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13번째 선수 (2) >
"볼 보이들을 5일 안에 13번째 선수로 쓸 수 있게 훈련 시켜야 한다니··· 갑작스럽네요."
훈련 시작 20분 전, U18 유소년팀 감독 알피가 떨떠름하게 말하며 잭슨을 바라보았다.
"일단··· 왜 13번째 선수인지 궁금하지 않나?"
"12번째는 당연히 팬들이죠."
알피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노팅엄의 스태프들은 12번째 선수가 팬들이라는 걸 머릿속에 꼭 넣고 있었다. 단장이 툭하면 언급하기도 하고, 팬들의 응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직접 봐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알피는 김도운이 부임하기 전부터 유소년
감독으로 있던 이 구단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코칭스태프 중 하나였기에 더 그랬다.
알피가 물었다.
"정말 5일입니까? 잭슨의 제안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급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볼 보이는 경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을 줄 아는 거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 바라지 않네."
"그럼···."
"우리가 공격할 땐 빠르게 공을 건네주고, 적이 공격할 땐 시간을 끌어주는 정도··· 최소 이 정도를 원하네."
"최소요?"
알피는 잭슨의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잭슨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코너플래그(코너킥을 차는 곳) 옆에 설 볼 보이 네 명과 상대 팀과 우리 팀 진영 측면을 담당할 네 명의 선수만큼은 경기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읽어줬으면 좋겠어."
전력분석팀이 분석한 결과 상대 팀과 우리 팀 진영에서 쓰로인 상황이 가장 많이 나왔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알피는 고민하지도 않고 물었다.
"그게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아시는 거죠? 시간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우리는 볼 보이를 육성하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도 없다고요."
알피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잭슨이 바로 말했다.
"다행히도 내가 전전팀에 있을 때, 볼 보이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어서 말야. 훈련 프로그램은 있네."
"예?"
"그때는 구단의 반대에 막혀 시도하지 못했고, 그만큼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만 일단 쓸 만은 할 거야."
알피는 잠시 입을 다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성인팀과 유소년 팀은 단장이 따로 있을 정도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는 편이였다.
그래서 알피가 잭슨에게 당당히 불만을 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노팅엄 FC라는 구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성인팀이다. 알피 또한 노팅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다. 심지어 프로그램까지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알피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일단 훈련 프로그램부터 주세요. 곧 훈련 시간이잖아요."
"그래그래. 역시 알피야."
잭슨은 알피에게 훈련 프로그램을 건넸다. 알피는 빠르게 훈련 프로그램을 읽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물었다.
"유소년 선수들을 성인팀 전술 설명 때 참관하게 하겠다는 거 맞죠?"
"그래. 경기 흐름을 읽으려면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성인팀 선수들과 합도 맞춰보고?"
"맞아."
"괜찮을까요. 유소년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부담될 것 같은데···."
잭슨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알피의 우려에 동의해줬다. 하지만, 잭슨은 알피와는 다른 견해도 말해줬다.
"성인팀 선수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직접 도움을 주는 경험은 이들에게 강렬한 동기부여를 안겨줄 거야. 또한, 추억도 줄 수 있겠지."
유소년 단계에서 프로로 넘어가지 못하는 선수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래서 잭슨은 추억을 언급한 거였다.
알피는 잭슨이 말한 긍정적인 효과에 마음이 기울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주 훈련 계획을 전면 수정하겠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고맙네."
잭슨은 유소년 선수들에게 뭘 해야 하는지 보여줄 준비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다.
알피는 바로 스마트폰을 켜 유소년 팀의 단장, 토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두 번도 울리기 전에 토비가 전화를 받았다.
-알피?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연달아 이어지는 다급한 질문에 알피는 살짝 웃었다. 생각해보면 토비에게 아침에 전화를 건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알피는 토비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 일 없다는 것부터 말했다.
"아뇨. 유소년 팀에 문제 있는 선수는 없어요. 급히 규정에 관해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한 거예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규정이요?
"네, 한국에서 온 유학생 세 명을 볼 보이로 쓸 수 있나요?"
-아··· 잠시만요. 5분 내로 알려드릴게요.
공식 경기에는 나가지 못하더라도 알피는 성실한 유학생 세 명을 팀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셋 다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기량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더 발전할 여지가 컸기에 오히려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알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괜찮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
"원래 성인선수들이랑 함께 훈련하는 날에는 패스 주고받거나 러닝하거나, 어우러져서 연습경기 하는 식으로 가볍게 했대. 이런 적은 처음이래."
전우진은 불과 10분 전, 김율의 설명을 떠올리며 멍해진 정신을 다잡으며 단어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잭슨 감독은 전우진을 포함한 유소년 팀 선수들에게 리버풀전을 도와달라고 말하자마자 바로 성인팀 선수들을 불러 전술 지시를 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잭슨은 유소년팀 선수들에게
"집중해서 들어줬으면 좋겠다. 볼 보이는 경기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해."
라고 말했다.
성인팀 전술 설명 시간은 무척 가치 있는 시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전우진과 송민재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잭슨은 성인팀에게 말할 때, 말이 무척 빠르고 악센트가 독특했다.
그래서 통역해주는 김율 조차 알아듣는 것도 벅차했다.
"테디와 요한에게는 수시로 중앙으로 침투해 할리와 쓰리톱처럼 움직이라고 했어. 그리고··· 어어어···."
김율은 전문통역가가 아니었기에 점점 말을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전우진이 말했다.
"우리한테 설명 안 해줘도 돼. 일단 알아듣는 데 집중해."
"미안···."
"아니야. 우리가 미안해."
그렇게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
잭슨은 그래도 전술 판을 가지고 각 선수의 등 번호가 적힌 말판을 움직여가며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우진은 잭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판 두개를 동시에 움직이거나 잭슨이 급하게 말할 때, 선수들과 의논하기 시작해 말이 복잡해질 때는 정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우진은 영어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그렇게 전술 설명이 끝난 직후, 유소년 선수들은 성인팀 선수들과 분리돼 옆 잔디 구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유소년팀 감독 알피의 지도 아래에 측면에 5명씩, 우리 팀 골대 뒤에 3명, 그리고 상대 팀 골대 뒤에 1명을 배치하고 간격과 담당 영역이 어느 정도 인지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볼 보이가 경기장의 꼭짓점 네 자리에 각 2명씩 총 8명이라는 걸 들었다. 네 명은 코너킥을 전담해서 신경 써야 하고, 네 명은 경기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으아아!"
"그것도 못 받냐. 레오!"
일부 유소년 선수들은 볼 보이 역할을 하기 위해 터치라인 밖에 서 있었고, 남은 유소년 선수들은 경기장 안에서 경기하는 척을 하다 볼 보이들이 던져주는 공을 받아 바로 쓰로인, 코너킥을 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리고 유소년 코치들은 인정사정없이 여러 방식으로 공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착지 지점 똑바로 잡아! 송!"
무척 높은 공을 받게도 해 보고,
"강하게 날아오는 공은 한 번에 잡으려 하지 말고, 한번 쳐서 속도를 죽인 다음에 받아!"
"으악!"
슛처럼 냅다 때려버리기도 했으며
"굴러오거나 바운드 되는 공은 무게중심을 낮추고 받아야지!"
일부러 바운드해 주기도 했다.
유소년 선수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진지한 얼굴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전우진은 돋보였다.
"전! 잘했어!"
전우진은 공을 품 안에 끌어안지도 않고, 어떤 방식으로 공이 날아오든 안정적으로 받아 바로 쓰로인이나 코너킥을 준비하는 선수에게 공을 건넸다.
"왜 이렇게 잘해? 다른 애들이 물어본다."
"중학교 때까지 농구도 했었다고 전해줘. 축구처럼 열심히 한 건 아니었지만."
"오케이."
김율의 물음에 그렇게 답한 전우진은 몹시 여유가 있었다.
"레오가 요령 좀 알려달래."
모처럼 다른 선수들에게 도움을 줄 기회였기에 전우진은 적극적으로 선수들에게 요령을 알려줬다. 코치들도 전우진을 제지하지 않았다. 다들 운동신경이 대단했기에 금세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소년 팀 에이스인 레오만큼은 손으로 공을 잡는 걸 잘하지 못했다. 레오는 평소에 늘 미소를 지은 채로 훈련에 임했었는데, 지금은 계속 진지한 얼굴이었다.
전우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레오가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그래서 쉬는 시간을 틈타 김율을 통해 전했다.
"오늘 유난히 열심히 하네."
라고.
레오는 바로 답해줬다.
"내 팀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잖아. 놓치기 싫어."
노팅엄을 내 팀이라고 말할 정도로 레오에겐 큰 애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우진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이어지는 훈련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전, 너는 잠시 후에 있을 성인팀 연습경기에서 상대 진영 오른쪽 측면에 배치될 거다.'라고 하네. 전우진, 축하해."
결국, 좋은 자리를 따낼 수 있었다.
이 팀에 와서 뭔가 성취한 건 처음이었기에 전우진은 자신감에 가득 찼다.
*
"너무 빨라."
"집중 안 해?"
"정신 차려!"
성인팀의 연습경기가 시작한 지 불과 10분. 전우진은 계속되는 지적에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연습경기라지만, 실전에 들어오니 자꾸 버벅거리게 됐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느렸고, 몸도 느리게 움직였다.
마치 뇌와 몸에 렉이 걸린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공을 잡은 전우진은 어찌할 줄 몰라했다.
'빨리 줘야 하나? 시간을 끌어야 하나?'
전우진은 주전 풀백인 한스가 빨리 달라는 손짓을 하자 그제야 공을 던져줬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이번에도 오히려 경기 템포를 죽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유소년 감독 알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교대해!"
이곳은 평소에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 주고, 불과 몇 분까지 인정받았다 해도 실전에서 못하면 냉정하게 빼 버리는 곳이었다.
전우진은 중앙선에 서 있던 레오와 자리가 교체됐고, 우리 팀의 공격일 땐 빠르게 공을 주고, 아닐 땐 느리게 주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전우진은 시무룩해진 채로 볼 보이 역할을 기계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그런 전우진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
전우진은 선수들이 다 떠난 훈련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었다. 김율과 송민재가 내일 잘하면 된다고 위로했지만, 잘 와닿지 않았다.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한 시간도 안 돼 박살 나버리는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까.
"야, 이거 마셔라."
그때, 전우진의 옆에 누군가 앉으며 익숙한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아, 형··· 고마워요."
전력분석관으로 일하고 있는 김건혁이었다. 친화력이 좋은 김건혁은 세 명이 유학 온 다음 날에 자리를 만들어 세 명과 연락처도 교환하고, 먼저 연락도 자주 주는 고마운 형이었다.
김건혁이 말했다.
"아까 훈련할 때 보고 있었다."
"······."
"참 냉정하지? 유럽이 원래 그래. 우리나라였으면 조금 더 시간을 줬을걸?"
전우진은 잠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본심을 말했다.
"경기 흐름을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당연한 거 아냐? 연습경기라고 해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인데."
"다른 애들은 잘하던데요···."
그 말대로였다.
레오는 볼을 잡는 게 좀 미숙하더라도 경기 흐름을 능숙하게 파악해 움직였다. 다른 유소년 선수들도 마찬가지였고, 같은 한국인 김율도 그랬다.
김건혁이 말했다.
"율이는 애초에 머리가 좋은 애라 그런 거고, 원래 있던 유소년 애들은 노팅엄의 전술에 익숙해서 그런 거잖아"
"···."
침묵하는 전우진을 빤히 보던 김건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전우진. 유럽까지 왔으면 이딴 일로 소심해지면 안 돼. 좀 실수하더라도 일단 덤비자는 마음가짐을 갖고, 혼자 있을 때는 끊임없이 공부해야지. 그리고 내일 잘하면 또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성인팀 선수들의 주전 자리도 하루 만에 바뀔 수 있는 건데, 유소년은 더 쉽다고."
김건혁의 따끔한 말에 전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김건혁이 계속 말했다.
"경기 흐름 같은 건 영상 보고 분석하면서 공부하면 금방 익힐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예?"
"도와주는 거 싫어?"
"아, 아뇨··· 근데 형 바쁘시지 않아요···?"
전우진의 말에 김건혁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맞아. 그래도 좌절한 유소년 선수를 봤고, 해결 방법까지 아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그 선수가 한국에서 건너온 지 한 달도 안 되는 녀석인데 어떻게 외면해?"
"형··· 감사합니다!"
전우진은 가슴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좌절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건혁은 전우진의 감동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일 어학당 끝나자마자 전력분석실로 와. 김율이랑 송민재도 같이. 아니, 유소년 선수 중에 헤매는 애 있으면 다 데려와도 돼."
< 57. 13번째 선수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