팅엄에 온걸 환영해요. 그리고 나중에 인터뷰 부탁하면 해줄 수 있어요? 젊은 직원들 대상으로 영상 하나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거든요."
"···음, 그건 좀 부끄러운데···."
기어들어 가는 샬롯의 대답에 마리아가 "그럼 어쩔 수 없고요."라며 쿨하게 넘어갔다.
그러다 마리아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건 알려줄 수 있어요? 샬롯이 로드랑 친한 대학생 맞죠?"
마리아의 물음에 샬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대답이나 다름없었기에 얌전히 있던 조이와 마야가 눈을 초롱초롱 뜨며 관심을 보였다.
이어서 조이도 물었고
"미국에 가서도 로드랑 계속 연락한다는 사람이 샬롯이었어요?"
마야도 말했다.
"아! 로드가 맨날 스마트폰 붙잡고 있는 상대가 샬롯이었구나. 로드 정말 괜찮은 애야. 훈련도 엄청 성실하게 잘하고, 선수들도 잘 이끌고!"
샬롯은 이들의 말을 들으며 점점 평정을 찾았다.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아하하."
마야가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괜히 잘되고 있는 커플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마야와 조이, 마리아가 순식간에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결국 가장 나이가 어리고 눈싸움에서 밀린 마야가 로드를 변호했다.
"로드가 워낙 거짓말을 못 해서 스마트폰 잡을 때마다 헤실거렸거든."
마야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진짜 연인이 되기 전, 그러니까 썸 단계에서는 상대방의 경솔한 행동 하나하나에 정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마야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있었던 사실을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내려 노력했다.
샬롯이 물었다.
"헤실거렸다고?"
"응. 너무 좋아서 죽겠다는 듯이 그러고 있는데, 눈치 못 챌 수가 없지. 그래서 선수랑 코치랑 직원들이 맨날 지독하게 물어봤는데 로드가 대답을 안 하는 거야. 글쎄. 너한테 민폐 끼치기 싫다고 했나?"
"정말?"
"그래서 직원들이 로드랑 친한 할리한테 맛있는 거 갖다 주면서 로드랑 연락하는 애가 누구냐고 물었는데, 할리가 미국에서 유학 왔던 여자애일 거라고 말해서 알게 됐어."
할리한텐 미안하지만, 할리는 구단 내에서도 그런 캐릭터였기에 마야는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실이었으니까!
마야는 로드를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인데도 샬롯의 정체를 끝까지 숨기려 하는 배려심 있는 남자.'라고 말하는 데 성공했다. 마야는 감동하는 샬롯 뒤로 조이와 마리아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조이와 마리아도 몰래 엄지를 들어줬다.
조이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로드랑 이번 주에도 연락했어?"
"네. 아침에도 했어요."
셋은 오오 하고 작게 탄성을 냈고, 샬롯은 다시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조이가 물었다.
"현지 분위기는 어떻대?"
"호응이 많대요. 중국에서 노팅엄을 알아보는 팬들도 있고, 뭣보다 지난 경기에서 PSG랑 3-3으로 비기니까 중립 팬들도 박수 많이 쳐줬다고 해요."
조이와 마리아가 손뼉을 칠 정도로 기뻐했다.
해외에 팬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오는 수입으로 알 수 있긴 했지만, 이렇게 선수 입으로 듣는 건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PSG(파리 생제르망)과의 3-3 무승부를 현지 팬들이 인정해줬다니 정말 기뻤다.
비록 파리의 에이스이자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인 킬리얀 음바페가 전반 30분만 뛰고 나갔지만, 노팅엄은 슈팅 숫자가 두 배로 밀리는 와중에 좋은 집중력을 보여 3-3 무승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친선경기라 PSG가 전술 실험을 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건 노팅엄도 마찬가지였다.
PSG는 챔피언스리그 4강 팀 중 하나였다. 노팅엄은 인터내셔널 챔피언스 컵 마지막 경기에서 이번 시즌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마야가 물었다.
"이제 두 경기만 더 치르고 돌아오는 거죠?"
"응, 우리처럼 조별리그 탈락한 팀 중에서 두 팀이랑 친선경기 치르고 올 거래."
마리아가 답했다.
이어서 조이가 말했다.
"돌아오고 사흘 후에 독일의 샬케04랑 홈 친선경기를 치를 거고, 마지막으로 노츠 카운티랑 친선경기를 치르고 시즌에 돌입하는 거지.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이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조이가 설레는지 살짝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샬롯이 물었다.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노팅엄 푸드 리그>는 언제 해요? 인터넷에서 노팅엄에 대해서 엄청나게 찾아보고 왔거든요."
"샬케04랑 하는 첫 홈 친선경기에서 할 거야."
"리그를 통해 반 시즌 동안 푸드 코트에 입점할 곳을 정하는 거죠?"
"응 맞아."
"너무 기대돼요. 이게 무슨 지역 축제처럼 돼서 세계의 온갖 음식을 맛볼 수도 있고, 인플루언서들도 많이 볼 수 있다면서요?"
"그렇지. 나도 기대되네."
매 시즌 비슷한 업무를 반복하는 직원들이었지만, 이 시기쯤만 되면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선수들이나 코치진처럼 직접 리그 경기에 관여하는 건 아니지만, 소속된 팀이 잘하길 바라는 마음은 똑같으니까.
그때, 네 명의 테이블에 요리사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조이, 오늘 메뉴가 별로니?"
조이가 고개를 들어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고, 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정말 맛있어요. 오늘 여기서 처음으로 식사한 샬롯도 맛있다고 했다고요."
이들에게 말을 건넨 건, 훈련장 주방을 책임지는 두 사람 중 하나인 파머 부인이었다.
조이는 어린 시절부터 김도운, 제임스를 보기 위해 훈련장을 찾았기에 그녀와 20년이 넘는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조이는 파머 부인이 실망하지 않도록 이어 말했다.
"다음 시즌 얘기를 하다 보니 정신을 잠깐 놓은 것 같아요. 여러분. 어서 먹어요."
"그렇구나. 천천히 먹으렴."
파머 부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어서 샬롯에게 다가가 말했다.
"새 딸이 왔네. 먹고 싶은 메뉴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렴. 간식 먹고 싶을 때 와도 좋고."
"···네."
샬롯의 대답을 들은 파머 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돌아다녔다. 파머 부인이 조금 멀어졌을 때, 샬롯이 물었다.
"저분이 주방장이신 거예요?"
"남편이랑 두 분이 수석 주방장을 맡고 있어요. 두 분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여기서 33년 일하면서 선수들이나 직원들이 음식 맛에서는 불평 한번 없었다고요."
조이의 말을 들으며 샬롯은 주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파머 부인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한 분이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이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 푸드코트 판매량 1위에 빛나는 마이크도 요리에 관해 의견을 나누겠다고 저렇게 자주 찾아와요."
샬롯은 마이크가 누군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파머 부인에게 살갑게 대하는 흑인 한 명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네요."
"맞아요. 그만큼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두 분 다 나이가 꽤 많으셔서 걱정이에요···."
조이의 말에 샬롯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파머 부부를 차례로 봤다. 파머 부부의 기운찬 모습에 샬롯은 바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식어도 맛있는 노팅엄의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나머지 셋도 본격적으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맛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
"애옹. 애옹."
검은 고양이 티케가 주방 바로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파머가 파머 부인에게 말했다.
"여보. 티케 밥 좀 줄래요?"
"준비해 놨어요?"
"갈아놨어요. 근데, 쟤는 왜 따라와요?"
"오늘 비법 소스를 알아내겠다나 뭐라나."
파머 부인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어깨를 으쓱했다. 파머 부인 바로 뒤에는 노팅엄 푸드 코트의 일인자 마이크가 서 있었다.
"파머 할아버지, 오늘은 기필코 스테이크 위에 얹은 소스의 비법을 알아내겠습니다. 대가로 베트남과 인도 음식 레시피를 몇 개 가져왔다고요."
파머 부부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파머 부부의 아들딸들은 가정을 이뤄 영국의 다른 도시로 떠났다. 그런 파머 부부에게 있어 매일 자신들의 비법을 알아내겠다고 자기의 비장의 레시피를 가져오는 마이크는 마치 귀여운 아들 같았다.
"마감까지 다 끝나면 얘기하자고."
파머의 말에 마이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
이어서 참치와 닭가슴살을 갈아서 만든 티케의 식사를 가져온 파머 부인이 말했다. 마이크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당연하죠. 두 분은 요리의 장인이시잖아요. 장인들과 레시피를 교환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요."
"에구구, 젊구만. 나 좀 일으켜 줘."
파머 부인은 점심을 맛있게 먹는 티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쪼그려 앉은 채로 마이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는 파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어나는 걸 도와줬다.
파머 부인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젊은 사람 손 잡으니까 좋네."
"역시 그렇죠?"
마이크가 능숙하게 받아넘기자 파머 부인이 깔깔 웃었다. 파머 부인이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간식이라도 하나 해줄 테니까 마감할 동안 그거 먹고 있어."
"오, 정말요? 아니다. 제가 할게요. 남미에서 배운 기가 막힌 간식 레시피가 하나 있거든요."
마이크가 살갑게 말하며 파머 부인을 쫓아가려는 그 순간,
"애오오오오오옹!"
티케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마이크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티케를 봤는데, 티케는 커진 동공으로 파머 부인을 보고 있었다. 마이크는 불길한 느낌에 몇 발자국 앞에서 걷고 있던 파머 부인을 바라보았다.
파머 부인이 비틀거리더니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마이크는 다급히 뛰어 파머 부인을 붙잡아 안았다.
"할머니? 할머니?"
파머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숨도 안 쉬고 있었다. 당황한 마이크가 외쳤다.
"파머 부인이 숨을 안 쉬어요!"
이미 티케의 울부짖음에 이쪽을 보고 있던 직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파머도 어느새 마이크에게 다가와 몹시 당황한 얼굴로 파머 부인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한 직원이 뭉쳐있는 직원들을 헤치며 나왔다.
"잠시만요! 제가 볼게요!"
마야였다. 마야가 파머 부인의 얼굴을 살피고, 코 밑에 손을 대 보더니 말했다.
"여기에 바로 눕혀 주세요. 의사 면허는 아직 없지만··· 응급처치는 여기서 제가 가장 잘할 거예요. 그리고 마이크. 바로 999에 전화 좀 해주세요."
"그, 그래요."
마야는 바로 파머 부인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
"···하아. 진짜 다행이에요.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머에게서 파머 부인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을 막 들은 참이었다.
"바쁜 데 여기까지 오니···."
"당연히 와야죠. 그리고 괜찮다는 얘기 들었으니까 비행기 푯값도 안 아까워요."
"고맙구나···."
파머 부부는 내가 이 팀에서 유소년 선수로 뛸 때부터 고모, 삼촌처럼 생각하던 분이었다. 그래서 파머 부인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고, 남은 업무를 초고속으로 마무리 짓고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건 비행기의 와이파이로 다 처리하고 급히 이 병원으로 왔다.
처음에 눈을 감고 있는 파머 부인을 보며 충격을 받았었지만, 며칠 내로 의식을 찾을 거라는 파머의 말을 들은 후에는 안도할 수 있었다.
파머가 말했다.
"그리고 말인데··· 일 말이다···."
"아, 파트 타임으로 요리사 두 명을 일단 계약했어요. 두 분이 계실 때만큼은 못하겠지만, 주방은 돌아가고 있어요."
파머가 더 어두운 얼굴이 돼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말이다··· 의사에게 말을 들었는데, 지금처럼 일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하더구나."
"예?"
"그래서 애매하게 있는 것보다는 우리가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 52. 노팅엄의 주방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