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새로운 물 (2) >
-자기야. 힘내.
-걱정 마. 오늘 컨디션 최고야.
-우리 소사이어티 애들이랑 같이 왔어. 열심히 응원할게♥
-고마워. 이따 봐♥
스칼렛은 빙그레 웃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칼렛, 스칼렛. 헌터 선수랑 연락한 거지?"
"선배, 헌터는 평소에 어떤 사람이에요?"
동기부터 시작해서 의류디자인 과 후배들까지, 스칼렛과 친분 있는 사람들은 다 질문 하나씩 던지고 있었다.
스칼렛은 어색하게 웃으며 짧게 답했다.
"경기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좋은 사람이야."
이 정도만 대답해도 좋은지 주변에 모인 노팅엄 대학의 학생들과 자신과 같은 졸업생들이 꺄아거렸다. 남학생들 또한 스칼렛의 입에서 나오는 선수에 관한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원래 스칼렛과 테디는 친한 사람들 정도에만 둘이 만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언론에는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 데이트를 해 왔다.
하지만, 테디가 국가대표에 승선하고 노팅엄이 점점 유명해지는 만큼 파파라치도 늘어나는 바람에··· 자동차 안에서 키스하는 장면이 언론에 떡 하니 나가버린 거다.
스칼렛의 집에서 난리가 났었지만, 테디가 직접 집에 찾아와서 무마됐다.
스칼렛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도 금방 극복할 수 있었다. 테디와 많은 대화를 하며 이렇게 될 걸 예상한 덕분이기도 했고, 애초에 스칼렛의 성격이 주변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스칼렛은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의 Wags(Wives and Girlsfriends, 스포츠 스타나 유명인들의 부인과 여자친구를 가리키는 약어) 중 가장 조용하고 평범한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죄다 모델, 연예인, 인플루언서 등을 직업으로 가진 Wags들 사이에서 스칼렛은 전공을 살려 런던의 의류 디자인회사에서 평범하게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스칼렛이 마약이나 술을 하는 것도 아니라 일 열심히 하고, 데이트하는 게 다여서 한 언론은 'Wags가 다 스칼렛 같았으면···.'이라는 기사도 낼 정도였다.
아무튼, 지금 스칼렛은 Wags로서의 삶도 받아들인 채 즐겁게 살고 있었다.
"자자, 다 모였으니까 경기장으로 가자."
"네~."
스칼렛의 가장 친한 친구, 올리비아가 스칼렛을 질문의 늪에서 건져줬다.
올리비아가 스칼렛의 팔짱을 끼고 맨 앞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은 질문하기 어려운 위치가 돼 스칼렛은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나 잘했지?"
"응."
"요즘 일하는 건 어때?"
"피곤하긴 한데 재밌어. 너는?"
"···때려치우고 싶지. 나도 뒤에 애들처럼 다시 학교 다니고 싶다."
스칼렛은 시무룩한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주며 위로했다.
둘은 올해에 졸업하고, 각자 취직해서 사회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학생 때처럼 즐길 거야."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는 졸업생들이 꽤 있었다. 모두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고 들뜬 모습이 마치 학생 때 같아 보였다. 실제로도 졸업한 지 몇 달 안 지나긴 했지만.
노팅엄 대학의 학생들이 모인 노팅엄 FC를 응원하는 서포터즈이자 소사이어티 화이트로즈는 졸업한 학생들도 한 달에 한 번 함께 직관을 가기 위해 모였다.
오늘은 신입생들도 들어왔기에 더 뜻깊은 날이었다.
스칼렛이 뒤를 돌아 백여 명의 학생들을 바라봤다.
노팅엄의 팬이 많아진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테디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
"응, 소사이어티 회장이 도와달라고 해서 물어보니까 노팅엄 단장님이 반기시면서 해 줬대. 시즌권 있는 애들은 프리미엄 석으로 자동 업그레이드, 신입생 애들은 많이 할인해주는 쪽으로."
"역시 인맥이 최고구나."
올리비아와 스칼렛이 함께 킥킥거렸다.
이어서 올리비아가 말했다.
"트렌트 대학교 애들이 모인 서포터즈 이름이 레드로즈라고 했지?"
"응. 펍 이름은 나무 이름 따서 짓고, 대학생 아래 젊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서포터즈는 꽃 이름을 따서 짓는대. 쟤네랑 우리 때문에 구단에서 새로 만든 방식이래."
스칼렛은 테디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말했다.
올리비아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트렌트 대학교 애들이랑 은근히 응원 경쟁했잖아. 오늘도 지지 말고 열심히 해보자."
스칼렛은 모처럼 느껴지는 설렘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
[신규 팬들에게 유니폼을 드립니다!]
트렌트 대학교 법학과 신입생 모니카가 팻말 앞에서 멈춰 섰다.
팻말 옆에는 꽤 큰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고, 퀴즈쇼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아아! 아깝습니다! 재도전은 얼마든지 가능하니 줄을 다시 서 주세요. 그리고, 승자인 두 분은 유니폼 받아가세요.>
"감사합니다!"
교양 수업에서 본 적 있는 동갑 학생들이 유니폼을 꺼내 몸에 대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모니카는 그걸 빤히 보다가 옆의 안내직원에게 물었다.
"이거 미리 신청해야 하는 거예요?"
"아뇨. 대학교 신입생들은 대학교 학생증, 일반 신규 팬이라면 인터넷에서 예매한 표만 들고 오시면 참가할 수 있어요. 어때요. 하시겠어요?"
모니카가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았다.
2대 2로 퀴즈를 하고, 이긴 팀이 유니폼을 가져가는 것 같았다.
"음··· 퀴즈를 맞혀야 하는 것 같은데 어렵진 않나요?"
"5분 동안 퀴즈에 나올 내용 들을 미리 공부할 수 있어요. 문제도 안 어려워요. 하세요."
그때, 친구들이 모니카에게로 다가왔다. 쿠노와 야우였다.
"모니카. 왜 이렇게 빨리 걸어. 천천히 구경하면서 가지."
"미안, 구경하다 보니까 정신이 없어서··· 아, 그런데 이거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모니카의 말에 그제야 둘은 퀴즈가 치러지고 있는 무대와 신규 팬들에게 유니폼을 준다는 무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야우가 말했다.
"유니폼을 준다고? 저거 비싼 거잖아."
"재밌겠다."
둘 다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모니카는 방금 안내직원에게 들었던 걸 둘에게 설명했고 둘 다 참가 의사를 밝혔다.
쿠노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두 명 한 팀인데···."
"혼자 오신 분들이나 짝이 안 맞는 분들이 계시면 저희가 팀원을 구해드려요. 걱정 마시고 신청하세요."
안내직원이 끼어들었다.
셋은 고개를 끄덕이며 학생증을 내밀고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태블릿을 하나씩 받았다. 영상과 사진 자료, 그리고 설명이 빠르게 지나갔기에 셋은 무척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모니카와 야우가 먼저 퀴즈 장소로 나갔다.
아직 짝이 오지 않은 쿠노는 둘이 퀴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마야 선배님. 쏜 선배님."
쿠노는 둘에게 방금 들었던 내용을 설명했다.
마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걸 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어··· 라며 중얼거렸고, 손민국이 부러운 듯 말했다.
"많이 좋아졌네. 나 같은 기존 팬에겐 뭐 없나."
"저기 멀리에 하얀색 부스에 기존 팬을 위한 이벤트 공간이 있어요. 저긴 식권, 굿즈, 할인권, 업그레이드권 등 더 실용적인 상품이 많지요. 지난 시즌 구단주님이 유니폼을 한번 뿌렸으니까··· 신규 팬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려고 하는 거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끼어든 안내직원의 말에 손민국은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안내직원은 할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신청자를 받기 시작했다.
마야가 그 모습을 보고 쿡 웃고는 손가락으로 퀴즈 무대에 올라간 후배 둘을 가리켰다.
"일단 저거 구경 하고 가자. 퀴즈도 맞춰보고."
"좋지."
손민국이 몸을 퀴즈 무대 쪽으로 돌렸다. 막 퀴즈가 시작하고 있었다.
*
모니카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그래서 상대 팀의 한 남자가 가슴 포켓에 넣어놓은 볼펜이 '노팅엄 대학'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들이 서포터즈 화이트로즈인 줄은 모르겠지만, 모니카는 경기장에 오는 내내 노팅엄 대학보다 응원을 더 잘하자는 말을 듣고 왔기에 절로 호승심이 일었다.
"더 열심히 하자."
"응? 당연하지."
야우는 쾌활하게 대답하며 정답을 말할 때 눌러야 할 벨 위에 손을 얹었다.
퀴즈 진행자의 옆에 세워진 스크린에 사진이 올라오며 진행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자, 시작해 보죠. 이 사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모니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태블릿에서 분명히 본 선수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띵!
<왼쪽 팀! 먼저 말씀해주세요!>
야우가 버튼을 눌렀다. 야우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스 슈테른베르크 입니다. 오른쪽 풀백이에요."
<정답입니다!>
모니카는 '오~.'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아까 태블릿에서 봤던 한스의 다른 정보들도 떠오르고 있었다. 근데, 왜 그것까지 보여준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진행자가 말했다.
<여기서 보너스 문제입니다. 한스에 관해 두 개 이상의 특징을 말해주시는 분께 텀블러를 드리겠습니다.>
모니카가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상대 팀이 벙쪄 하는 게 보였다.
모니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성격이 정말 좋은 선수라고 했습니다. 조용해서 외부에는 존재감이 없지만, 사교성이 좋은 편이라 드레싱룸에서 선수들과 잘 어울린다고 읽었어요. 다만, 취향이 좀 아저씨 같아서··· 선수들 사이에서 엉클, 미스터 등으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아, 독일인이라서 Onkel이라고 부른다고도 했죠."
진행자가 감탄하는 얼굴을 하며 박수를 쳤다.
<이걸 맞춘 분은 처음인데요. 정말 기억력이 좋네요. 기쁜 마음으로 텀블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다음 문제! 영상에 나오는 경기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 선수는 누굴까요?>
경기장 한가운데에 선수가 홀로 서 있었고, 팬들이 [당신은 노팅엄의 전설입니다.]부터 시작해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라는 카드섹션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정말 멋진 영상이었기에 모니카는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벨을 누르려는데 상대 팀이 먼저 눌러버렸다.
"알렉산더 샌더스입니다! 은퇴한 선수죠."
<정답입니다! 두 팀 다 치열하군요. 그럼 다음 문제는 더 어렵게 가 보겠습니다.>
*
"5분 동안 집중해서 공부하고, 퀴즈쇼에서 맞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팅엄에 대해 알게 되죠."
"그렇군요."
"또, 이긴 팀이나 특별 퀴즈를 맞힌 팀에게 상품을 주면서 보상을··· 그러니까 즐거운 기억까지 줄 수 있습니다."
신규 팬들을 위한 여러 이벤트를 구경하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이 이벤트를 총괄한 홍보팀의 직원이 있었다. 직원은 내게 이벤트마다 어떤 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지 이론적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굳이 이런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이 직원이 개최한 이벤트는 전부 호황이었으니까. 신규 팬들은 참여하고, 기존 팬들은 구경하며 모두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레드로즈, 화이트로즈에 소속될 신입 팬들뿐만 아니라 라이트한 팬들도 참여할 수 있게 여러 곳에 이런 부스를 만들어뒀습니다."
"잘했어요."
첫인상으로 즐거운 기억을 주는 건 몇 번 강조해도 부족할 만큼 중요하다.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에 따라 우리 팬이 될 확률이 훨씬 높아질 테니까.
"이겼다!"
"나이스!"
퀴즈에서 승리하고, 기뻐서 얼싸안는 흑인 남자애와 백인 여자애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곧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
"···왜 옆이야?"
"왜인진 모르겠지만, 단장님한테 당한 거 같은데···."
마야와 손민국이 옆에 앉은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힐끔거리며 작게 대화했다.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노팅엄 대학의 사람들은 이쪽이 트렌트 대학교의 학생들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마야 반대편에 앉은 스칼렛도 올리비아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뭐야···."
"신경 쓰지 말고 응원하자."
양측의 수뇌진들은 서로 간섭하지 말고 응원하자고 암묵적인 합의를 내렸다.
그래서 경기가 시작할 때까지 신입생들은
"로드 버거 진짜 맛있다."
"나도 한 입 만 줘 봐."
노팅엄 푸드코트의 음식들을 프리미엄석에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삐이이익!
하지만,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마자 신입생들의 평온함이 끝났다. 선배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열정적인 응원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54. 새로운 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