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로테이션 (3) >
코너는 현관문을 거칠게 닫으며 집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 왔다.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거실에서 아는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파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은데."
코너의 에이전트인 파커였다. 방금 FA컵 경기 때문에 코너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그 기분이 얼굴에 대놓고 드러나 있을 텐데도 파커는 왠지 기쁜 듯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정말 중요하고 좋은 일이 있어서 온 거야."
눈치 없어 보이는 파커의 태도에 코너가 인상을 더 찌푸리며 물었다.
"오늘 경기 안 봤어?"
"결과만 확인했는데?"
"하아···."
코너는 소리를 확 질러버릴까 하다가 억지로 참았다.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수수료를 내는 한이 있어도 잘라버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에 파커가 또 눈치 없이 말했다.
"뭐 어때. 경기에서 질 수도 있지. 아무튼, 코너. 빅클럽 두 곳에서 진짜 좋은 제안이 들어왔어."
"내일 들을래. 너, 더 귀찮게 하면···."
'해고해 버릴 거다.'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거실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너, 아까 경기에서 자네가 한 실수는 아쉬웠지만, 전체적인 경기력은 나쁘지 않았어. 실제로 언론 평점도 6점 정도라고.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
남미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복도로 나오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자네에게 좋은 제안을 했다는 빅클럽 두 곳이 리버풀과 맨유야. 이래도 관심 없나?"
코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옆에 선 파커를 향해 물었다.
"누구?"
"남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에이전시 카스텔로의 대표 로널드 씨야. 네 이적을 돕고 싶다고 연락 주셨어."
코너는 로널드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지만, 카스텔로라는 에이전시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또, 로널드와 처음 보는 사이였기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코너는 코너가 진지한 태도로 로널드에게 말했다.
"그 제안이 사실이라고 해도 지금은 너무 늦지 않았나요? 4월 다 돼서 제안하는 거면 원래 그 클럽들의 계획에 제가 없던 거잖아요. 노팅엄에 남아 있으면 적어도 로테이션으로 뛸 수 있는데 제가 왜 그런 모험을 해야 하죠?"
로널드는 기다렸다는 듯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왼쪽 풀백으로 내려쓰던 세세뇽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됐고, 맨유는 산드루가 은퇴할 예정이지. 무엇보다 이번 이적시장에는 좋은 기량의 왼쪽 풀백이 없어. 뉴캐슬이 독점해버렸으니까. 자네라면 두 팀 중 어디를 가도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을 거야."
코너는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왜 갑자기 날 도와주려는 거죠?"
"단순해. 돈이 되니까. 노팅엄 FC처럼 반짝 성적을 낸 팀의 선수들은 빅클럽에 평소보다 비싼 몸값으로 쉽게 이적시킬 수 있거든. 에이전트가 돈을 벌 기회를 놓칠 리가 없잖아?"
코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느닷없기도 했지만, 리버풀과 맨유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말이 가슴 깊이 꽂혔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로널드가 추가타를 날렸다.
"무엇보다 코너. 자넨 이적해야만 해. 잭슨 감독은 자네를 희생양으로 여기고 있어. 자넬 로테이션으로 취급해 드문드문 출전시켜서 경기 감각을 떨어뜨렸고, 선발로 가끔 내보낼 때도 자네는 원래 공격력이 괜찮은 왼쪽 풀백인데도··· 공격성을 다 거세해버리고 수비 역할만 맡기고 있잖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네가 잘 할 수 있겠나? 마르셀루 할아버지가 와도 어려워."
로널드의 말은 전부 코너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코너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로널드가 씩 웃었다.
"당연히 주급도 노팅엄보다 더 챙겨줄 수 있어. 어떤가, 이적에 관심 있나?"
"···있어요."
"좋아! 그럼 빠른 시일 안에 협상을 진행해보도록 하지. 그리고 말이야 자네와 친하고 실력은 있지만, 주전으로 나서지 못하는 로테이션 선수들이 더 있지?"
"예."
"그 친구들도 만나고 싶은데 다리를 놔줄 수 있나?"
*
"요한. 정말 괜찮겠어?"
내 물음에 우리 팀의 왼쪽 윙, 요한 위페르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이미 사인도 한걸요."
재계약은 무척 순조로웠다. 핵심 선수들의 재계약은 대부분 추가 협상 없이 끝났고, 로테이션 선수들은 대부분 고민해본다고 했지만 다들 계약 내용에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요한은 떠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요한의 포지션 경쟁 상대는 루앙이다. 요한은 회귀 전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긴 했지만, 월드클래스는 아니었다.
요한은 아직 젊었기에 주전으로 뛰길 원한다면 다른 팀에 기꺼이 보내줄 계획이었다. 요한의 대체자를 미리 찾아놓을 정도로 요한이 떠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후회할지도 몰라. 로테이션이 아니라 아예 후보로 밀려버릴 수도 있어."
내 말에 요한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괜찮아요. 각오하고 있어요. 솔직히 루앙은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라서 주전 경쟁은 못 이길 것 같지만··· 루앙도 모든 경기를 풀타임으로 뛸 수는 없잖아요?"
나는 얌전히 요한의 말을 경청했다. 요한은 첫 이적시장 때 칼, 한스와 함께 데려온 선수였다. 함께해온 시간 만큼 정이 쌓여 있었다.
요한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이곳에서 정말 행복한 일이 많았어요. 저는 이 팀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아예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되는 것만 아니면··· 꼭 노팅엄에서 뛰고 싶어요. 다음 시즌에는 유럽대항전도 나갈 테니까 제가 활약할 수 있는 순간이 분명히 올 거예요. 저는 이 팀의 일원으로 트로피를 꼭 들어 올려 보고 싶어요. 이적은 그다음에 생각할래요."
괜히 가슴이 찡해지는 말이었다. 요한의 진심 어린 말에 나도 진심을 담아 이렇게 답했다.
"고맙다. 내년에는 꼭 트로피 하나 들자."
"예. 그럼 가 볼게요. 할리가 연습 좀 도와달라고 해서요."
"그래."
요한은 그렇게 단장실을 나갔다.
나는 요한의 계약서를 정리해놓고, 남은 계약서들을 바라보았다.
로테이션 선수들의 재계약만 끝난다면 다음 시즌 준비는 정말 완벽했다. 무조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재계약은 순조롭지 않았다.
"미안해요. 선수가 조금만 더 고민하고 싶대요."
"에이전시에 사정이 생겨서요.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순 없을까요?"
"선수 집안에 일이 있어서··· 다음 주에 말씀드릴게요."
로테이션 선수들을 담당하는 에이전트들이 각종 핑계를 대며 재계약을 2주나 끌었다. 벌써 4월 중순이 되었고, 시즌 종료까지 앞으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재계약 실패라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로테이션 선수들을 대체할 선수들의 목록을 정리해두며 2주 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출근하자마자 본 기사 때문에 내 기분은 몹시 더러워져 있었다.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나는 여러번 읽었던 기사의 제목을 다시 한번 읽었다.
<노팅엄 FC의 선수들 대거 이탈!>
*
자극적인 제목으로 어그로를 끄는 기사였다. 기사에는 노팅엄의 로테이션 선수들이 여러 빅클럽으로 이적할 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어서, 조이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도운! 기사 봤지?
"응."
-기사에 나온 빅클럽들이 일시다발적으로 이적 제안 공문을 보냈어.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로테이션 선수들의 이적이 마치 짜인 것처럼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분명 각자 다른 에이전트를 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빨리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조이에게 말했다.
"공문 전부 팩스나 메일로 보내 줘. 읽어보고 생각해야겠는데···."
-알겠어! 바로 보낼게!
"응."
전화를 끊고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문 쪽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대체 우리 구단에 악의가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고. 악의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언론에 이적설을 퍼뜨릴 리가 없으니까.
이적설이 언론에 흘러나간 건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보통 다음 시즌 계획은 12~1월경에 확정되고, 이적과 재계약 명단 또한 그때쯤 정해진다. 구단은 계획에 따라 1월부터 선수들과 접촉하고, 이적 작업을 한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4월인 지금 우리가 5명이나 재계약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다른 구단에 알려지게 된다면··· 무조건 호구를 잡힐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팀과 에이전트, 선수들이 우리 팀이 급하다는 걸 알게 되는 거니까.
그때였다. 단장실의 문을 열고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얼굴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크도 하지 않는 무례한 모습으로.
"안녕, 킴. 오랜만이죠?"
지난 이적시장 때 루앙 건으로 사이가 틀어진 로널드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로널드는 능글맞게 말해왔다.
"차 한 잔도 안 주나요? 아니, 적어도 앉으라고 해야 하는 거 아녜요?"
나는 그런 로널드를 향해 팔짱을 낀 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이군요. 우리 로테이션 선수들을 이적시킨 게."
로널드는 제멋대로 손님용 의자에 삐딱하게 앉더니 짙게 웃었다. 마치 '내가 이겼다.'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로널드는 가방을 대충 뒤적여 탁자 위에 서류 더미를 툭 하고 던져놨다. 슬쩍 보니 로테이션 선수들의 서명이 들어간 이적 요청서였다.
로널드가 말했다.
"당신은 프리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팀을 거의 완성해놓는 스타일이었죠? 이번 프리시즌에는 고생 좀 해야 할 거예요."
로널드가 과장되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노팅엄이 이제 돈이 많다는 걸 온 세상 사람이 알고 있었다. 모든 구단과 선수들에게 노팅엄은 선수를 아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호구로 보일 것이다.
로널드 한 사람이 한 짓이 노팅엄에 커다란 손실을 안기기 직전이었다.
로널드는 이곳이 마치 자기의 사무실인 양 거들먹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노팅엄은 동화 같은 팀이다? 정말 웃기는 소리라니까요. 로테이션 선수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준다고 하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적하겠다던데요? 동화는 역시 현실 앞에서 무너져요. 축구판은 어린애들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 어른들이 일하는 곳이거든요."
조이가 보낸 팩스가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 없이 걸어가서 팩스 내용을 확인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빅클럽들이 로테이션 선수들의 시장가치에 맞춰 적절한 이적료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인데 이적을 안 시켜? 라는 말이 나올 만한 금액들이었다. 우리 로테이션 선수들의 기량이 나쁜 편이 아니었기에 빅클럽에 가도 쉽게 후보로 전락하진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이적이긴 했다.
우리 구단만 쏙 뺀 합리적인 이적 말이다.
로널드가 말했다.
"빨리 이적 허가를 내려주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여러모로 귀찮게 할 거거든요."
우리 팀은 챔피언스리그 진출 경쟁 중이었기에 잡음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선수들 간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니 적어도 비즈니스 관계 정도로 함께 뛸 수 있도록 계약을 빨리 처리해줘야 했다.
로널드의 의도대로 다 흘러가고 있어서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나는 로널드를 노려봤다. 로널드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봤다.
대체해서 영입할 선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원래 쓸 돈의 최소 2배 이상을 쓰게 생겼다. 아마 그렇게만 하면 다음 시즌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났다.
왜 이 사람의 수에 다 당해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많이 쓰게 된 상황을 역이용해 내 눈앞의 얼굴을 구겨버릴 방법이 없나 모든 세포를 깨워 생각해봤다.
그 찰나의 순간, 유레카를 외칠만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관통했다. 소리를 지를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분한 감정이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로널드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로널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쳤어요? 갑자기 왜 웃는 겁니까."
"당신 덕분에 우리 팀이 훨씬 더 대단해질 것 같거든요. 판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허세는."
순간 당황했던 로널드는 잠시 생각해본 결과 내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웃는 낯이 기분 나빴는지 로널드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적이나 빨리 허가해 줘요. 알겠어요?"
"예, 그러죠."
로널드는 내 태연자약한 태도가 짜증 나는지 문을 쿵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
나는 로널드가 나가자마자 이 사태를 대처하고, 이 최고의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일단 잭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잭슨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습니다. 로테이션 선수들이 다 떠나는 건가요?
"미안해요. 그렇게 됐어요. 하지만, 훨씬 더 좋은 상황으로 바꿔보려고요."
-어떻게···?
"잭슨, 지금 어디 있어요?"
-감독실에 있습니다만.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나는 문을 열고 반쯤 뛰듯이 감독실을 향했다. 감독실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나는 감독실에 도착하자마자 갸웃하는 잭슨에게 말했다.
"잭슨, 팀을 반드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시켜줄 수 있나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어··· 일단, 이유를 알아도 되겠습니까?"
잭슨은 당황스러울 텐데도 침착하게 내게 물었다.
나는 잭슨에게 흥분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지금부터 시작할 '계획'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잭슨은 처음에는 내 말에 당황해서 몇 번이고 되묻다가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줬다.
"···그렇게, 우리 구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이적시장을 보낼 거예요."
"정말 자신 있으십니까? 저조차도 조금 걱정이 되는데···."
나는 우려하는 잭슨에게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는 중소 구단이 아니에요. 빅클럽이에요. 저는 빅클럽 다운 규모로 돈을 쓸 거고, 이 계획을 성공시킬 거예요. 절 믿어주세요."
잭슨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잭슨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쉽게 성공한다고 보장은 못 하겠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도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잭슨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반드시 챔피언스리그에 팀을 진출시키겠습니다."
< 63. 로테이션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