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13번째 선수 (4) >
잭슨이 전우진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전! 정말 잘했다. 너는 내가 볼 보이에게 원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특히, 경기를 읽는 눈이 정말 훌륭했다. 이대로 계속 노력한다면 앞으로 넌 틀림없이 훌륭한 선수가 될 거다."
이곳은 우리 팀의 드레싱룸이었다.
전반전을 마친 선수들은 각자 아이싱, 테이핑, 코치들과 전술에 관해 얘기하기 등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우진은 그 중심에 있었다. 선수들은 각자의 일을 하는 와중에도 전우진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직 유학생 신분이긴 하지만, 그런 건 나 같은 단장이나 코치들이나 신경 쓸 일이지 선수들은 전우진이 우리 팀의 유소년 선수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후반전에도 잘 부탁한다."
잭슨은 그렇게 말하며 전우진의 등을 짝 쳐줬다. 전우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밀려났다. 이어서 성인팀 선수들이 손을 들어 전우진과 하이파이브했다.
전우진은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를 얼굴로 몇몇 선수들과 더 하이파이브했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나는 마리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는 노팅엄 TV 촬영을 위해 카메라맨과 함께 여기 와 있었다.
"쟤가 한국인 애 중에 가장 열심히 해요. 이번 주에는 특히 더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전우진 선수는 유학 프로젝트 1기 멤버 중에 가장 기대하는 유망주라··· 결과가 좋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래야 2기 멤버도 훌륭한 유망주들을 보내줄 테니까요."
"근데 이런 자리는 왜 만든 거예요? 이거 도니가 제안한 거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잭슨을 찾아가 말했다. 드레싱룸 분위기가 크게 나쁘지 않다면 좋은 활약을 펼친 볼 보이를 불러 가볍게라도 칭찬해 달라고.
"유소년팀과 성인팀은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연계돼야 하기도하고··· 뭣보다 그거죠. 성인팀 선수의 가벼운 칭찬은 유소년 선수들에게 아주 큰 동기부여가 되고, 노팅엄이라는 팀을 사랑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마치, 로드가 그랬던 것처럼요."
로드의 얘길 꺼내자 마리아는 바로 이해했는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전우진은 선수 절반 정도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지금은 할리와 포옹을 하고 있었다. 할리는 네 덕에 골을 넣었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전우진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까 잭슨의 칭찬도 다 못 알아듣는 것 같던데 따로 얘기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우진이 인사를 마치고 이쪽에 있는 출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전우진에게 말했다.
"전우진 선수, 잠깐 밖에서 기다려요."
"왓? 아아, 넵!"
갑자기 한국어 들으니 헷갈리는 건지 버벅대는 전우진이였다. 좋은 모습이었다.
나는 마리아와 잭슨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와 전우진에게 방금 무슨 칭찬을 들은 건지 쭉 통역해줬다.
전우진은 아까부터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더 활짝 웃고 있었다. 근육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뭐, 그래도 보기 좋았다.
전우진의 나이는 만 16세. 키가 190cm 정도긴 하지만, 충분히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전우진에게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후반전에도 잘해요."
**
"감독님이 잘했다고 진지하게 칭찬해주셨고, 성인팀 선수들이랑은 다 하이파이브했어. 할리는 특별히 포옹까지 해 줬다고."
전우진의 입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이어서 김율이 영어로 전우진의 말을 모두에게 전했다. 유소년 선수들이 고개를 살살 끄덕이며 부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피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더 큰 열의가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알피 감독이 유소년 선수들에게 말했다.
"후반전에도 기회가 있다. 공이 나가자마자 바로 우리 팀이 공격할 수 있게 끝까지 집중하자. 알겠지?"
"네!"
유소년 선수들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지금 필드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근처의 관중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를 보내줬다.
알피 감독은 그들을 보며 웃고, 유소년 선수들을 향해 구호를 외쳤다.
"노팅엄!"
"가자!"
볼 보이 역할을 맡은 유소년 선수들이 힘차게 외치고 각자의 자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야!"
우드번의 교체로 들어온 콘세이상이라는 리버풀의 선수가 전우진에게 화를 냈다.
전우진은 순간 움츠러드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콘세이상은 키는 전우진보다 작았지만, 덩치가 두 배 정도 큰 괴물 같은 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난치지 마라."
콘세이상은 그렇게 말하며 떨어진 공을 주워가 경기를 재개했다.
전우진은 솔직히 억울했다. 리버풀의 쓰로인이어서 일부러 공을 늦게 줘야 하나 고민하긴 했다. 하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날아오는 공을 어찌어찌 잡긴 했는데, 콘세이상에게 건네주기 직전에 공이 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콘세이상을 놀리는 것처럼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도 전우진은 콘세이상의 진심으로 화난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이 비매너 플레이를 하는 건가 싶어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뒤에서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쟤네도 홈에선 그렇게 해. 넌 잘하고 있어."
터치라인 근처에서 뛰어다니며 몸을 푸는 교체 선수 몇이었다.
이들은 방금의 짧은 다툼을 목격했는지 전우진의 어깨를 두들기고 다시 몸을 풀기 위해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이들의 말은 짧았지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리버풀의 선수들을 다시 바라봤다.
반대편에서 볼 보이를 하는 김율에게 다른 리버풀 선수가 성질을 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전반전이 심하면 더 심했는데 그때는 리버풀 선수들이 여유가 넘쳤다.
전우진은 그 이유를 경기 흐름에서 찾을 수 있었다.
후반전에 들어서자 노팅엄은 리버풀과 5:5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전반전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경기력이 올라온 거였다.
노팅엄의 흐름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리버풀의 선수들이 볼 보이들의 견제가 거슬릴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잘 하고 있는 게 맞았다.
"쟤네도 사람이긴 사람이구나···."
전우진은 급해진 리버풀 선수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때, 전우진 옆쪽으로 공이 날아왔다. 리버풀의 미드필더가 패스 미스를 한 거였다.
전우진은 바닥에 놓은 공을 주워들고, 달려오는 한스에게 바로 던져줬다. 이어서 날아온 공이 다시 필드로 튕겨 들어가 경기를 지연시키지 않도록 골키퍼처럼 몸을 날려 붙잡았다.
심판이 전우진을 유심히 보더니 바로 경기 속행 사인을 냈다. 한스가 씩 웃더니 바로 공을 던져 노팅엄이 빠른 역습을 시작했다.
"잘했다! 덩치 큰 꼬마!"
뒤의 팬들이 그렇게들 외쳤다. 이 정도 칭찬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한, 박수까지 쳐 줬다.
괜히 뿌듯해졌다.
그렇게 전우진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노팅엄은 후반 종료 직전 코너킥 상황에서 로드의 극적인 헤딩골로 2-1 역전에 성공했다.
전우진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눈에 담아뒀다.
언젠가는 직접 이 필드에서 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축구경기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리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간혹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전우진의 구형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전우진은 스마트폰을 꺼 놓은 채로 경기장에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스마트폰을 켰다.
켜자마자 아버지에게서 7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전우진은 아버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우진의 아버지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랩을 하듯 급하게 말했다. 전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말이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듣겠어요."
-그, 그러니까. 너랑 똑같이 생긴 애가 노팅엄과 리버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나왔다니까? 설마 그거 너 맞냐?
"아, 내가 얘기 안 했었나 봐요."
전우진은 찬찬히 볼 보이로 경기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내 아들이 프리미어리그 경기장 위에서 뛰다니.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기장에는 못 올라갔는데요. 라인 밖에서 뛰어다닌 거지."
-그게 어디냐! 내일 회사 가서 자랑해야겠다.
"아버지, 제발···."
-와우,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도 난린데? 기사도 떴다.
전우진의 아버지는 박지석 시절부터 해외축구를 보기 시작한 골수 해외축구 팬이었다. 그렇기에 이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전우진은 괜히 쑥스러웠다.
-네 메신저로 링크 보내놨다. 쭉 읽어봐라. 너 오늘 해설자들이 칭찬할 정도로 잘했어.
"정말요?"
감독이나 선수들은 볼 보이들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기에 칭찬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설자를 비롯한 외부의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해 줬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전우진은 바로 링크를 찾아 들어갔다.
"잠깐만요. 금방 보고 올게요."
-그래그래.
<번역기사) 노팅엄의 13번째 선수>
전문은 천천히 번역해서 올리고, 요약부터 올림.
1. 노팅엄은 챔피언십에서 막 올라온 클럽임에도 뉴캐슬, 리버풀과 비견될 정도의 응원을 해주는 팬들이 있음. 이들은 노팅엄의 12번째 선수라고 불림.
2. 그런데 오늘 노팅엄의 볼 보이들이 리버풀과의 경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활약을 함. 특히 동점 골을 넣을 때 볼 보이의 냉정한 판단이 경기의 흐름을 바꿨음.
3. 이들에게 노팅엄의 13번째 선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음.
4. 노팅엄은 앞으로 홈에서 더 무서운 팀이 될 것 같음. 노팅엄의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 성적이 한 명의 축구팬으로서 정말 기다려짐.
(볼 보이들의 활약 모음 움짤)
전우진은 왜 이런 기사가 커뮤니티 BEST 1위 글인지 이해가 가지 않다가··· 리버풀 앰블럼이 달린 첫 댓글을 보자마자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열 받는다. 볼 보이들 때문에 경기가 말리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많은 구단 중 하나인 리버풀의 경기였기 때문이었다.
전우진은 댓글을 쭉 읽었다.
-콥멸망 ㅋㅋ 또 1위 앞에서 미끄러지죠?
└네다맹. 그래도 너네보단 순위 높음
└어디서 3위따리가 말을 섞으려고 함?
-번역 진짜 빠르네. 감사합니다.
-ㅋㅋㅋ 저 볼 보이 한국인이라는데?
└ㄹㅇ??
└공식 로스터에는 없는데? 구라 ㄴㄴ
└└기사 찾아왔다 (링크) 아까 TV에서 보자마자 찾아놨음. 우리나라 애 맞아
└└└주모오오오!
└└└└하다하다 볼 보이로 국뽕 ㅋㅋㅋㅋㅋㅋ
-왜 주목하는지 모르겠네. 뭐 대단한 거 했다고
└쿨병 ㄲㅈ
└네다음축알못. 빅클럽몇팀은 볼보이 훈련 따로 할 때도 있는데 그걸 모르네 ㅉㅉ
└└나 축구하거든? 저 볼 보이 새끼랑 같은 팀이었는데?
└└└ 네다음조기축구. 구라ㄴ
└└└└****
└└└└└(운영자) 위 유저는 욕설로 강퇴 했습니다.
└└└└└└ㅅㅅㅅㅅㅅ
온갖 댓글이 글 밑에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두 가지 성향의 댓글만큼은 눈에 계속 들어왔다.
-노팅엄 승격치고는 개 잘하네
-노팅엄 덕에 토토 몇 번 땀
-세 시즌 전부터 응원하고 있는데 매일매일이 행복하다. 너희도 노팅엄 응원해라.
-승격 첫 시즌 챔스 ㄱㅈㅇ!
노팅엄을 응원하는 댓글들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거품팀 아니냐. 경기 다 봤는데 경기력 밀려도 운으로 이기는 거 진짜 많던데
-솔직히 더 지켜봐야 함. 승격팀은 박싱데이 때 결국 다 떨어져 나감. 노팅엄은 딱 10위 아래 할걸?
└ㄹㅇ 노팅엄 고평가 극혐
노팅엄에 대해 조금이라도 나쁘게 말하는 댓글을 보면 기분이 나빠 괜히 비추천을 누르게 됐다.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들려왔다.
-우진아? 아직도 다 못 봤니? 거기 인터넷이 느린가?
"아, 아뇨."
전우진은 그제야 커뮤니티를 끄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무튼, 가서 잘하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
아버지의 간질거리는 말에 전우진은 황급히 말했다.
"여기 정말 좋은 곳이에요. 인종차별이라는 거 한 번도 못 봤고, 성인팀 직원들이 우릴 도와줄 때도 있고···."
얘기하다 보니 끝도 없이 장점이 나왔다.
노팅엄에 와서 불편한 건 단 하나, 언어뿐이었다.
전우진은 한참 동안 얘기하다가 문득 자기만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내 얘기만 했네요. 아버지, 집에는 별일 없죠?"
-당연하지. 우진이 네가 걱정이었는데, 정말 좋은 곳에 간 것 같아 이제는 정말 걱정 하나 없다.
"다행이네요."
-그래, 그럼 나는 자러 가야겠구나. 여긴 새벽이라서 말이다.
"아. 어서 주무세요."
-힘내라. 멀리서도 응원하고 있다.
"예."
힘차게 대답하니 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우진은 다시 한번 아까 그 커뮤니티에 접속해 글과 댓글을 봤다.
역시 노팅엄을 칭찬하는 글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반대면 정말 나빠졌다. 간간히 전우진을 칭찬하는 글도 있었다. 역시 기분 좋았다.
그래서 전우진은 계속, 집에 도착해서 자기 전까지 노팅엄과 자신을 칭찬하는 글을 찾아 읽었다.
전우진은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
"너 요즘 실력 엄청나게 는 거 같은데···."
송민재의 말에 전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거 같아. 뭐라고 해야 하지··· 경기장에서 엄청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리버풀전이 끝나고 2주가 흘렀다.
변화의 시작은 리버풀전이 끝난 바로 다음 날 훈련에서부터였다.
총 60분짜리 연습경기를 평소처럼 했는데, 전우진은 유소년 1군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상대 팀 공격수뿐만 아니라 전체의 움직임이 보였다. 마치 드론을 하늘에 띄워놓은 것처럼 훤하게.
그날 이후, 전우진은 유학생 신분이라 유소년 리그에 참가할 수 없었음에도 유소년 1군 팀과 함께 연습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감독 알피가 자길 보며 흐뭇하게 웃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아닌 척 눈을 피하긴 했지만, 틀림없었다. 김율과 송민재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비결이 뭐야?"
"열심히 해서···?"
송민재가 눈을 가늘게 뜨자 전우진은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다. 리버풀전에서 환상적인 경험을 해봐서 그런 거 같아. 그날 이후로 몸에 에너지가 넘쳐 흐르거든. 그 에너지로 열심히 하니까 잘 되는 것 같아."
그제야 송민재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다들 집중해라. 오늘 연습경기 A, B 팀 명단을 발표하겠다."
둘이 잡담을 나누는 새에 알피가 훈련 재개 준비를 마친 거 같았다. 전우진과 송민재는 허리를 바짝 세우며 알피의 말에 집중했다.
알피가 A팀. 그러니까 1군의 명단을 불렀다.
"존, 조, 전, 블랙캣···."
'전'이 바로 전우진이었다.
송민재와 김율은 2군 명단에 있었다.
둘은 전우진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꼭 따라잡을 거다."
"나도."
전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꼭 나중에 같이 뛰자."
그때였다. 유소년 코치 하나가 스마트폰을 든 채로 감독 알피에게 와서 귓속말했다. 알피는 요상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전우진을 향해 말했다.
"전! 너 대신 베르너가 들어간다."
"네?"
훈련 때 쓰는 영어 정도는 다 익힌 전우진이였다. 전우진이 당황한 얼굴을 하자 알피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바로 이어 말했다.
"너는 단장실로 가라. 위치는 알지?"
이유를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전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우진은 송민재와 김율을 비롯해 이제 많이 친해진 쓰리제이와 레오에게도 고개를 갸웃하며 이동했다.
그래도 알피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전우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단장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니 몇 초 만에 문이 먼저 열렸다.
김도운이 보였다.
"빨리 왔네요?"
"단장님. 무슨 일인가요···?"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괜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우진은 부모님이 걱정됐다.
하지만, 김도운의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받으세요. 노팅엄 FC 유소년 팀 정식 계약서예요."
"네?"
"리버풀과의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알피가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정식 유소년 리그에 출전할 수 있게 우리 팀으로 데려와야 한다고요. 원래 토비(유소년 단장)가 할 일이지만, 아무래도 전우진 선수의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라서 시간이 좀 걸렸네요."
전우진은 그제야 왜 자신이 단장실로 불려 왔는지 깨달았다.
전우진이 멍하니 서 있자 김도운이 더 설명해줬다.
"부모님의 검토를 다 받은 계약서예요. 아직 영어가 미숙하니 한국어와 영어 두 종류를 준비했어요. 직접 전화로 확인해도 돼요. 남은 건 전우진 선수의 사인뿐이에요. 그리고 전우진 선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중 하나가 FIFA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으로 오시겠다고 해요. 두 분 중 한 분이 일을 못 하는 대신, 전우진 선수의 주급은 꽤 괜찮은 편이죠. 봐요."
전우진은 계약서의 금액란을 봤다.
입을 열려고 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직 열여섯 살일 뿐인데 사촌 형에게서 들은 대기업 월급 정도 되는 돈이 주급에 적혀 있었다.
"물론, 세금 떼면 절반 정도로 줄어들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큰돈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노팅엄에서 오래오래 뛰어줬으면 하고요. 참고로 프로 경기에서 다섯 번 이상 뛰면 주급은 지금의 네 배로 올라요."
전우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목표가 이렇게나 빨리 눈앞에 나타났다.
김도운이 물었다.
"그동안 봐온 노팅엄은 어땠죠? 노팅엄에서 한번 뛰어보고 싶지 않나요?"
전우진은 여기 와서 겪은 일들을 쭉 떠올려봤다. 함께 더 큰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싶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축구만 열심히 해도 모두가 인정해주는 곳이었다.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그런 노팅엄 FC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인할래요?"
대답은 필요 없었다.
전우진은 씩 웃고, 펜을 들고 사인했다.
< 57. 13번째 선수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