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동화 더비 (2) >
어두컴컴한 노팅엄의 홈구장이 레스터시티 선수들을 반겼다.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오기 무섭게 경기장 전체에서 횃불들이 타오르듯 붉은 조명이 커졌다. 팬 모두 붉은 불빛을 내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이어서 음산하고 어두운 노래가 경기당을 가득 채웠다.
정말 지옥도 같은 풍경이었지만, 레스터시티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공격수인 제롬 랜돌프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여기 팬들 진짜 열정적이네. 캡틴, 그렇지 않아?"
사실 살짝 겁을 먹었던 국가대표 출신 미드필더이자 주장 제임스 메디슨은 사실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주절주절 말했다.
"그, 그러게. 즈베즈다 같은 팀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순한 맛이지."
은디디, 칠웰 같은 리그 상위권의 플레이어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개막전 이겨보겠다고 별걸 다 하네."
"의욕이 넘치는구만."
선수들은 주장들의 진영 선택을 기다리며 모여 있었다.
긴장했던 선수들은 제롬을 비롯한 팀 내 영향력이 큰 선수들 덕에 금방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열의를 불태우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무서우니까 저런 응원까지 하는 거야."
선수들은 제롬의 말에 동의하며 하나둘 자신 넘치는 얼굴들을 했다.
잠시 후, 코인 토스에서 승리해 공을 먼저 찰 수 있는 권한을 얻어온 주장, 제임스 메디슨이 선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우리는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5위를 한 팀이고, 팀원도 제롬 말고는 그대로야. 노팅엄의 이상한 응원? 신경 쓸 거 없어. 언론에서 가장 주목하는 승격 팀? 우스운 말이지. 우리는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노리는 팀이라고."
"캡틴, 우승을 노린다고 해 줘. 단장님이랑 감독님하고 그렇게 약속했단 말이야."
제롬의 보충하는 말에 메디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레스터시티는 동화 같은 우승 이후로 유럽대항전에 나갈 수 있는 수준의 팀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다시 우승하진 못했다.
리그 우승은 선수들의 가장 또렷한 목표였다. 메디슨은 마음 깊이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우리는 우승을 노릴 수도 있는 팀이야. 동화 더비? 웃기지 말라 그래. 우리랑 더비를 치르려면 한참 멀었어.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는 감독님이 데뷔전을 치르는 날이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이긴다!"
선수들이 다 함께 외쳤다.
메디슨은 마지막으로 선수들과 준비했던 구호를 선창했다.
"바디는(Vardy's On)!"
"불타오른다(Fire)!"
는 제이미 바디의 선수 시절 응원가이자 레스터시티의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응원가 중 하나의 제목이었다.
정장을 입고 필드 위에 서 있던 레스터시티의 감독 바디가 픽 웃었다.
레스터시티의 선수들은 방금 외쳤던 구호처럼 승리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며 경기 시작 휘슬을 기다렸다.
*
'친선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고 자만하지 마라. 리그 경기에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집중력은 차원이 다르니까.'
경기 직전, 잭슨 감독님은 이렇게 말하며 선수들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경기가 시작하고 20분이 흐른 지금 로드는 잭슨의 우려와는 다른 양상으로 경기가 흘러가서 당황하고 있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잭슨의 우려와는 달리 경기가 너무 잘 풀리고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집중력이 차원이 다르다는 말도 잘 이해 가지 않아 로드는 더 집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지금도 루카가 미할리스와 원투패스를 주고받은 후 안으로 잘라 들어가는 테디에게 로빙 스루패스를 했고, 테디가 멋진 슛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레스터의 골키퍼에게 아쉽게 막히긴 했지만, 훈련 때 연습했던 패턴 그대로였다.
팬들은 경기 시작 직전 <지옥 불 응원>이라고 부르는 걸 해줬고, 지금도 응원가의 컨셉에 맞게 노팅엄 볼의 색깔을 바꾸며 경기장을 초록색으로, 파란색으로, 노란색으로, 붉은색으로 물들이며 선수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또한,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짜준 대로 경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레스터시티의 공격 패턴은 단순한 역습이었고, 노팅엄은 수비 라인은 중간 정도로 유지한 채 루카와 라이언을 중심으로 원톱 스트라이커 미할리스를 이용해 여러 방식의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실제 리그에서도 노팅엄의 공격이 먹힌다는 사실에 로드는 들뜨려는 걸 참으며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레스터시티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한 순위 차이로 놓친 5위 팀이었다. 이런 팀과도 비등하게 경기할 수 있다는 걸 느끼며 노팅엄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약체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줬다.
그리고 잠시 후, 로드는 아주 짧은 시간 고민에 빠졌다.
상대 팀의 공격형 미드필더 메디슨이 공을 잡자마자 자신이 마크하고 있는 제롬과 왼쪽 측면으로 오버래핑 중인 칠웰을 동시 흘긋거렸기 때문이었다.
제롬에게 패스할 거라 생각하고 그냥 뒤로 물러난다면 메디슨의 중거리 슈팅이 날아올지 몰랐다.
그렇기에 로드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며 추측하고 움직이려 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고, 프로 생활 내내 이런 고민 탓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국가대표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팀이든 조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에 생각할 여유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찰나에 메디슨이 움직였다.
로드 발을 뻗어야 닿을 공간으로 한 템포 빠르게 패스한 것이었다. 로드 근처에 있던 제롬이 로드 쪽으로 팔을 뻗으며 로드의 움직임을 막았고, 그대로 패스를 받아 달렸다.
"안 돼! 막아줘!"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대일 찬스.
제롬은 여유 있게 도움닫기를 하며 노팅엄 골키퍼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반대편 포스트로 정확하게 차서 골을 만들었다.
노팅엄의 경기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노팅엄의 팬들에게 눌려있던 레스터시티의 원정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수들과 세레머니를 즐긴 제롬이 로드 옆을 지나가다 멈춰섰다.
"골 넣으라고 가만히 있었던 거야? 고마워."
제롬의 가벼운 트래시 토크였다.
로드는 도발을 참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스읍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제롬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열심히 해 봐. 기대하고 있으니까."
제롬은 어깨를 두드린 뒤 레스터시티 진영으로 돌아갔다.
로드는 분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제자리에서 주먹을 꽉 쥐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로드에게 라이언이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방금 둘이 하는 얘기 들었는데···."
"···."
로드가 입술만 꿈틀거리고 있자 라이언이 한마디 더 했다.
"방금은 쟤네가 잘한 거야. 우리 방금까지도 분위기 좋았잖아. 주장답게 잘 추슬러 봐. 오늘 경기 질 생각이야?"
로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선수들이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이언 말대로 자신은 주장이었다. 선수들을 북돋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로드가 자신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절대 안 되지. 고마워. 라이언."
"그래. 내가 한 골 넣을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로드가 그 말에 픽 웃었다.
아직 경기는 65분이나 남아있었다.
로드는 선수들에게 하던 대로 하자고 말했고, 전반전이 끝날 무렵 좋은 찬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
레스터시티의 전술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상위권 팀답지 않게 역습을 노리는 팀이라는 것.
둘은 잉글랜드 국가대표 왼쪽 풀백인 칠웰(테오와 교대로 출전)의 오버래핑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왼쪽에 치중된 비대칭 전술을 사용한다는 것.
그렇기에 노팅엄의 공격은 칠웰과 맞붙는 위치에 있는 오른쪽 윙 테디 헌터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테디가 칠웰의 오버래핑을 막기 위해 뒤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칠웰을 무시하고 빈 곳을 노릴 것인가. 테디가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냐에 따라 수비를 할지 공격을 할지가 결정됐다.
레스터시티의 패스를 막 끊어낸 로드는 테디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한 골 차로 뒤지고 있으니 무조건 공격일 것이다.
로드는 칠웰이 빠져 헐거워진 공간을 향해 롱 패스를 찔렀다. 테디는 준비한 대로 로드가 공을 차기도 전에 달리고 있었다.
<와아아아!>
노팅엄의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디가 로드의 패스를 환상적으로 트래핑해서 바로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테디는 수비를 달고 들어오는 미할리스에게 컷백 패스를 건네줬다.
미할리스는 수비수와의 몸싸움을 이겨내며 공을 잡고, 그대로 뒤로 패스했다.
뒤에는 수비수가 마크하지 않고 있는 라이언이 있었다.
라이언은 망설임 없이 발등으로 공을 때렸다. 공은 회전 없이 붕 떠서 흔들리며 레스터의 골키퍼를 농락했고, 골망을 흔들었다. 홈 관중이 전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양팔을 휘저었다.
"와우!"
로드 또한 그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지르며 제롬을 향해 우쭐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제롬은 '이것 봐라···.'라는 얼굴로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났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제롬은 후반전이 시작하고 1분 만에 다시 앞서나가는 골을 넣었다.
프리미어리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프리미어리그···."
잭슨이 스코어보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노팅엄의 팬들이 수고한 선수들에게 손뼉을 쳐 주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선수들 또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팅엄 2 – 3 레스터
솔직히 잭슨은 이번 경기에서 비기거나 이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대 선수들은 잘 준비돼 있었고, 정신무장 또한 완벽하게 돼 있었으며··· 지난 시즌부터 이어진 탄탄한 조직력과 경험이 있었다.
잭슨은 데뷔전을 치른 루앙이 2-2를 만드는 동점 골을 넣었을 때까지만 해도 무승부나 승리를 믿었다.
하지만, 레스터시티가 11번의 패스를 연달아 성공하며 제롬에게 공을 갖다 주는 순간 노팅엄이 아직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칠 점이 많았고, 발전할 점도 많았다.
졌지만, 잭슨은 남은 37경기에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포터,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경기였어요."
어느새 바디 감독이 다가와 있었다. 자신의 아들뻘인 감독이었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팀을 이렇게 하나로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군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안 질 겁니다?"
잭슨의 말에 바디가 웃었다.
"진심으로 무섭군요."
"그렇습니까?"
"예. 노팅엄 선수들은 아직 프리미어리그 템포에 적응하는 단계니까요. 다들 젊은 선수들이니까 적응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바디는 잭슨과 악수하고 떠났다.
잭슨은 다시 한번 스코어 보드를 바라봤다. 배울 게 많은 경기였다고 해도 진 건 아쉬운 거였다.
잭슨은 실수는 한 번뿐이라고 중얼거리며 터널 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너무 느렸어. 더 빨리 생각하고 움직여야 해."
그러다가 터널 근처에서 노팅엄의 선수들이 모여 얘기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이들은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감독님이나 코치님의 전술은 문제가 없었어. 그냥 우리가 부족했어. 상대보다 느리게 움직여서 기회를 줬고, 졌어. 그래서 열 받아."
"최선을 다해서 공략하니까, 쟤네는 그 이상의 수준으로 덤벼오네··· 이게 프리미어리그구나."
"다음에 이기면 되지. 내일부터 잘 준비해 보자고."
선수들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무대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음 경기가 더비 카운티지?"
"'해리 더비'잖아."
"무조건 이기자."
"작년 리그 5위 팀을 상대로 1점 차로 졌는데, 15위인 더비 카운티를 상대로 지면 안 되지. 뭉개 버리자."
무조건 이기자고 말한 해리 킹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은 잭슨이 할 피드백을 자기들끼리 다 하고 있었다.
잭슨은 오늘은 잘못한 것에 대해 지적 정도만 하고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첫 번째 동화 더비는 그렇게 끝났다.
**
"···그쪽 선수들이 우리한테 악감정 있습니까?"
"딱히···? 아, 해리는 있죠."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더비 카운티 단장의 우울한 말에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지난 경기에서 아쉽게 패했던 건 어느새 머릿속에서 싹 지워져 있었다.
대신, 멋진 점수 차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했다.
노팅엄 6 – 0 더비
부상에서 돌아온 할리가 한 골, 미할리스 해트트릭, 로드 프리킥 헤딩 골, 루카 중거리 골, 그리고 루앙의 3어시스트까지.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에서 노팅엄은 마치 빅클럽처럼 완벽한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주의 베스트 일레븐은 대부분 우리 차지일 것이다.
더비의 원정 팬들은 장례식에 온 것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심지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팬들도 있었다.
강팀에게 아쉽게 지고, 약팀에게 완벽하게 이기는 건 팀으로서 아주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따야 할 승점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니까.
개막전에서 패배한 직후 경기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사실도 기뻤다. 우리 선수들의 멘탈이 무척 강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득점력도 마음에 들었다. 두 경기밖에 안 치렀지만, 경기당 네 골이었다.
시즌 초반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떻겠냐고 제임스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경기를 지켜봤다.
노팅엄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6-0으로 경기를 마쳤다.
이번 시즌에는 적어도 10위 안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노리는 팀한테 아쉽게 졌으니 유로파리그에 나갈 수 있는 6위 안에도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 봤다.
< 53. 동화 더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