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윈터브레이크 (1) >
"그게 대형입니까···?"
원정석을 다 덮는 규모로 전광판을 설치한다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가로 50m 정도에 세로 30m 정도의 몬스터급 전광판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관의 스크린도 이 크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고, 세계적인 규모의 광고판도 이것보단 작을 것이다.
솔직히 브랫의 과감한 제안이 농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 정도 크기라면 전광판 자체에 들어가는 기술력과 돈도 장난이 아닐 테고, 추가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할 테니까.
하지만, 브랫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 대형이 아니라 '초'대형입니다. 말실수했네요."
"설치해 준다는 말은 비용도 다 그쪽에서···."
"당연한 거 아닙니까?"
브랫의 확신 어린 되물음에 나는 그가 혹시 말을 취소하기라도 할까 다급히 말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브랫은 내 급격한 태세전환에 놀란 건지 멈칫했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킴 단장님은 행동이 빨라서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제안을 어떻게 거절합니까."
브랫이 빙그레 웃었다.
절대 손해 볼 거래가 아니었다. 아까 브랫이 언급한 대로 노팅엄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팀의 자금줄인 스폰서를 유치하기 더 쉬워질 것이다. 설치만 된다면 전 세계 축구 경기장에서 가장 큰 광고판으로 화제가 될 거니까. 그리고 우리 팀은 전 세계에 송출되는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된 팀이고.
나는 기쁜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물어야 할 걸 묻기로 했다.
"브랫은 뭘 원하나요?"
브랫이 워낙 노팅엄에 투자를 즐기긴 했지만, 다 자신이 이득 보는 일이 있어 행하는 것일 테다. 아랍 왕자라면 모를까 그는 미국의 기업을 직접 이끄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히 전광판의 명명권을 원합니다. 이 초대형 전광판의 이름은 우리 회사의 이름을 따 'BM 보드'가 될 겁니다."
"좋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에른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 AT마드리드의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아스날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처럼 스폰서의 이름을 대놓고 붙인 경기장도 있는 판에 전광판의 명명권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브랫이 계속 말했다.
"우리 회사의 광고를 비율로 보장받고 싶기도 하지만, 이 얘기는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죠. 조율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예. 그럼 몇 가지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브랫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는 새록새록 생각나는 궁금한 것들을 입 밖에 차례차례 꺼냈다.
"원정 팬들은 그렇다 치고, 측면에 앉은 팬들··· 특히 전광판 근처 좌석 사람들은 각도 때문에 잘 안 보일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타임스퀘어에 설치된 코카콜라 광고판을 아시나요?"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브랫은 그럴 수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해줬다.
"가로 12m, 세로 20m 크기의 대형 광고판을 1,700여 개의 LED 블록을 조립해 만들었습니다. 이 1,700여 개의 LED 블록은 각각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들어갈 수도 있는 거죠."
"3D 광고판이네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광고판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노팅엄의 경기장에 설치할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LED 블록의 개수는 5,000여 개입니다. 이 블록 전체를 사용하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전광판이 되는 거고, 블록을 기울인다면 전광판을 측면 쪽에서 보기 편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또, 블록을 조금 복잡하게 움직인다면 중앙과 양 측면, 그러니까 세 개의 스크린을 만들어 세 방향의 팬들을 전부 배려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되나요?"
"킴, 2029년입니다. 코카콜라 광고판이 나온 지 12년이 지났는데, 그게 안 되겠습니까?"
"오오···."
마치 변신 로봇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이런 것에 대한 동경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블록들이 움직여 여러 형태의 전광판으로 변신하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괜히 두근거렸다.
내 표정을 재밌다는 듯 보던 브랫이 물었다.
"의외로 원정 석을 줄이는 것에 대해서는 별말을 안 하시는군요."
"그건 준비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안 그래도 홈 관중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원정석을 줄이려고 했거든요."
지금 우리는 원정 팬들에게 5천 석 정도를 주고 있었다.
최근 회의에서 원정 팬들을 위한 좌석 숫자가 너무 많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가 5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음에도 원정석은 3천 석 규모였기에 우리도 2천 석 정도로 줄여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바르셀로나는 거의 1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 경기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원정 좌석을 몇백 석밖에 주지 않았다.
나는 이런 사정을 브랫에게 설명했고, 브랫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대형 전광판까지 경기 전 응원에 이용한다면 우리 노팅엄의 경기장은 원정 팀들의 무덤이 될 겁니다."
희번득하는 브랫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축구협회와 노팅엄시에 빠르게 문의해서 바로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브랫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봤다. 나 또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먹을 시간대가 되어 있었다.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요?"
브랫의 물음에 나는 미소지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예약해뒀습니다."
*
나는 브랫과 함께 훈련장 2층 복도를 걸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속으로는 브랫의 아들 로건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정사에는 전혀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브랫과 로건이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거다.
FA컵 경기가 이틀 전에 끝났고, 어제부터 코치진은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푹 쉬라고 했으니 지금쯤 집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옆의 브랫이 우뚝 자리에 멈췄다. 나는 설마 하며 계단 아래를 내려다 봤는데··· 1층에서 막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 로건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로건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춰있었다. 머리는 덜 말라 있었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샤워장에서 다시 코치실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휴가를 줬으면 제발 쉬러 가라고!!!'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기에 입을 다문 채 조심스럽게 옆의 브랫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표정이 거기 있었다.
브랫은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로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몇 초 동안 더 그러고 있었을까, 브랫이 먼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가죠. 미스터 킴."
"아, 예··· 로건. 휴가를 줬으면 집에서 제발 좀 쉬어요."
로건은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는 얼어있는 로건 옆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
직접 운전해서 호텔로 오는 동안 옆에 탄 브랫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호텔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후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브랫은 조용했다.
브랫은 점원이 차를 가져다줄 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술이 마시고 싶은데, 메뉴판 좀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우리의 요청대로 애피타이저보다 술이 먼저 나왔다. 브랫은 주문한 와인을 능숙하게 따고, 바로 자신의 잔에 담아 홀짝였다.
그리고 찰랑거리는 와인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킴은 알고 있었군요."
당연히 로건과 브랫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예. 크리스마스 즈음에 알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다시 한번 브랫은 입을 다물었다. 애피타이저가 나온 후에도 조용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브랫은 로건이 우리 팀에 와 있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까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브랫은 씹고 있던 음식을 완전히 넘긴 후에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로건이 어디 있는지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특히, 축구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면 구단 홈페이지에만 가 봐도 근황을 알 수 있더군요."
"···로건이 어디 있는지 계속 찾아봤다는 얘긴가요?"
브랫은 또 입을 다물었다. 차분하게 기다리니 브랫이 말했다.
"십 년 전에 로건과 아주 크게 싸웠습니다. 로건은 축구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고, 저는 최고가 되지도 못할 일을 왜 하냐며 로건을 몰아세웠었죠."
브랫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쓸쓸함이 느껴졌다.
"얘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고맙습니다. 킴."
브랫은 와인 한 잔을 또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저는 로건이 축구 분야 일을 하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저랑 똑같은 좌절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도 야구 데이터 분석가에 도전해본 적이 있었다는 거 아십니까?"
"···처음 들었는데요?"
"제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인데 모르다니, 실망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광이었거든요."
브랫은 방금 말이 농담이라는 걸 티 내기 위해 허허 웃었다. 나도 살짝 웃어주자 브랫은 계속 말했다.
"대학교에서 틈틈이 공부했고, 졸업하자마자 바로 도전했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도전했고, 제게 남은 건 실패라는 글자였습니다. 저는 메이저리그는커녕 마이너리그에서도 평범 이하의 데이터 분석가였습니다. 이른 나이에 제 짝이 돼 준 부인만 고생시켰죠."
브랫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반쯤 빈 와인 병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막 태어난 로건을 위해 원래의 전공을 살려 중소 가전 기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 일이 적성에 맞더군요. 저는 여러 사업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어느새 대표가 되었고, 회사의 이름을 BM으로 바꾸며 미국 최고의 가전 기업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로건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아내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음···."
브랫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저는 꿈이라는 명목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얼마나 최악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진작 가전 회사에 들어갔더라면 아내에게 행복한 오 년을 더 줄 수 있었겠죠."
브랫은 아내 얘기를 떨치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는 로건이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며 반드시 다른 길로 빠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로건은 다행히 어린 시절부터 뭘 잘하는지 또렷하게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수학과 물리에 천재성을 보여줬거든요. 그쪽 분야로 가면 적어도 인생을 허비하진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늘 최고가 될 게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주입하듯 말했죠.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하지만, 로건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로건 녀석은 대학교에서 졸업하자마자 스포츠 생리학을 복수 전공 했다는 걸 보여주면서··· 축구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원래 전공이었던 물리학과에서는 수석으로 졸업한 녀석이 스포츠 생리학과에서는 평범한 성적을 받았으면서 말이죠. 녀석은 나중에는 축구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순간, 제 모습이 겹쳐져 보여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로건은 그동안 키워주셔서 고맙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집을 떠났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로건과 브랫의 관계가 어느정도 이해가 가네요."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 이후 저는 로건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사람을 써서 지켜봤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고생하더군요. 도와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저는 로건이 완전히 마음을 접길 바랐기 때문에 꾹 참고 기다렸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길이 아니란 걸 깨닫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로건은 계속 버티며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갔습니다."
브랫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제 기대와는 다르게 로건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녀석은 기어코 독일 2부리그 수석코치가 되었고, 제가 반한 팀인 노팅엄의 수석코치 자리까지 차지했죠. 저와는 다르게 꿈에 한 발자국만 남겨두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요. 제 눈이 잘못되었었다는 걸요."
브랫은 그래서 사람을 붙이는 것도 그만두고, 지금은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잘못된 걸 깨달으니 십 년 넘게 지나있더군요. 이제는 로건을 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됐습니다."
"자리를 마련해드릴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브랫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조용히 지켜보는 거로 충분합니다. 언젠가는 다시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아, 혹시 로건 때문에 노팅엄에 투자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노팅엄에 대한 투자는 사업가로서 하는 겁니다."
"예. 브랫이 우리 팀을 좋아하는 게 정말 잘 느껴져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브랫은 다시 허허하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로건은 지금처럼 수석코치로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아들인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맞아요. 일만 잘하면 되죠.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할 거예요."
노팅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두 부자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 부자를 다시 연결해준다던가 하는 건 브랫이 거절했기에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래서 브랫의 쓸쓸한 얼굴을 밝게 만들어줄 말을 하기로 했다.
"브랫. 로건은 선수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아요. 칭찬을 정말 많이 해주는 좋은 사람이거든요."
"그런가요?"
"잭슨 감독님도 로건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무척 성실한 데다가 저번 뉴캐슬전의 승리에 큰 공헌을 할 정도로 능력도 있다고요. 그래서 잭슨 감독님은 직접, 로건에게 감독으로서의 노하우를 가르쳐주기로 하셨어요. 어제 들은 얘기에요."
자식이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인정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는 말만큼 부모에게 힘이 되는 말은 없다.
브랫은 안심한 얼굴을 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 60. 윈터브레이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