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로테이션 (1) >
고급스러운 호텔 방에 남미 사람으로 보이는 외형의 중년 남자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중년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통해 프리미어리그 관련 기사를 읽는 중이었다.
<노팅엄 FC, 10억 파운드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인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
[최근 노팅엄은 수많은 인수 관련 루머에 휩싸여 있었다. 이 루머는 얼마 전 카타르의 거부이자 세계적인 항공사를 운영하는 아크람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기에 더 크게 화제가 됐다.
아크람은 '10억 파운드(약 1조 5,000억 원)'로 노팅엄의 수뇌진에 공식 인수 제안을 했다고 말했고, 프로스포츠 역사에 손꼽힐만한 이 인수 이야기에 프리미어리그의 팬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노팅엄의 팬들은 자신들의 응원하는 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서로 갑론을박을 벌이며 잠 못 드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노팅엄의 팬들은 오늘부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단장 김도운이 세 시간 전, 우리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노팅엄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노팅엄의 입장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노팅엄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운영될 겁니다."
새 구단주를 맞이하면 자본은 확보할 수 있을지언정 현재 팀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팬들을 위한 정책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김도운은 말했다. 김도운은 이 점을 구단주 제임스와 깊게 논의했고, 구단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김도운의 입장표명을 듣고 우려를 내비쳤다. 그동안 잘해온 건 인정하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클럽이 될 것인 만큼 지금의 낭만적인 운영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노팅엄 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축구팬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구단주가 교체된 후 수익이 늘어나도 성적이 떨어지거나 엉뚱한 영입 등으로 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구단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과 팬들, 두 집단이 대조적인 의견을 내놓은 만큼 노팅엄의 다음 시즌 행보가 기대된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잘 나가네."
중년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로 다음 기사로 손을 가져갔다. 프리미어리그 기사란인데 1위부터 5위까지가 전부 노팅엄의 기사였다. 그만큼 노팅엄은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빅클럽, 노팅엄.>
[FFP라는 이름의 규제는 세계적인 거부들의 무분별한 돈 씀씀이를 막긴 했지만, 하위 팀에 투자하기도 어렵게 만든 실패한 정책이라는 의견이 꽤 있었다.
많은 축구 전문가와 팬들은 FFP 때문에 더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빅클럽은 없을 거라고 예상했었고, 노팅엄은 그 예상을 깨 버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경기 이후 SNS 조회수만 평소의 10배가 넘게 늘어난 노팅엄은 다음 시즌 스폰서들의 추가 유입과 전체적인 스폰서십 비용의 증가로 재정 규모가 웬만한 빅클럽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순식간에 성장했다.
또한, 31라운드인 지금 리그 5위라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빅클럽에게 필수적인 성적도 머지않아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년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기사를 더 읽지 않고 다음 기사를 눌렀다.
<해외로 뻗어 나가는 노팅엄 FC>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내는 중인 노팅엄이 동남아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뽑혔다.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동남아 지역에서 노팅엄 경기의 시청률이 세계적인 인기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을 근소하게 앞섰다고 한다.
또한, 이번 시즌 멋진 모습을 보여주며 중동, 아프리카, 동아시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대륙 등지에서도 점점 시청률과 화제성이 올라가는 추세라고 하는데···.]
중년 남자는 이제 두 문단도 채 읽지 않고 다음 기사로 넘어갔다.
중년 남자는 이번 기사의 제목을 보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돈방석에 앉을 노팅엄의 선수들>
이 기사에는 노팅엄의 선수들이 성적을 내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전체적인 몸값이 올랐다는 얘기가 하나하나 나왔다.
중년 남자는 이 기사를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했고,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했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달성한 레스터시티조차도 이 정도의 경제 효과와 팬층을 거느리진 못했다. 노팅엄이야말로 진정한 동화의 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년 남자는 스마트폰을 끄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소파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렸다.
"···동화의 팀?"
중년 남자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웃음이 나와 키득거렸다. 동화는 어린 애들의 장난일 뿐이다. 중년 남자는 동화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화는 현실을 못 이기지. 아이가 어른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 밑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를 모아 집어 들어 눈앞에 펼쳤다.
[코너] [피어스] [셰이] [아르망] [페린]
노팅엄의 선수 중 주전과 로테이션 급을 오가는 선수들의 이름과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서류에는 또 하나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추정 이적료]
[코너 1,500만 파운드 / 셰이 1,000만 파운드 / 페린 2,000만 파운드···.]
**
프리미어리그 종료까지 두 달도 안 남았다.
우리는 매 라운드를 치를때마다 3위부터 6위까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순위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아 구단 내부에서는 유로파리그 진출 확률은 90% 이상으로 보고 있었고, 챔피언스리그 진출 확률은 절반 정도로 보고 있었다.
전 세계 팬 샵의 물건들은 끊임없이 동나고 있었고, 제임스는 자신의 공장과 인맥을 동원해서 물량을 메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우리의 유니폼을 맡아준 아라크네는 우리 구단과 협약을 맺은 후 동남아로 진출해 규모가 몇 배로 커졌고, 다음 시즌 유니폼도 유니폼 선발대회에 자신 있게 나갈 수 있을 만큼 세련되게 뽑아줬다.
모든 게 아주 잘 풀리고 있었다. 더 좋을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로.
지금 하는 통화도 얘기가 아주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던 상대방이 불평을 토했다.
-킴, 정말 너무하군요.
"이 계약서를 승인하신 건 단장님입니다."
-하아···.
그때였다. 로드가 노크하며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로드에게 들어오라고 말한 후, 스마트폰 너머의 상대방에게 말했다.
"일이 있어서 끊어야겠네요. 자세한 얘기는 시즌 끝날 무렵에 하죠."
-킴 5,000만 파운드 정도에 협상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 선수를 헐값에 넘길 수는 없어요. 저 팬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전화를 바로 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수화기 너머의 단장이 워낙 간절하게 말해서 한 마디 더 해줬다.
"거절하겠습니다. 우리는 정 안되면 내년에 공짜로 계약해도 상관없어요."
-그, 그런···.
"아무튼, 끊겠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그럼 이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로드는 어느새 내 앞자리에 의자까지 끌어와 앉아 있었다.
"무슨 통화였어요? 내년에 공짜로 계약하다니요?"
"너희에게 줄 깜짝 선물이야. 당연하지만, 지금은 말 못 해주지."
로드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빤히 바라봤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해줬다.
로드는 금세 포기하고 이곳에 온 용건을 얘기했다.
"제 새 계약서 어디 있어요?"
"여기."
나는 준비해놨던 로드의 재계약용 계약서를 꺼내 로드가 보기 편하도록 방향을 맞춰 건넸다. 로드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펜 하나를 꺼내 사인할 위치를 찾았다.
계약서 내용도 읽지 않고.
나는 사인 하려 하는 로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야, 너도 할리 닮아가냐. 이 계약서를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한번 읽어보고, 고민도 좀 해 보고 그래야 할 거 아냐."
"고민할 게 있어요? 어차피 계약할 거고, 단장님이 절 등쳐먹을 사람도 아니고."
로드는 내 손을 떼어낸 후,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나는 헛웃음 소리를 내며 사인이 된 계약서를 받아들며 투덜댔다.
"망할 놈. 네가 안 읽으면 내가 설명해줘야 하잖아."
"그거 좋네요. 얘기해주세요."
능글맞은 로드의 말에 나는 핵심적인 계약 내용을 설명했다.
"매주 나오는 기본 주급은 7만 파운드에서 10만 파운드로 소폭 인상했어. 대신, 수당을 다양하게 집어넣었어. 출전 보너스, 무실점 보너스, MOM 보너스, 이주의 팀 보너스···."
로드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수당 항목을 계속해서 들었다.
"···마지막으로 미출전 보너스까지. 수당 항목은 11가지고, 모두 충족했을 때는 주급으로 대략 30만 파운드(약 4억 5천만 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돼. 충족하기 쉬운 수당 위주로 편성했으니까 네가 우리가 기대하는 평균적인 성적만 내도 주급으로 20만 파운드 정도는 쉽게 챙길 수 있을 거야."
로드의 입이 점점 벌어졌고,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물어왔다.
"사실상 3배 인상이네요?"
"그렇지."
"이렇게 많이 줘도 돼요?"
역시 주장답게 구단에 대한 걱정도 하는 로드였다.
로드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노팅엄이 명성을 쌓고 실적을 내는 만큼 선수들의 평가도 올라갔고, 온갖 빅클럽들이 공식 비공식 가릴 것 없이 우리 팀의 선수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최근 구단 인수 관련 문제를 신경 쓰면서도 이 문제는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내가 정한 이번 시즌의 원칙은 '선수들을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된다.'였다.
동화를 이뤄낸 팀 레스터시티는 핵심 중의 핵심 캉테를 빼앗기며 다음 시즌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당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나는 파격적인 주급 인상으로 선수들을 다 붙잡을 계획이었다. 선수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에는 돈 만한 게 없으니까.
혹여나 선수들이 게을러질 걸 대비해 기본급은 1.2배 정도 인상했고, 대부분 수당을 통해··· 그러니까 열심히 뛴 사람은 뛴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아갈 수 있게 조정했다.
"괜찮아. 언론에서도 요즘 많이 나오잖아. 우리 구단 부자라고."
"흠, 그래도··· 저만 이렇게 올려주는 건 아닐 거 아녜요."
"다음 시즌에는 이번 시즌보다 무조건 많은 돈을 벌 거거든. 그리고 우리 구단 순이익이 전 세계 신기록이야. 저언혀 걱정할 필요 없어. 캡틴."
로드는 그런가요 라고 적당히 대답하며 내게 계약서를 받아들고, 금액 부분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4부 리그에 있을 때랑 비교하면 100배 넘게 올랐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체감되네. 우리 구단이 얼마나 커졌는지."
로드가 씩 웃었다. 이어서 로드가 물었다.
"다른 선수들 재계약은 어때요?"
로드는 주장이었기에 이런 얘기도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일단 널 시작으로 주전 선수들에게 사실상 최종 제안을 할 거야. 물론, 대부분의 선수와 12~1월에 팀에 남을지 떠날지 이야기를 마쳐놓긴 했어. 전부 남는대."
"정말요? 다들 계약한다니 다행이네요. 주전은 아닌 선수들이 최근에 되게 힘들어 보여서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잭슨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로드나 라이언 같은 주전급 선수들은 시즌 말이 돼도 쌩쌩했으나 로테이션 급 선수들은 시즌 말미가 되어서 그런지 체력적인 한계가 보인다고.
그래도 멘탈 같은 것에 문제가 있거나 성격적인 결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보통의 프리미어리그 급 선수였을 뿐이었다.
솔직히 시즌 말미가 됐는데 쌩쌩한 내 눈앞의 녀석을 포함한 젊은 유망주들이 특이한 거였다.
나는 로드에게 말했다.
"괜찮아. 시즌 이맘때쯤 되면 지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래도 다들 이 재계약 서류 보면 남은 시즌 힘내서 뛰지 않을까?"
"그렇네요. 연봉이 거의 2배가 뛰는 건데 정말 좋아할 거예요."
로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전부 재계약이면 새 선수 영입은 없는 거예요?"
"당연히 있지. 로테이션 선수들의 이탈이 없는 덕에 이적료가 잔뜩 생겼으니 확실한 빅사이닝 하나랑 애매한 빅사이닝 하나를 준비하고 있어."
"오, 정말요? 누군데요. 저한테만 알려주세요."
"비밀."
"아니, 진짜···."
로드가 발끈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드는 알려달라고 재촉했고, 나는 비밀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벨기에 2부리그라지만, 경기당 2골이 넘는 기록을 내는 이태양도 다음 시즌부터 공격수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전력을 그대로 보존하고, 유망주들은 이번 시즌 경험을 토대로 더 성장할 것이다. 여기에 팀의 퀄리티를 확실하게 올려줄 월드클래스 급 선수 하나나 둘을 데려온다.
노팅엄은 다음 시즌에 틀림없이 더 강해질 것이다.
"으아아, 안 듣고 말아요. 안 궁금해요."
로드의 마음에도 없는 말을 들으며 나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 63. 로테이션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