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새로운 물 (1) >
영국의 대학교에서는 개학 직전 신입생들을 위해 Freshers Week라는 기간을 제공한다.
이 일주일 동안 신입생들은 낮에 소사이어티(동아리)에 가입하고, 대학교 생활이 어떤지 간접적으로 배우며 저녁에는 펍이나 클럽에서 먹고 논다.
하지만, Freshers Week가 끝나고 개학하면 교수들은 인정사정없이 온갖 과제와 시험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싱그러웠던 트렌트 대학교의 법학과 신입생 셋은 도서관의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노숙인 같은 몰골을 한 채로 과제 중이었다.
이들은 아침부터 시작해 점심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지금까지 점심 먹을 때나 잠깐 바람 쐴 때 말고는 같은 자세로 과제 중이었다.
멕시코 출신의 쿠노가 옆의 모니카와 야우에게 작게 속삭였다.
"Freshers Week는 사기였어··· 더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 주말인데 이게 뭐야. 심지어 개학하고 첫 번째 주말인데."
남아프리카 출신의 야우가 굳은 결의를 한 얼굴로 둘에게 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떨까? 내일 하면 되잖··· 모니카, 뭐해?"
영국 출신의 모니카가 과제용 노트와 전공 책을 정리하는 것도 귀찮았는지 가방을 테이블 밑에 받쳐두고 쓸어 담아 집어넣고 있었다.
모니카가 가방에 짐을 다 집어넣고 말했다.
"짐 싸잖아. 가자. 우리끼리 소사이어티 활동을 좀 일찍 시작하자고."
"역시 쿨해. 따르겠습니다."
야우가 들떠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쿠노가 엄지를 들며 전공 책을 닫았다.
셋은 빠르게 도서관에서 도망쳤다.
"에세이! 퀴즈! 발표! 다 엿이나 처먹어라!"
"주말 동안 이거 세 갤 다 하는 게 말이나 돼?"
"정신 나갔다니까? 우리가 잠을 안 자는 줄 알아."
트렌트 대학교 신입생 3인방은 교수들을 욕하며 교정을 걷고 있었다. 지나가던 재학생들이 그들의 얘길 들으며 작게 웃었다.
쿠노, 야우, 모니카.
영국의 대학교에는 과방 같은 게 없지만, 이들은 Freshers Week 기간에 같은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함께 다니고 있었다.
이들이 가입한 소사이어티는 매주 토요일마다 여러 종류의 위스키를 즐기는 활동을 했다. 이들은 모임 시간이 보통 저녁 먹은 후라고 지난주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었다. 곧 소사이어티의 회장이 메시지로 공지해줄 것이다.
아무튼, 이들이 소사이어티 활동을 조금 일찍 시작하자고 한 건··· 술을 마시자는 얘기였다.
셋이 희희낙락하며 대학교를 거의 다 빠져 나왔을 때, 이들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렸다.
쿠노가 스마트폰을 켜니 소사이어티의 회장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모임은 밤 10시에 열겠습니다. 노팅엄 FC의 할인권을 잔뜩 얻는 바람에 우리 소사이어티에 소속된 재학생 회원들이 전부 경기를 보러 가게 됐거든요. 그래서 경기 끝나고 모임을 개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경기에 관심 있는 신입생은 얼마든지 따라와도 좋습니다. 할인권 많아요. 경기도 정말 재밌고.
쿠노가 갸웃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머지 둘의 표정도 비슷한 걸 보니 같은 메시지를 읽은 것 같았다. 쿠노가 먼저 물었다.
"어떡하지···?"
모임이 일곱 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세 시간이나 붕 떠 버린 것이다.
노팅엄의 경기는 지난주 모임 때 위스키를 마시며 TV로 잠깐 본 게 다였다. 선배들이 좋아하는 팀인 것 같더니 오늘처럼 경기까지 보러 갈 줄은 몰랐다.
야우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 고민하고 있으니 모니카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스마트폰을 켜며 말했다.
"고민되면 우리도 가자고 하자."
"어라? 너 축구에 관심 있어?"
"아니, 나는 미식축구 팬이긴 한데··· 노팅엄은 몇 년 동안 가장 유명한 팀이었거든. 팬들이 놀기 좋은 경기장으로. 적어도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과제까지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알차게 보내야 하잖아."
모니카의 말에 쿠노와 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모니카는 바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기야! 여기!"
트렌트 대학교에서 가장 큰 광장의 한 부분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의 규모에 쿠노를 비롯한 셋은 움찔했다.
사람들은 전부 노팅엄의 녹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을 부른 회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라니까! 신입생들. 빨리 와."
회장의 부름에 셋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무리로 향해야 했다. 스미스가 말했다.
"자, 여기 티켓이야. 참고로 이거 프리미엄석 티켓이다. 일반석보다 비싼 데야."
"정말요? 감사합니다."
"위스키는 아니지만, 거기서도 술판을 벌여보자고. 노팅엄 홈 경기장 맥주는 알아주거든."
셋은 티켓을 나눠 받았다. 회장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말이 많았다. 회장이 주절주절 말했다.
"이번 주는 개학 첫 주라서 경기장은 안 가고 TV로 보면서 모임을 하려고 했는데··· 같은 과 쏜 선배가 할인권을 이용해서 일단 100석을 예매해놨다고 하는 거야 글쎄···. 우리는 노팅엄 팬들이라서··· 그 말 듣자마자 다 가자고 하는 거야. 그래서 모임 시간을 미룰 수밖에 없었어."
"괜찮아요. 모임 시간이 딱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재밌을 것 같고. 축구장에 가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거든요."
모니카가 시원시원하게 말하자 회장이 미소지었다.
"재작년에 나도 쏜, 마야 선배한테 끌려서 경기장에 갔다가 팬이 됐거든? 너희도 그랬으면 좋겠네."
"노팅엄 경기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경기뿐만이 아니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회장이 고민하고 있으니 옆에서 훤칠한 동양인 남자 하나가 회장의 어깨를 잡았다.
"얘네는 누구야?"
"아, 우리 소사이어티 신입생들이에요."
"의학과 5학년인 손민국이라고 해. 그냥 쏜이라고 부르면 돼."
손민국의 인사에 셋은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이어서 손민국이 물었다.
"아까 경기가 그렇게 재밌냐고 했지?"
"아··· 네."
손민국은 대답한 모니카를 주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기뿐만이 아니라 즐길 거리가 가득해. 음식도 맛있고, 길거리 공연가들도 잔뜩 있고, 시간 남으면 VR 체험장도 들어갈 수 있고··· 사진 찍을 곳도 많아.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특유의 분위기야. 수만 명이 같은 응원가를 부르고, 응원하는 선수들이 잘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특별한 순간이거든."
응원가에 대해 얘기하는 손민국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진지하고 아련했다. 그래서 셋은 노팅엄을 응원하러 가는 것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그때, 사회인 티가 물씬 나는 여자가 손민국을 불렀다.
"민국아. 뭐해."
"마야, 아, 너희들도 인사해. 오늘 할인권에 좌석 예약까지 해준 분이야."
"분이라니··· 내가 아무리 내년에 졸업이라지만, 너무 늙은 사람 취급하는데."
"하하, 그럴 리가."
마야와 손민국은 신입생과 얘기하고 있다는 걸 잠시 잊었는지 둘이 투닥투닥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용히 있던 회장이 말했다.
"마야 선배는 졸업 학년인 5학년이고, 작년부터 노팅엄에서 팀닥터로 실습을 하면서 스포츠의학 쪽으로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어. 나중에 의사 면허증을 따자마자 노팅엄에서 정식 팀닥터가 될 거라고 하셔."
프로스포츠 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해 보인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의 눈에는 더.
모니카는 눈을 반짝이며 마야에게 말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싸게 경기를 볼 수 있게 됐어요."
"고마워. 얘는 은혜도 모르거든."
마야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손민국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손민국은 행복에 겨운 것처럼 들리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쿠노와 야우가 부러운 듯 잠깐 쳐다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원래 노팅엄이 이렇게 인기가 많나요?"
"우리 학교 다니는 사람 중에 1/3 정도는 노팅엄 경기를 볼걸? 물론 경기장에 가는 사람들은 그것보단 적고··· 보통 친한 사람들끼리 같이 가지만, 이번 직관은 내가 표를 구해오고, 소사이어티 '레드로즈'가 주최한 거거든.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을 거야."
모니카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딱 봐도 공대생같이 생긴 사람들도 있었고, 음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했다.
그때, 마야의 헤드락에서 빠져나온 손민국이 말했다.
"참고로 내가 레드로즈의 회장이야."
"레드로즈는 무슨 소사이어티인가요?"
손민국이 시무룩해져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 소사이어티 소개 안 봤구나··· 노팅엄 구단에 정식으로 인정받은 트렌트 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만든 서포터즈야. 한 마디로 노팅엄을 좋아하고 열심히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 소사이어티 두 개 드는 것 정도는 괜찮으니까 셋 다 관심 있으면 나중에 회장 통해서 연락 줘. 여기 모인 사람들 전부 우리 소사이어티 사람이니까."
"몇 명이나 되는 거예요?"
"신입생들이 들어오면서 활동하는 사람들만 백 명이 넘어. 엄청나지?"
셋은 각자 놀란 얼굴들을 했다.
그때, 다른 학생이 손민국에게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갈 시간이네. 자, 출발하자."
"걸어가는 거예요?"
"응. 소규모로 갈 땐 버스 타고 가는데··· 이렇게 많으면 어쩔 수가 없어서. 걱정 마, 40분이면 도착하고 가는 내내 심심하지 않을 거야. 구경거리가 정말 많거든."
손민국의 설명에 모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민국과 마야가 앞장서 걸었고, 모니카를 비롯한 신입생 3인방이 뒤를 따랐다.
그 뒤를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 백여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두근거린다."
야우의 말에 모니카와 쿠노도 동의하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렇게 20분이 지났을 때부터 손민국의 말대로 길거리 공연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점상도 등장했다.
또한, 이들처럼 노팅엄을 응원하러 가는 팬들도 잔뜩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행렬이었다.
모니카는 이런 모습이 신기했지만, 마야와 손민국은 이런 풍경이 익숙해서 별생각 없는 모양이었다. 둘의 얘기에 푹 빠져 있었다.
"너랑 경기 보러 가는 게 얼마 만이야."
"나는 맨날 경기장에 왔었다고. 네가 스탭 자리에 앉아있는 바람에 같이 못 본 거지."
마야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넷이서 같이 경기 보러 가던 예전이 그립기도 하네··· 코피랑 히메나는 못 온대?"
"응. 런던에서 행사가 있대."
"아쉽다. 그래도 둘 다 잘 돼서 다행이야. 넌 대학병원에서 실습 잘하고 있어?"
"그냥저냥 하고 있지 뭐. 아직도 진로 고민 중이야. 나도 팀닥터 쪽으로 진로를 새로 잡아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그럴래? 내가 공부 가르쳐줄 수는 있어. 안 그래도 규모 커져서 팀닥터 더 뽑을 수도 있다고 하거든."
"정말? 나중에 더 얘기하자."
"그래."
이어서 손민국이 새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티켓이 전부 프리미엄 석이라지만··· 전부 함께 앉아서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아니? 다 비슷한 구역에 모아서 예약한 건데?"
"어떻게?"
"나 직원이잖아. 내가 대학생들 100명 정도랑 같이 경기를 보고 싶은데 어떡하냐고 조이 운영팀장님께 여쭤보니까 행사 식으로 해서 이렇게 잡아주셨어. 돈은 나중에 모아서 내라고 하셨고."
"그래도 돼?"
"응. 단장님도 신입생들 들어오는 시즌에는 얼마든지 이래도 좋다고 하셨어. 원래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었대. 근데 내가 아는 사이라고 해서 나한테 맡긴 거고."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손민국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마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 나도 함께 응원하는 거니까··· 화이트로즈 애들한테는 지지 말자?"
"당연하지."
**
홈 경기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 나를 비롯한 직원들은 경기장에서 가장 큰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조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노팅엄 대학의 학생들로 구성된 서포터즈 화이트로즈와 트렌트 대학교의 학생들로 구성된 서포터즈 레드로즈의 좌석을 바로 옆으로 배정했어."
"좋아. 혹시라도 싸움이 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보안요원 많이 배치해 줘."
내 말에 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마리아가 말했다.
"이번 시즌 1분 시리즈도 전부 완성했습니다! 업데이트가 필요한 선수들의 영상도 다 수정했고요."
"잘했어요. 마리아."
이어서 트렌트 대학교와 노팅엄 대학에 막 입학한 신입생들은 노팅엄의 팬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준비한 계획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직원에게 차례로 들었다.
다른 구단들과는 다르게 우리 구단의 연례 행사였다.
노팅엄시의 인구 중 20%가 대학생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고를 다 들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년 대학, 대학교의 신입생 중 25% 정도가 팬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그 비율이 30% 이상 올라왔으면 좋겠네요."
"저희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새 팬들이 많이 늘어나겠죠? 한동안 바빠지겠어요."
마리아가 기쁜 듯 말했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표정들이 밝았다.
우리 구단은 이 시즌만 되면 팬들의 수가 늘었다.
물론, 졸업생들이 있어 구단에 방문하는 팬의 숫자는 비슷했다.
하지만, 졸업생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더라도 노팅엄을 계속 응원해줬다.
졸업생들을 일부 조사해본 결과, 일 년만 우리 구단과 함께한 학생들은 10% 정도. 이 년 동안 우리와 함께한 학생들은 25% 정도, 올해 졸업한 학생들은 50% 정도가 다른 지역에서도 우릴 응원해주고 있었다.
아마 좋은 기억을 얼마나 남겼냐에 따라 비율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더 열심히 해야 할 동기부여 중 하나였다.
"팬들이 너무 많아지면 경기장 증축을 또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휴. 힘들겠다."
내 농담 섞인 투덜거림에 직원들이 웃었다.
할 게 정말 많았다.
매해 개최하는 공모전도 해야 하고, 인턴십 자리도 더 늘려야 했다.
할 일은 많았지만, 즐거웠다. 대학교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곳. 세계 명문 대학 중 하나인 트렌트 대학교와 영국 내의 훌륭한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노팅엄 대학의 인재들이 우리 구단을 위해 아이디어를 내주고, 일을 해주고··· 장기적으로는 팬이나 직원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들어오는 것이다.
구단에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신입생에게 가능한 한 많이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거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오늘 경기 행사부터 잘해 봅시다."
< 54. 새로운 물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