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여유로운 프리시즌 (1) >
<노팅엄 FC, 진정한 동화의 팀>
일반적으로 동화의 팀이라는 호칭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적을 올린 팀을 부르는 말이다. 2002년 월드컵의 한국, 2016년의 레스터시티, 2016년의 아이슬란드 같은 팀들 말이다.
축구 팬들은 겉으로는 욕설을 내뱉더라도 가슴에는 낭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동화의 팀'들이 보여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모습에 열광하고, 그 팀들을 오랫동안 기억해준다.
하지만, 이런 성적에 관련된 동화는 축구에서 볼 수 있는 동화 중 일부일 뿐이다. 축구를 더 깊고 자세히 즐기다 보면 더 많은 동화를 만날 수 있다.
병마와 싸우는 어린 팬과 약속한 선수가 멋진 경기력을 보여준 이야기가 있다. 2부 리그에서 5부 리그로 떨어진 팀에 홀로 남아 팀을 2부 리그까지 올려놓은 선수의 이야기도 있다.
선수가 직접 그린 캐릭터가 구단의 마스코트가 되거나 어느 날 경기장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 덕에 경기에서 승리하게 된다는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도 있을 수 있고, 3부 리그에서도 쓸모없다고 버려진 감독이 자신을 믿어주는 구단을 만나 프리미어리그 승격까지 이뤄낸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며칠 전부터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팅엄이 끊임없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유가 이런 동화에 있었다. 위 문단에서 언급한 동화들은 전부 노팅엄에 소속된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다.
노팅엄의 팬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보고, 직접 주인공이 되기도 하면서 노팅엄에 절대적인 소속감을 가진다. 또한, 이것은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에 이뤄진 총액 4억 파운드가 넘는 빅뱅급 이적으로 노팅엄에 돌아온 선수들의 소감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집에 돌아온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 테오 헌터
"노팅엄에 임대로 왔을 때 정말 즐거웠습니다." - 바비 스미스
"으하하하. 우리가 돌아왔습니다." - 알버트
"고향에 돌아왔네요." - 칼 슈나이더
어려웠던 시절 함께했던 선수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돌아온다는 건 응원하는 팀이 있는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야기이다. 거기에 더해서 선수 하나가 아닌 선수들이 월드클래스가 되어 돌아오는 건 정말 꿈 그 자체인 일일 것이다. 선수가 고향 팀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전성기를 훌쩍 지난 나이에 복귀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니까.
하지만, 노팅엄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노팅엄에 돌아온 선수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막 시작되고 있는 유망한 선수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한 명의 축구 팬으로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자 정신을 발휘해 노팅엄이 무슨 매력이 있는지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고 분석해봤고, 그 정답이 노팅엄이 계속해서 적어내는 '동화들'에 있다는 걸 깨닫고 이 기사를 쓰게 되었다.
축구 팬들은 욕심이 많다. 그저 좋은 성적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과 호흡하고, 함께 시즌을 치러나가며 매 시즌 이야기를 만들기를 원한다. 팬들에게 축구는 그저 취미가 아닌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노팅엄은 팬들의 이 욕구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족시켜주고 있는 구단이었다.
많은 빅클럽들은 팬들의 이 욕구를 간과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아무리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 담더라도 팬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기만 할 뿐이다.
노팅엄은 김도운 단장의 지휘 아래에서 <노팅엄 푸드 리그>, <노팅엄 TV>, <노팅엄 푸드 코트>, <길거리 공연가를 위한 간이 공연장 설치>, <소아병원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와 지역 대학교와 연계하는 인턴 프로그램 등을 통해 선수들과 팬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했고, 선수들의 이야기를 팬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을 더 많은 팬에게 알리기 위해 애썼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특별한 이야기, 그러니까 축구 팬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이야기인 동화가 하나둘 세상에 알려졌다. 노팅엄은 이를 기반으로 관중, 관광객, 해외 팬을 확보했고, 자연스럽게 엑스피아와 BM을 비롯한 수많은 스폰서들을 확보해냈다.
노팅엄은 경영에 왜 스토리텔링이 중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동화에 감명받은 노팅엄의 모든 구성원은 노팅엄이라는 팀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이를 통해 이들은 노팅엄을 중심으로 어느 구단에서도 보기 어려운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노팅엄을 끊임없이 발전시켰다.
노팅엄이 상업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보통의 빅클럽처럼 바뀔 위기도 있었다.
노팅엄의 유소년 팀 출신 단장 김도운과 구단주 제임스는 무려 10억 파운드에 달하는 인수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노팅엄이라는 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 노팅엄은 로테이션 선수들을 잔뜩 잃으며 잠깐 반짝했다 사라지는 팀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단장 김도운은 그동안 노팅엄이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끈끈함을 이용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이적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옛 선수들을 대부분 복귀시키는 신의 한 수를 보여줬다.
영입 규모로만 보면 과거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에 버금가는 데다가 선수들이 제롬 빼고 노팅엄에서 뛴 적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은 이 이적을 '축구 동화의 완성', '우리가 축구를 보는 이유', '위대한 이적', '노팅엄 어셈블!' 등으로 부르며 감동했다.
또한, 축구인들도 '상업적으로만 가는 프로축구에 노팅엄이 대답을 내놓았다.', '이게 바로 축구의 가치고, 한 팀의 팬을 하는 이유다.', '노팅엄의 팬들은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등의 말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레스터시티처럼 우승까지 해내야 동화의 팀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은 틀렸다.
노팅엄이 이번 시즌에 우승을 해내든 못 해내든 노팅엄은 이미 동화의 팀이다.
노팅엄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수많은 동화를 통해 만들어진 팀이고, 팀이 어느 순위에 있든 노팅엄의 구성원들은 계속해서 작은 동화들을 만들어 낼 것이니까.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말이다.
아마 이번 시즌 내내 노팅엄은 잘하든 못하든 끊임없이 언론에 회자 될 것이다. 나는 한 명의 축구 팬으로서 노팅엄의 수뇌부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이 '위대한 이적'으로 만들어진 팀이 이번 시즌에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정말로 궁금하니까.
[BBC Sports 노팅엄셔주 / 기자 로이 톰슨]
"음."
내부 출입 기자도 아닌데 이 정도 애정을 담은 기사라니. 이 기자분도 잘 지켜보다가 나중에 내부 출입 기자로 모시는 걸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단 규모도 커진 만큼 팬들을 위한 창구도 늘어나야 하니까. 빅클럽들이 보통 셋에서 다섯 정도의 내부 출입 기자를 두니 우리도 그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나는 기사 링크를 저장해두며 고개를 들었다.
<와아아아아! 칼! 칼! 칼!>
지금 나는 경기장에 있었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니 주변의 시끌벅적함이 더 잘 느껴졌다.
필드 한가운데에는 무대가 설치돼 있었고, 칼이 발등 무릎 머리 어깨 등을 이용해 팬들에게 볼 트래핑을 선보이고 있었다.
칼의 트래핑이 끝나자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돌아온 칼 슈나이더에게 뜨거운 박수 보내주십시오!>
<와아아아아!>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함성이 쏟아졌다. 리그 홈 경기가 있을 때와 비슷한 열기였다. 지금 이 자리는 입단식인데도 우리 팬들의 열정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포터즈에서 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요.>
인사를 하려던 칼은 멈칫하고, 미소지으며 홈 서포터즈석을 바라보았다. 홈 서포터즈석의 맨 앞에 앉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 시즌 서포터즈 전체의 리더를 맡은 <오크스>의 리더 맥켄지였다.
<칼! 네 응원가는 지금 안 불러줄 거다! 네가 골 넣은 다음에 불러줄 거야!>
사흘 전 칼의 인터뷰에 대한 대답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큭큭 웃었다. 이어서 관중이 환호했다.
<맞아!>
<적어도 어시스트는 해야지!>
<우리 응원가는 비싸다고!>
팬들이 구역별로 입을 모아 합창했다.
함께 입단식 중인 다른 선수들이 당황한 칼을 보며 킥킥거렸다. 칼은 붉어진 얼굴로 마이크를 잡고 헛기침했다. 관중의 목소리가 작아졌고, 다들 칼의 말을 기다렸다.
<좋습니다. 바라는 바입니다.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골은 천천히 넣···.>
<우우우우우.>
<···으면 안 되겠지요? 세 경기 안에 넣겠습니다. 아니, 두 경기!>
<와하하하하!>
관중의 재빠른 야유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칼이었다. 처음 왔을 때 영어를 못했던 녀석이었는데 모든 면에서 정말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다른 선수들의 입단식도 진행됐고, 관중의 기쁨에 겨운 함성이 계속됐다.
그때, 내 옆의 빈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제임스는?"
"이제 왔어? 제임스는 다큐멘터리 촬영팀 구경하러 갔어. 어떻게 찍는지 궁금하다면서."
"제임스 답네."
조이였다. 조이는 필드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조이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차가 진짜 너무 밀렸어. 여기만큼이나 밖도 난리야 난리. 선수들 영입하고 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러네."
조이는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노팅엄시는 사흘 전의 영입 발표 이후 마치 노팅엄 FC가 우승한 것처럼 사흘 내내 축제 중이었다. 노팅엄시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술잔을 부딪치며 노팅엄 FC의 다음 시즌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2부 리그에서 무패우승을 달성하고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온 노츠 카운티의 팬들도 이 축제에 함께하고 있었다. 노팅엄 팬들은 라이벌이 돌아와서 기쁘고, 노츠 카운티의 팬들은 역사상 첫 프리미어리그 승격에 기뻐하느라 말다툼도 뒤로 미뤄놓고 있었다.
노팅엄시를 양분하는 두 팀 다 경사였기 때문에 이번 축제는 2주 정도 진행할 것 같다고 노팅엄시 측에서 얘기했다.
조이가 말했다.
"해외 포레스트 펍에 지원금 다 보냈다고 보고 받았어."
"그래?"
전 세계의 포레스트 펍에도 지원금을 보내라고 했다. 대략 2주 동안 무료 맥주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금액을 말이다.
그들도 노팅엄의 구성원이었으니까 함께 축제를 즐겼으면 해서. 물론, 홍보도 겸하고.
내가 물었다.
"공부는 잘돼 가?"
"응. 재미있어. 교수님한테 칭찬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른다니까?"
조이가 가슴을 내밀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조이는 재작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트렌트 대학교에서 CFO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됐네."
"아, 그러고 보니 다큐멘터리 계약은 어떻게 됐어? 입단식 전에 만나기로 했잖아."
나는 그 말에 자신만만하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조이가 물었다.
"500만 파운드(약 76억 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이가 놀라며 말했다.
"5,000만 파운드(약 760억 원)?"
"맞아."
"와우."
세계에서 가장 큰 스트리밍 기업에서 매년 빅클럽이나 화제의 팀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은 지난 시즌 말미에 우리에게 계약하자고 접촉해 왔다.
일상처럼 전하는 노팅엄 TV와는 다른 느낌으로 팬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당연히 수락할 생각이었지만, 계약금을 올리기 위해 사흘 전의 영입 발표 날까지 계약을 질질 끌었고, 놀라운 영입 발표 후 우리 구단의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자 기업 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역대 최고 계약금인 5,000만 파운드를 먼저 제시해와 나는 사인만 했다.
그들은 계약서를 받자마자 바로 촬영에 들어가 있었다.
지금은 열심히 입단식을 찍는 중이다. 그들을 이제야 발견한 건지 조이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조이가 기뻐할 만한 소식을 또 꺼냈다.
"5,000만 파운드에 놀랄 필요 없어. 이번 주 내로 이적료의 절반 정도를 회수할 수 있을 것 같거든."
"2억 파운드 넘게? 벌써?"
"응."
유니폼은 재고가 동날 정도로 팔리고, 기존 스폰서들은 더 높은 금액으로 새 계약 제안을 해 왔으며 새로운 스폰서들도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스타성 있는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모이고, 화제가 크게 돼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요즘은 뭐든 술술 풀려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다음 시즌을 대비한 영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았다.
이미 다 했으니까. 숙제를 미리 마친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단 하나뿐이었다. 조이가 그 문제에 대해 물어왔다. 무척 재밌다는 얼굴로.
"돈은 그렇다 치고··· 이번 전지훈련에 너도 간다면서?"
"어··· 그래서 아직 전지훈련 장소를 못 정했어. 내 무덤을 정하는 기분이라···."
내 말에 조이가 까르르 웃었다.
작년에 로컬 보이 3인방에게 챔피언스리그 진출하면 나도 전지훈련에 참가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생하기 싫어서 적당한 전지훈련지 몇 개를 잭슨에게 말해봤는데 얄짤 없이 거절당했다.
그때, 조이가 생각도 못 한 전지훈련지를 말했다.
"그럼 한국 군대는 어때? 도운이 네가 다녀온 곳이기도 하니까 너는 좀 편하게 할 수 있을 거 아냐."
그 순간, 엄청난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번득이고 지나갔다. 사흘 전의 대 영입 만큼이나 유레카를 외치고 싶을 정도의 발상이었다.
나는 조이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나는 천재인가 봐.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뭔데?"
"전지훈련지에서 내 역할이 꼭 훈련받는 병사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
"내가 선수들을 훈련 시키는 조교 역할을 하는 거야! 나 군대 있을 때 잠깐 유격 조교 해본 적 있거든."
"네가 선수들을 훈련 시킨다고···?"
나는 구체적으로 유격훈련에 대해 설명하고, 코치들과 의논해 부상위험이 적고, 프리 시즌 동안 풀어진 선수들의 몸 상태를 끌어올릴 수 있게 유격 체조를 비롯한 훈련을 수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교들을 영어 가능한 애들로 배치해서 직접 선수들과 코치들을 굴리겠다고 말했다.
조이가 황당하다는 듯 날 보다가 중얼거렸다.
"잉글랜드 대표팀이 군대 체험을 한 적은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지? 괜찮지? 그럼 그렇게 해야지."
나는 내 지시에 따라 구르는 선수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조이가 내 미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악마···."
< 65. 여유로운 프리시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