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동화 (1) >
로드와 라이언은 코치진과의 회의 때문에 조금 늦게 드레싱룸에 도착했다.
"분위기 왜 이래?"
그래서 로드는 조용하다 못해 싸늘한 이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노팅엄에서 가장 밝은 할리의 표정이 가장 나빠져 있었고, 테디, 한스, 요한, 킹 등의 표정도 별로였다. 반면에 최근 기사로 이적설이 나왔던 로테이션 선수들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나마 평소와 똑같은 루카가 로드와 라이언에게 작게 말했다.
"방금 올라온 기사 확인해 봐."
"어느 언론사 거?"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가도 돼."
로드는 바로 자신의 라커에서 스마트폰을 찾아 즐겨찾기 해둔 스카이스포츠의 축구 분야 기사로 접속했다.
그리고 로드는 이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노팅엄 FC,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선수들을 잃다!>
사이트 맨 위에 대문짝만한 크기로 올라온 기사라 못 볼 수가 없었다.
기사의 핵심 내용은 이랬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름만 대면 아는 핵심 선수들은 아니지만, 이번 시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노팅엄의 준주전급 선수들이 빅클럽 이적 협상을 모두 완료했다고 한다. 다음 시즌 노팅엄이 전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적 협상을 완료한 선수들이 누구인지는 안 나왔지만, 일주일쯤 전에 <노팅엄 FC의 선수들 대거 이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며 소동이 있기도 했고··· 준주전급이라는 힌트까지 주어졌으니 선수들이 눈치를 못 챌 리 없었다.
방금 말싸움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있던 거 같았다. 안 그러면 할리가 저렇게 씩씩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으음···."
눈썹이 찌푸려지는 라이언과는 다르게 로드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며칠 전, 김도운과 만나 로테이션 선수들이 이적할 거라는 걸 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라는 얘기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팀을 만들 거야. 하지만,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지 못한다면 절반 짜리 완성이 될 거다. 네가 뭘 해야 할지 알겠지? 꼭 부탁한다.'
꽤 길고 진지한 대화였지만, 김도운이 로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팀의 분위기를 다잡고, 낼 수 있는 최고의 성적을 내라. 그러면 김도운이 다음 시즌을 위한 선수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자기 라커 앞에 앉아 있는 선수들은 훈련 시작 20분 전인데도 훈련복을 입지 않거나, 신발 점검 같은 것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코너, 피어스를 비롯한 로테이션 선수들은 이렇게 기사로 미리 퍼질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싱룸 한가운데로 갔다. 그리고 잭슨이 간단한 전술 설명 때 쓰는 하얀 보드를 손바닥으로 두 대 쳤다.
탕탕하는 소리가 드레싱룸을 울렸고, 모든 선수의 시선이 모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은 가는데, 우리는 사흘 후에 챔피언스리그 진출 경쟁 상대인 맨유와 경기해야 해. 다들 그걸 잊고 있는 거야? 훈련 준비 안 하고 뭐 해?"
"로드, 그렇지만···."
할리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하려 하는 것 같았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더 말을 하면 팀워크가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로드는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할리, 우리는 프로선수야. 시즌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는 사람은 전부 노팅엄 FC 소속이라고."
로드는 로테이션 선수들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었다. 노팅엄의 이적시장을 방해했기에 싫은 감정이 컸다.
하지만, 로드마저 로테이션 선수들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면 남은 5경기 연속으로 교체 없이 핵심 선수들만 출전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체력 저하보다 선수 간의 불협화음이 더 위험하니까.
그렇기에 로드는 지금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원래도 서로 그렇게 친한 거 아니었잖아. 그냥 안 친한 직장 동료라고 생각하면서 사무적으로 지내면 돼. 날 세울 것 없이."
안도하는 것 같은 로테이션 선수들의 얼굴을 보고, 로드는 재계약을 마치고 노팅엄에 계속 남을 선수들을 향해 말했다.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도 주장의 역할이니까.
"다음 시즌에 전력 저하는 없을 거야. 킴 단장님이 약속하셨어. 그러니까 시즌 막바지까지 흔들리지 말고 좋은 성적을 내 보자고."
김도운의 이름이 언급되자 선수들의 걱정 또한 상당히 씻겨 내려갔다. 여기 있는 선수들은 모두 김도운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로드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도운은 함께해 온 동료이자 형이었고, 삼촌이기도 했다.
김도운은 로드에게 계획을 말해줬던 그 날 이후 노팅엄의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번 사태를 수습하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발로 뛰고 있을 것이다.
로드는 김도운을 믿었기에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며 선수들에게 외쳤다.
"자자, 오늘 내부 연습경기 있다고 했으니까 다들 정강이 보호대 잊지 말고 준비해. 오 분도 안 남았다."
**
"자, 이 정도면 됐죠?"
"하아··· 이렇게 헐값에···."
도르트문트의 단장 슈베르트는 틈날 때마다 한숨을 쉬며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계약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 노팅엄 FC가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면 바이백 조항대로 칼 슈나이더의 이적료는 1,500만 파운드(약 230억 원)다.
2. 노팅엄 FC가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면 칼 슈나이더의 이적료는 7,000만 파운드(약 1,073억 원)다.]
나는 씩 웃으며 슈베르트에게 말했다.
"팬들도 어이없는 계약 했다고 욕하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가 여기에 올라올 거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어요?"
3년 전, 칼의 약속과 팀이 한 시즌 만에 이뤄낸 기적을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협상을 통해 넣은 조항이었다.
바이 백(Buy-Back), 선수의 이전 소속팀이 아무 조건 없이나 일정 조건을 달성한 후에 계약서에 정해놓은 이적료를 현 소속팀에 제안하면 현 소속팀이 선수의 이적을 거절할 수 없는 조항이다.
그 당시 칼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팀은 분데스리가의 쌍두마차인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나는 팀 규모상 상대적으로 계약에 열세였던 도르트문트의 단장 슈베르트에게 '칼을 도르트문트로 가도록 설득해줄 테니, 이 조항을 삽입해달라.'라고 요청했었다.
슈베르트는 5년 내에 챔피언스리그 진출 시 바이백 1,500만 파운드라는 어처구니없는 조항을 보고 실실 웃으며 좋다고 수락했었다.
그리고 그 조항 때문에 지금 이 꼴이 됐다.
슈베르트는 이 계약서가 현실인지 믿을 수 없다는 몽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칼의 계약 기간과 바이백 조항을 인질로 챔피언스리그 진출 실패 시 이적료 7,000만 파운드라는 쉬운 협상까지 할 수 있었다.
칼의 시장가치는 1억 2,000만 파운드 정도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영입한다고 해도 이번 이적시장을 가장 뜨겁게 달굴만한 낮은 가격이었다.
슈베르트가 이제는 다 포기한 듯한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주시죠. 혼자 있고 싶습니다···."
"예. 가보겠습니다."
일부러 놀릴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단장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걸었고, 점점 발걸음을 빨리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뛰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렌트한 차에 뛰어 올라탔고, 시동을 걸어 바로 칼의 집으로 출발했다.
칼의 집에는 5분 만에 도착했지만, 괜히 긴장돼서 그런지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칼의 집 문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려 하니 문이 먼저 열리며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나는 칼이 준비해놓은 차를 마시며 칼이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는 걸 지켜보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길게 준비했는데, 칼이 사인을 안 하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칼은 내 걱정을 깨부수듯 손가락으로 돌리던 펜을 잡고, 시원하게 사인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외쳤다.
"됐다!"
"그렇게 좋으세요?"
"넌 안 좋냐? 아무튼, 노팅엄에 돌아온 걸 환영해."
칼은 말없이 웃는 거로 대답을 대신하고, 부끄러운지 다른 화제를 꺼냈다.
"프리미어리그는 정말 미쳤네요. 주급이 두 배나 올랐어요."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이 도는 리그니까. 그리고 너는 이적료도 싸고, 노팅엄과의 의리를 지켜 준 것에 대한 보상도 있어··· 아무튼, 다음 시즌에는 네가 우리 팀의 최고 주급자야. 아, 이 이적에 관해 여러 매체에 마케팅 목적으로 쓸 거다? 노팅엄에 돌아오면 더 열심히 해야 할 걸?"
구단 최고 주급자는 늘 평균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줘야 한다. 딱 보통의 경기력만 보여준다면 팬들과 언론이 그러려고 가장 많은 주급을 주고 쟬 데려왔냐는 욕을 할 테니까. 하지만, 칼은 몹시 여유 있어 보였다.
"재밌겠네요. 그 정도는 돼야죠."
이어서 칼은 궁금한 걸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테디는 어떻게 할 거예요? 경쟁해야 하나요?"
칼은 스트라이커로도 뛸 수 있지만, 오른쪽 측면에서 중앙으로 파고 들어오는 플레이가 최고 강점인 선수였다. 지금 우리 팀에는 그 자리에 테디가 뛰고 있었다. 테디는 리그 최고는 아니지만, 리그 상위권 수준의 스탯은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잭슨과 얘기가 끝난 사항이었다.
"테디는 다음 시즌에 오른쪽 풀백으로 뛸 거야. 잭슨이 테디에게 포지션 변경에 관해서 얘기도 나눴고, 시즌 끝나자마자 개인 훈련도 들어갈 계획이래. 잭슨은 테디가 오른쪽 풀백에서 뛰면 월드클래스가 될 거라고 생각 하시더라고."
"오··· 알겠어요. 아, 저 이번 시즌에 도움왕 할 것 같은데 입단식 좀 성대하게 해 주면 안 돼요? 다른 선수들이 하는 거 보면 부러웠는데."
"득점왕도 하면 생각해 볼게. 리그 MVP라던가."
내 농담 섞인 말에 칼이 살짝 발끈했다.
"단장님. 저 리그에서만 12골에 18어시스트에요. 엄청나게 잘하고 있다고요."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미친 수준이지. 당연히 농담이고, 당연히 해 줄 거야. 아, 그런데 말이야··· 너 혼자 하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칼이 뚱한 얼굴을 했다. 솔직히 칼은 세계에서도 꼽히는 선수였다. 그런 선수와 급이 맞지 않는 선수들과 입단식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칼에게 말했다.
"너 정도 되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를 데려올 거야."
"저 정도 되는 선수요?"
칼이 놀라서 되물었다. 보통 칼 정도 체급의 선수는 한 시즌에 한 명 정도만 영입해도 대단한 거였으니까. 1억 파운드에 달하는 선수 넷을 동시에 영입한다는 건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칼을 영입한 이상 계획은 이미 시작됐다.
칼이 또 한 번 물었다.
"확실히 셋 다 데려오는 거예요?"
"공격수는 작업중이고, 미드필더는 널 영입하면 진지하게 얘기해볼 거라고 했으니까 거의 확실해졌어. 수비수는 내가 생각했을 때 확률은 반반이야.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다 데려올 거야."
"그 선수들 이름 좀 알려주면 안 돼요?"
"비밀이야. 확정되는 대로 하나씩 알려줄게."
너무하다는 듯한 칼의 얼굴에 대고 솔직히 말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그래. 아무튼, 이번에 빠져나간 선수들을 대신해 로테이션을 맡아 줄 선수들도 올 거야. 이 선수들은 며칠 동안 다 연락해 봤는데, 전부 긍정적이었어."
이제는 혼란스러운 것 같은 칼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의리로만 우리 팀에 다시 부른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라고. 널 시작으로 슈퍼 팀을 만들어서 다음 시즌에는 모든 우승컵을 정복할 거야. 그게 내 이번 시즌 계획이야."
내 당찬 포부에 칼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는지 칼이 씩 웃으며 말했다.
"기대되네요. 그럼 저는 도움왕뿐만 아니라 리그 MVP도 받을 수 있게 남은 경기 열심히 뛰어야겠어요."
"그래. 그럼 또 연락할게."
"네."
< 64. 동화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