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노팅엄의 주방 (2) >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그만두신다고요?"
"그래."
노팅엄의 주방장 파머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방금 들었던 말들을 애써 정리해 또 질문했다.
"지금처럼 일하기 힘들 것 같다는 게 누굴 말하는 거예요?"
"베시 말이다."
베시는 파머 부인의 이름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파머는 몸 상태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파머 부인의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파머 부인이 회복하는 동안은 파머가 파트 타임으로 일해주면 안 될까요? 두 분이 없는 주방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단 말이에요···."
구단을 위해서도 그렇고, 나 또한 그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늦은 시간까지 주방에 남아 제임스와 나를 비롯한 유소년 선수들에게 간식을 차려주던, 지금보다 주름이 적은 두 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파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았다. 파머의 손에 박힌 굳은살이 마치 노팅엄에서의 33년처럼 느껴졌다.
"네 덕이다."
나는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 파머가 계속 말했다.
"네가 와서 구단을 일으켜 준 덕에 3년도 더 일할 수 있었단다."
"그게 무슨···."
"베시의 몸은 그때도 안 좋았거든.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원래 그 시즌이 끝나자마자 일을 그만두려고 했었어. 그런데, 네가 느닷없이 돌아온 거야. 단장 겸 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노팅엄에 온 첫날 나는 구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었다. 그리고 날 가장 반갑게 맞아준 게 바로 파머 부부였다.
'아이고, 그 꼬마가 이렇게 출세하다니.'
'너한테 잘 보이면 주급도 올라가니?'
특히, 파머 부인은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날 반겨줬었다.
"그날, 베시가 내게 말했지. 도니랑 제임스를 조금만이라도 더 도와주자고. 바로 잘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팀을 안정시키고 새 요리사를 찾을 시간은 마련해 주자고 말이다. 그런데··· 네가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연달아 일으키기 시작한 거다."
나는 애써 웃었다. 파머가 흐뭇한 얼굴로 허공을 보며 말했다.
"행복해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아지더구나. 그래서 나랑 베시는 몸 상태가 허락할 때까지 열심히 일하기로 다짐했지. 이 팀의 기적에 한 손 보태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 말이야. 허허··· 그런데 프리미어리그까지 승격할 줄은 정말 몰랐어. 모두의 힘이겠지만, 네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구나."
잠시 침묵이 있었다. 정말 행복하셨다고 하니 기분은 좋았지만, 파머가 거절할 수 없는 말을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몸 상태가 허락을 안 하는 것 같구나. 솔직히 나는 아직 좀 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베시가 걱정돼서 말이다. 3년이면 충분히 즐긴 것 같고··· 이제는 팬으로서 노팅엄을 응원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파머는 말없이 날 기다려 줬다.
나는 한참 후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고맙구나."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연락 주세요."
"그래."
나는 파머와 가볍게 포옹하고, 병원을 나왔다.
**
오랜만에 앉는 사무실의 의자에 등을 파묻은 채로 멍하니 천장을 봤다.
형광등의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셨지만, 멍하니 있고 싶었기에 그냥 그러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있어요.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확 열렸다. 손님은 조이였다,
조이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으시대?"
"병원에서 연락받지 않았어?"
"괜찮다는 전화 한 통 말고는 자세하게 안 알려줘서."
"그래? 그럼 거기 앉아봐. 얘기해줄게."
조이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소파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차를 내왔겠지만, 나는 바로 파머와 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
얘기를 마치자 조이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파머 부부가 없는 주방이라니···."
"워낙 실력이 좋으셨으니까··· 어지간한 요리사로는 대체도 못 할 텐데··· 허전하기도 할 테고···."
"일주일 있으면 선수들이 돌아오는 거지?"
조이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이의 말에 당장 요리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멍해지던 정신을 다잡았다.
유명한 감독들의 사단에 영양사나 요리사가 들어가 있을 만큼, 팬들에게 보이지는 않아도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는 게 바로 요리를 하는 주방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직원, 선수들의 만족도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영양소 공급으로 선수들의 컨디션도 관리해줄 수 있었다.
"빨리 움직여야겠다. 돈 좀 들이더라도 괜찮은 사람으로. 아예 프리미어리그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노려볼까? 아니면 유명 호텔 요리사라던가."
"그거 괜찮다."
조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문을 노크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예상 못 한 인물이었다.
바로 노팅엄 푸드코트에서 3년째 판매량 1위를 달리고 있는 마이크였다.
*
나는 조이와 마이크, 그리고 내 차를 한 번에 내 왔다. 이번에는 아시아에서 사 온 보이차였다. 향이 마음에 드는지 마이크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니 마이크가 먼저 용건을 말했다.
"훈련장 주방을 책임질 요리사를 찾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파머 부인이 쓰러진 건 워낙 유명한 일이었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마이크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파머 부부의 자리에 제가 들어가고 싶습니다."
"···예?"
예상 못 한 말이었기에 당황했다. 마이크를 주방에 데려오는 건 생각도 못 해봤기 때문이었다.
"단장님도 제 경력은 기억하시죠? 저는 전 세계를 돌며 요리를 공부했고, 노팅엄에 머무르면서 영양사 자격도 취득했습니다. 무엇보다··· 노팅엄 푸드 코트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올리고 있죠. 사람들이 제 요리를 맛있다고 생각하는 게 증거 아니겠습니까?"
"···갑작스럽네요."
파머 부부의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는 의지가 너무 느껴져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외부에서 본다면 노팅엄은 이제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가는 거고, 이곳의 정식 수석 요리사 자리는 안정적이고 수익 많은 직장으로 보일 것이다.
그걸 노리는 것 같아서 조금 찝찝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이크의 말에 내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뭣보다··· 파머 할아버지가 제게 부탁했거든요···."
"파머가요?"
조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마이크가 계속 말했다.
"예. 제 실력을 믿는다고 노팅엄을 부탁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셨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마이크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마이크는 심심하다고 직원들이나 선수들에게 처음 보는 요리를 가져다줄 정도로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그의 음식들이 맛있다고 자주 칭찬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마이크는 팬들에게 인정받은 명실상부 푸드코트의 1인자였다.
영양사 자격까지 땄다니 음식의 영양 밸런스에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실력에서는 아무도 이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게 있었다.
"마이크가 빠져도 푸드코트가 잘 돌아갈까요?"
마이크가 푸드코트의 1인자라는 게 문제였다.
마이크의 양념치킨은 워낙 유명해져서 인플루언서나 뮤튜버들이 즐겨 찾고, 여행객들이 반드시 들러 꼭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크 또한 이 문제는 생각지 못했는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으음··· 하겠다는 사람이 정말 많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잠시 얘기를 나눠봤으나 바로 결론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고민해볼게요."
**
"···이렇게 됐어요. 단장님이 고민해보겠다고 하시네요."
"다행이구나. 너라면 안심이지."
파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파머가 한숨을 다 내쉬기도 전에 병상에 누운 파머 부인이 파머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뭐가 다행이에요. 이 영감탱이. 난 못한다 쳐도 당신은 일해야 할 거 아녜요."
파머 부인은 핼쑥하긴 했지만, 힘차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할 정도로 정신과 기력을 차린 상태였다.
파머 부인이 계속 말했다.
"나만 그만두면 되지 당신은 왜 그만둬요?"
"당신이 또 쓰러지면 어떡해."
"당신 옆에서 일 잘하나 지켜보면 되죠. 가끔 도와주기도 하면서."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날 따라다니겠다고?"
파머 부부가 말다툼을 시작할 것 같자 마이크가 다급히 말했다.
"파머 할아버지. 싸우지 마세요."
파머 부인은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되는 상태였다. 스트레스는 별로 좋지 않았다. 마이크가 눈치를 줘 그걸 다시금 깨달은 파머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멈췄다.
하지만, 파머 부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늙어 죽을 때까지 집에서 심심하게 있으란 말이에요? 난 그렇게 못 살아요. 죽어도 평생을 바친 노팅엄 FC의 어딘가에서 죽을 거예요."
"죽긴 뭘 죽어!"
다시금 시작된 둘의 말다툼을 보며 마이크는 한숨을 내쉬다 '유레카!'라고 외칠 정도의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려냈다.
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잠시만요. 좋은 생각이 났어요. 두 분이 싸우실 필요 없어요."
파머 부부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마이크를 바라봤다. 마이크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건 어떨까요? 파머 부인은 몸 상태만 좋을 때만 일하면 되잖아요."
파머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고, 파머가 말했다.
"참고로 주방을 너한테 넘긴 이상 노팅엄의 주방으로는 안 갈 거다. 이건 널 존중하기 위한 거야."
"아뇨. 거기 말고요."
파머 부부는 마이크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마이크가 말했다.
"이번에는 노팅엄의 팬들에게 요리를 해 주는 거예요."
**
노팅엄의 홈 경기장이 가득 차 있었다.
팬들은 무척 설레하는 얼굴이었다. 무려 두 달 만에 선수들을 보는 거였으니까.
또한, 그들의 손에는 전부 음식이 한두 개씩 들려 있었다.
<여러분! 제가 돌아왔어요! 저 보고 싶었죠? 제가 발목 부상이라 이번 경기에 못 나가서, 이거 하고 싶다고 졸라서 여기 왔어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 대신 할리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펴졌다. 익숙한 목소리에 팬들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저기, 할리. 시간 없어요.>
<아 그랬죠. 그럼 일단··· 제4회! 노팅엄 푸드 리그가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할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기장을 가득 채운 팬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두 달 만의 직관이라서 그런지 팬들의 함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행히도 할리의 장내 방송이 묻힐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오늘 티켓 받으면서 시식권이랑 식권도 받으셨죠? 시식권으로는 10개의 가게에서 시식용 음식을 받을 수 있고, 식권으로는 가게의 음식을 하나 무료로 받을 수 있어요.>
할리의 목소리는 <노팅엄 푸드 리그>가 한참 진행 중인 경기장을 둘러싼 복도에도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김도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했다.
"걱정했는데 잘하네."
"할리는 나이를 먹어도 늘 밝네요."
"그게 장점이죠."
김도운의 옆에는 마이크가 있었다. 둘은 복도 기둥 뒤에서 한 가게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원래는 마이크가 있어야 할 자리였지만···.
[로드 버거]
[할리 치킨]
[라이언 스테이크]
큼지막한 메뉴판 옆에서 파머가 긴장한 얼굴로 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것 같네요."
"당연하죠. 파머 할아버지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데."
김도운의 말에 마이크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김도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푸드코트를 보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그 와중에 할리의 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맛있게 푸드 코트의 음식을 맛본 후에는 투표를 해주셔야 해요. 시식용 티켓 뒤에 투표용지가 있거든요? 경기 중이든 끝난 후든 거기에 체크를 해서 경기장 곳곳에 있는 투표함에 넣어주시면··· 투표를 통해 이번 시즌 전반기 푸드 코트에 입점할 가게들을 선별할 거예요.>
김도운이 할리의 방송을 받아 말했다.
"할리 말대로 전적으로 팬들에게 맡기는 심사잖아요. 괜히 실망이라도 하시면···."
김도운의 우려에 마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파머 할아버지는 고인물 중에 고인물이에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 52. 노팅엄의 주방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