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여유로운 프리시즌 (3) >
조이의 제안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이태양이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태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신입 선수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동료들과 동떨어진 역할을 맡는 건 좀···."
이태양은 작년 전지훈련에도 참여해봤기 때문에 전지훈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지훈련은 새로운 선수들과 급격히 친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특히, 유격훈련이라는 원망할 대상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장점이 더 극대화될 것이다.
조이가 물었다.
"조교가 많이 동떨어진 역할인가요?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조교는 훈련받는 사람들과 아예 따로 생활합니다. 그리고, 훈련받는 사람들에게 조교가 어떤 걸 시키나면···."
이태양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설명했다. 조이는 처음부터 이태양의 말이 끝날 때까지 진지한 얼굴로 들었다.
'결국, 훈련받는 사람들에게 있어 조교는 악마다.'라는 말로 이태양은 설명을 마쳤다. 조이가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경솔했네요."
"아닙니다. 하루 정도만 하는 거라면 모를까 전지훈련 내내 조교를 하는 건···."
"어? 하루는 괜찮아요?"
예상치 못한 조이의 반응에 이태양이 되물었다.
"하루도 가능한가요?"
"당연하죠. 첫날 도운이를 골탕 먹이는 장면만 찍으면 되거든요."
조이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며 빠르게 말했다.
이태양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하루 정도라면 오히려 선수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친해지기 더 쉬울 것 같았다. 자신의 캐릭터도 확실히 잡을 수 있을 테고.
그래서 이태양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협조하겠습니다. 어떻게 준비하면 되나요?"
"제가 이태양 선수에게 따로 연락 줄게요."
"예!"
**
나는 사무실에 갑자기 찾아온 마리아를 만나고 있었다. 이유가 있어 찾아온 거라 생각해 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고, 먼저 질문했다.
"무슨 일로 왔어요?"
마리아는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도니에게 전지훈련 촬영을 어떻게 할지 알려드리려고 왔고요. 또, 용건이 하나 더 있는데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마리아가 이어서 말했다.
"조이에게서 도니의 멋진 계획을 들었거든요···?"
"멋진 계획이요?"
"선수들과 코치들을 속일 완벽한 계획이요."
"아아."
나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틀림없이 즐거운 전지훈련이 될 것이다.
마리아가 이곳에 온 이유를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데 도니가 협조만 해주신다면··· 선수들을 속이는 준비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요. 가능할까요?"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아뇨. 그냥 단장님이 먼저 한국에 도착해서 조교 훈련을 짧게 받는 걸 옆에서 촬영하고, 단장님의 계획을 단장님 입으로 말씀해주시는 영상만 찍으면 돼요. 선수들이 훈련장에 들어가면서 스마트폰을 반납하는 순간 그 영상을 올리려고요."
"흐음··· 마리아가 들고 있는 건 이번 전지훈련 촬영 콘티인가요?"
"네."
나는 마리아에게서 콘티를 건네받아 어떤 식으로 촬영할지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내 덕에 지난 시즌보다 재미있는 스토리가 생겼고, 팬도 두 명 함께하기 때문에 나머지 팬들이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로 내가 해야 할 건 간단한 인터뷰뿐이었다. 그 정도라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 전지훈련이 이런 영상으로 남는 게 좋았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선수들을 골탕 먹이는 장면이 영상으로 남는 다라···."
감자 머리 선수들은 거의 은퇴할 나이었고, 선수들에게는 무슨 이해관계가 생길지 아무도 몰랐다. 앞으로 이 선수단으로 얼마나 많은 시즌을 보낼 수 있을지는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는 내가 이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영상을···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협조할게요."
"정말 감사해요. 팬들이 정말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뭐가 더 있어요?"
"아뇨, 용건은 끝났는데··· 모처럼 여유로운 프리 시즌인데 전지훈련에까지 참여하고··· 괜찮겠어요?"
마리아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수들이랑 한 약속인데 당연히 지켜야죠. 그리고, 이적 때문에 프리 시즌 내내 골머리 앓는 것보다 3박 4일로 몸이 좀 고생하는 게 더 나아요."
내 말을 들은 마리아가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약속을 조금 애매하게 지키시긴 하시지만, 멋지네요."
"하하, 약속의 맹점을 찔렀을 뿐인걸요. 벌써 전지훈련 날이 기대된다니까요?"
"그렇군요."
마리아가 또 우물쭈물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몇 가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오늘은 뭐 해요? 저녁에 시간 있어요?"
"아, 같이 식사하고 싶긴 한데 스콧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어요."
마리아가 놀라서 물었다.
"노츠 카운티의 단장님이요?"
"네. 노츠 카운티의 단장실에서 와인 좀 마시다 오려고요."
*
"···이렇게까지 준비해놓을 줄은 몰랐네요."
"제가 초대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다음에 제가 초대할 때는 이것보다 훨씬 화려하게 해야겠어요."
"허. 이런 것까지 경쟁하려고요?"
스콧이 혀를 차는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고, 자리에 앉았다. 단장실에는 아예 식사용 테이블이 옮겨져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닭 한 마리가 통째로 구워져 있었고, 연어구이 등 화려한 음식들이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우리 구단의 수석 요리사에게 부탁했습니다. 한 번 드셔보시죠. 노팅엄의 수석 요리사 마이크한테도 안 질걸요? 유명한 호텔에서 일하시던 분을 모셔왔거든요."
"이런 것까지 경쟁하냐고 방금 말했던 게 누구였더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몫으로 놓인 연어구이를 한 점 먹었다.
"···맛있네요? 진짜로요."
스콧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지난 시즌 초반부터 열심히 구애한 요리사님이신대요. 자, 이것도 한잔하시죠."
우리는 가벼운 와인을 곁들여 조용한 저녁 식사를 했다. 창밖에 노팅엄의 훈련장이 아닌 노츠 카운티의 훈련장이 보이니 참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술만 먹다 갈 줄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뭘요. 우리 노츠 카운티가 무패우승으로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한 기념으로 드리는 건데. 노팅엄은 무패우승 해본 적 없죠?"
진지하게 가려다가도 꼭 이런 식으로 틀어진다.
스콧의 우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한 시즌 만에 승격했습니다."
"역사에 남는 건 무패우승이죠."
우리는 잠시 눈싸움을 벌였다. 잠시 후, 내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대접도 받았으니까.
"아무튼, 이번에는 친선경기 잡을 필요 없어서 좋네요.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환영해요. 더비 카운티와의 해리 더비나 레스터시티와의 동화 더비는 조금 별로였거든요. 역시 더비는 노팅엄 더비죠."
"노츠 더비입니다."
"이걸 몇 번 설명해야 할까요. 노팅엄시에 있으니까 노팅엄 더비라니까요?"
끝나지 않을 논쟁을 잠깐 나누며 나는 내게 늘 경쟁의식을 드러내는 스콧을 잠시 관찰했다.
회귀 같은 치트키도 없이 프리미어리그에 무패우승으로 승격할 팀을 만들다니.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스콧의 업적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4부 리그에서 1부 리그까지 4년 만에 승격했다. 우리가 없었더라면 전 세계 축구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위대한 업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함께하니 정도 많이 들었고, 내게 자극받아 계속 쫓아오니 나도 스콧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스콧이 대체 어디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닭고기를 먹던 스콧이 느닷없이 물었다.
"부탁할 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스콧의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노팅엄이 예전에 갔던 크로아티아의 무인도 좀 소개해 줄 수 있습니까? 가이드도 함께요."
"갑자기 그건 왜···."
전지훈련을 갈 목적이라는 건 알겠지만, 왜 굳이 우리를 따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스콧은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노팅엄이 이번에 해낸 이적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단장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멋진 이적이었죠. 특히, 칼의 이적에는 혀가 내둘러졌습니다. 킴은 정말 큰 그림을 보고 있었더군요. 그 시절부터."
나는 스콧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저도 그런 위대한 이적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했던 걸 따라 해보려고 합니다. 축구에는 표절이 없으니까요."
"그냥 하시던 대로 하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견제하는 겁니까?"
"아뇨. 지금 스콧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단장일 텐데 굳이 절 따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스콧은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방금 내 말을 되새김질하는 건지 눈썹을 꿈틀꿈틀 댔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술 취하셨습니까?"
"사람이 솔직하게 칭찬하면 그냥 들어요."
"···어디 아픕니까?"
"에휴."
내가 한숨을 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스콧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절대 안 믿겠다는 얼굴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따라 하고 싶으면 하고, 안 그래도 됩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무인도와 가이드는 내일 오전에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뭐··· 고맙습니다."
뭘 고맙다고 하는지 모호했지만, 일부러 딴지를 걸지 않았다.
스콧이 이어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말했다.
"아무튼! 이번 시즌에 노츠 더비에서 적어도 한 방을 먹여주겠습니다."
"노팅엄 더비입니다. 얼마든지 받아들이죠. 자, 스콧도 한 잔 마셔요."
우리는 말 없이 잔을 부딪쳤다.
*
나는 니글거리는 속을 느끼며 훈련장 복도를 걸었다. 아무래도 어제 너무 과음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적이라는 중요 업무가 없어 마음은 몹시 편했다.
한참 걷던 나는 피트니스 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에서 들리는 굵은 목소리들을 들었다.
"은퇴하면 전력분석팀으로 와. 얼마든지 환영하지. 이번에 한 명 늘어났다지만, 일은 끊임없이 생기거든."
"오, 생각해보겠습니다."
알렉산더와 알버트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안을 훔쳐봤다.
빡빡머리, 그러니까 감자 머리들이 땀을 닦으며 알렉산더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몹시 그리웠던 풍경이었다. 나는 말 없이 그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자 기구를 잡고 운동하기 시작했다. 운동 사이의 잠깐 쉬는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알렉산더도 모처럼 바벨을 들었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번 세트가 끝나자마자 피트니스 룸으로 들어가며 말을 걸었다.
"알렉스, 잭슨이 찾던데요."
"뭐? 휴가 가셨을 텐데."
알렉산더는 순간 사색이 됐다.
"거짓말이에요."
"···그런 농담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잭슨은 휴가를 떠났다. 가족들과 스페인의 섬에서 2주 정도만 쉬다 온다고 말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는 알렉산더를 뒤로하고, 감자 머리 선수들에게 인사했다.
"여러분, 수고 많으시네요."
"오, 단장님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열렬한 환영에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는데, 어느 순간 사무엘에게 붙들려 스쿼트를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다른 감자 머리들과 알렉산더가 날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3부 리그 시절에는 로드의 옆에서 든든하게 우리 팀의 골문을 지키고, 지금은 로테이션 자원으로서 팀의 골문을 지켜줄 사무엘에게 말했다.
"피트니스 룸에 감자 머리들이 잔뜩 있으니 안정감이 드네요."
"단장님. 무릎이 너무 앞으로 나갔습니다. 발 앞꿈치가 아니라 뒷꿈치에 힘을 준다는 느낌으로."
"···사무엘은 변한 게 없네요."
결국, 나는 봉 포함 100kg 스쿼트 8개 5세트를 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들의 운동은 막바지였던 모양이었다. 내 운동이 끝나니 주변에 감자 머리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알버트가 그들의 앞에 나섰다.
"저희를 다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느닷없는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여러분만큼 우리 팀에서 훌륭하게 로테이션을 소화해 내줄 선수는 이 세상에 없어서 데려온 거예요. 제가 고마워해야죠."
알버트 옆에 선 사무엘이 씩 웃으며 말했다.
"꼭 우승컵을 들겠습니다. 여기 알버트는 혼자 치사하게 우승컵을 들고 돌아와서 간절하지 않겠지만, 저희는 간절하거든요."
"야, 나도 간절하거든. 그리고 치사하다니."
뉴캐슬에서 돌아온 알버트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이 있었다. 나는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웃었다.
자꾸 감자 머리라고 부르다 보니 이름을 까먹은 중앙 미드필더 감자 머리가 끼어들었다.
"전지훈련에 단장님도 함께 가시는 거 맞죠?"
"예. 많이 도와주세요."
"저희만 믿으십쇼."
중앙 미드필더 감자 머리가 펌핑된 가슴을 두들겼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로 이름을 확인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음모를 꾸몄고, 이들도 속여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해서.
"그런데 전지훈련지는 확실히 한국군대로 가는 게 맞습니까?"
"예. 어제 우리나라 국방부에서 허가가 떨어졌다고 연락 왔어요."
감자 머리 선수들은 좋았어! 등을 외치며 기뻐했다. 암벽등반에 레펠, 도하 같은 걸 한다고 하니 다들 정말 좋아했다.
감자 머리 선수들은 우리가 예전 시즌에 산이나 밀림이 있는 섬에 간 걸 언급하며 자신들도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는 산과 밀림에 갔을 때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고, 감자 머리 선수들도 각자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얘기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 나는 그들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제가 점심을 살 테니까 거기서 이어서 얘기하죠."
"안 바쁘십니까?"
"여기 와서 가장 여유로운 프리 시즌이라서요. 왜요. 저랑 같이 먹는 거 불편해요?"
내 물음에 감자 머리 선수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선수들에게 빨리 씻으러 가라고 말했다.
나는 매 프리 시즌마다 이렇게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감자 머리 선수들을 기다렸다.
모든 게 순조로운 프리 시즌이었다. 빨리 선수들이 휴가에서 돌아와 유격 훈련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65. 여유로운 프리시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