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노팅엄 신드롬 (2) >
어제는 프리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었다.
보통 경기 다음 날의 경기장은 무척 한산하다. 사무실이 있는 구역만 빼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노팅엄의 경기장 복도는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와, 사람 진짜 많다. 경기도 없는데."
할리가 감탄한 듯 말했다. 우리의 눈앞에는 수많은 푸드트럭이 늘어 서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푸드트럭의 음식을 구경하거나 손에 음식 하나씩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파리OC 에서 요리사들을 빼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열게 된 푸드 리그 2차전이었다. 지난주 푸드 리그에서 떨어진 요리사들에 더해 제임스의 도움으로 <탑 푸드트럭>의 최상위권 요리사들을 초빙한 덕인지 지난 푸드 리그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할리 뒤에 선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먼저 스칼렛이 테디의 팔을 잡으며 초밥 가게를 가리켰다.
"정말이네. 테디! 우리 저 가게 가자. 나 <탑 푸드트럭> 보면서 저 음식 꼭 먹어보고 싶었어."
이어서 로드가 인파를 구경하던 샬롯에게 물었다.
"샬롯, 에그타르트 좋아해?"
마지막으로 리버풀에서 여기까지 놀러 온 세자르가 오리아나에게 말했다.
"리아리아. 저 가게에 우리나라 국기가 걸려있어. 저기 가자."
세 커플과 나, 할리.
로드, 테디, 할리의 구단 홍보용 사진을 찍는 걸 구경하는데 갑자기 세자르와 오리아나가 놀러 왔다며 등장했고, 로드와 테디의 여자친구들도 사진 촬영이 끝날 때쯤 등장하는 바람에 이런 인원 구성이 됐다.
촬영을 구경하며 '<노팅엄 신드롬> 때문에 요리사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까지 빼앗기면 어떡하지, 어떤 대처방안을 내놓아야 하지.'라는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함께 푸드 리그를 구경하자고 말하는 세 커플과 할리 덕에 잠시 고민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세 커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맨 앞의 할리는 세 커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슬쩍 뒤돌아보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괜히 자신의 옆자리를 공허한 눈으로 볼 뿐이었다.
불쌍한 자식. 저 나이에 연애도 못 하고. 왠지 모르게 할리의 어깨가 좁아 보이고, 처량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할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할리가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을 딱 마주쳤다. 할리는 환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
갸웃하는데 할리가 커플들을 헤치고 내게 다가왔다.
"역시 단장님밖에 없다니까요?"
"뭐가."
왠지 모르게 기가 산 할리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가 아직도 솔로인 불쌍한 단장님이랑 함께 다녀 드리겠습니다."
"작게 말해 이 자식아. 그리고 너도 솔로잖아."
할리의 목소리가 워낙 또랑또랑해서 근처 사람들이 다 날 쳐다봤다. 여기가 다른 도시였다면 모를까 죄다 노팅엄 사람들인 만큼 다들 금세 날 알아봤다.
그리고 할리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후 웃기 시작했다.
이어서 내 앞에 노팅엄의 핵심 선수 둘과 세자르까지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들 각오하던 상황이라 그런지 선수들의 여자친구들까지도 태연하게 팬들을 맞이했다.
"사인받을 게 없는데···."
"같이 셀카 찍으면 되죠."
"저는 공에 사인해주세요."
"그래."
"세자르! 저 이번 시즌 유니폼에도 세자르 마킹했어요. 보세요."
"하··· 하하. 감사하긴 한데 같이 사진은 못 찍겠네요."
"할리, 진짜 솔로예요? 거짓말이죠?"
"···다, 당연하죠."
작은 팬 미팅이 열렸고, 나도 졸지에 노팅엄 팬들에게 포격받고 있었다.
"단장님! 저는 어때요!"
"사랑해요!"
"같이 다녀 줄게!"
남녀 할 것 없이 온 연령대의 사람들이 내게 짓궂은 말을 한마디씩 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할리의 어깨를 온 힘을 다해 꾹 쥐었다.
"악!"
*
작은 팬 미팅 후, 커플들은 사인이나 촬영을 정중히 거절하며 푸드 리그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도 할리와 함께 푸드 리그를 배회하고 있었다.
"맛있냐?"
"네."
"그래, 많이 먹어라."
롤 케이크 조각을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와 세 커플뿐만 아니라 특별히 식단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선수들도 이 게릴라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노팅엄 병원의 아픈 아이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라이언과 루카도 만났고, 여자친구와 돌아다니던 루앙과도 인사했다.
다음 주 리그 시작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휴식을 즐기는 것이었다.
"단장님도 좀 드세요. 맛있는 거 많은데."
"뭐 먹을 기분이 아니네."
"···아까 제가 너무했죠? 죄송해요···."
시무룩해지는 할리에게 장난스럽게 헤드락을 걸었다.
"다른 고민이야."
할리는 헤드락에 걸린 채로 물었다.
"뭔데요?"
나는 잠시 할리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고민을 얘기하다 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 일에 관해서는 관심만 있다면 다 알고 있다. 괜히 푸드 리그가 두 번이나 열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헤드락을 풀어주며 씩 웃고 말했다.
"그럼 우리 솔로들끼리 펍이나 가자."
*
"······구체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어. 이번에는 제임스가 잘 해결했다지만, 모든 걸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대처방안을 마련하긴 해야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렇군요."
"우리 구단을 흉내 낼 때 가장 필요한 건 선수와 감독보다는 직원들이야. 그래서 어떻게든 지키긴 해야겠는데···."
"지켜야겠군요."
할리는 의외로 얘길 진지하게 들어줬다. 두 눈썹 사이 찡그린 미간이 보인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방안들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할리는 짧은 대답을 하며 가끔 맥주를 홀짝였다.
"···우리 팀과의 계약을 해지할 때 보상금을 올리는 방법 같은 경우에는 FIFA나 UEFA, CAS(국제 스포츠 중재 재판소)에서 제재가 들어올 수도 있고,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부조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
"음."
"뭣보다 다른 빅클럽들도 자신들의 직원들이나 스태프를 빼앗겨. 바르셀로나의 핵심 직원들이 맨시티로 옮겨 간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직원들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멍청한 일인 것 같기도 해. 당연한 일을 억지로 막는다는 느낌이랄까?"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이제 우리 구단이랑은 떼놓을 수 없는 <사냥꾼 새>를 디자인했던 것처럼 아이디어 없을까?"
워낙 진지하게 들어주다 보니 이런 질문까지 해 버렸다. 사실 조금 기대되기도 했다. 할리는 늘 실없어 보이긴 하지만 가끔 이상한 곳에서 천재성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할리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할리의 개미 같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사실 얘기가 너무 어려워서 많이 못 알아들었어요. 그냥 대답만 한 거예요."
나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말했다.
"죄송할 필요 없어. 들어준 것만 해도 고마운걸."
할리도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17살이던 그때와 비교하면 체격이 딱히 커지진 않았지만, 얼굴이 꽤 어른스러워지긴 했다. 그리고 아마 그때의 할리였다면 이런 얘길 들어주고 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할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직원들이 떠날까 봐 걱정이라는 건 알겠는데요. 궁금한 게 하나 있거든요."
"어, 말해 봐."
"굳이 뭐로 묶어두려고 할 것 없이 우리 구단이 최고면 다른 구단으로 안 가지 않을까요."
"음··· 그게 다른 전통 있고 유명한 대형 구단들도 직원들을 빼앗··· 아!"
할리의 의견에 더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나는 말을 멈추고 스마트폰에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적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멀뚱멀뚱하게 날 보고 있는 할리에게 말했다.
"고맙다."
"예?"
"우리 구단답게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어."
"잘됐네요."
"먹고 싶은 거 없냐? 아니면 내가 직원들한테 말해서 소개팅 해 주리?"
"정말요··· 아, 아니. 전 괜찮은데요? 알아서 할 수 있는데."
할리는 당황해서 어버버했다.
"아무튼,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할리는 대화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씩 웃으며 할리에게 말했다. 이번 프리시즌 마지막 작업이 될 계획의 시작이 뭔지.
"운영팀을 중심으로 놀고 있는 직원들 전부 시즌 전까지 야근을 시킬 거야."
"예?"
**
"안녕하세요. 내일이면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이네요."
노팅엄의 직원 대부분이 경기장의 프리미엄 좌석에 모여 앉아 있었다. 푸드코트에서 일하는 요리사들 같은 파트 타임 근무자도 다 포함해서.
백 명은 진작 넘은 인원들의 면모는 정말 다양했다.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를 제외하고 요리사, 장비관리사, 잔디관리사, 경기장 관리인, 운영팀, 보안팀, 스카우트팀 등.
나는 필드를 등진 채로 직원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영상이나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안 띄워놓고 말하려니 어색하네요. 먼저 여러분을 왜 모았는지 얘기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팀에서 일하기로 한 요리사들이 더 좋은 조건을 제안받고, 위약금을 낸 후에 팀을 떠난 사건의 개요를 얘기했다.
직원 대부분은 이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 일에 관심이 없는 직원들은 정말이냐며 주변의 직원들에게 물었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일고, 잦아들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우리 구단이 엄청나게 잘 나가고 있죠? 이제 전 세계 언론에서 우리 기사를 찾아보는 건 아주 쉬운 일이 됐습니다. 심지어는 <노팅엄 신드롬>이라고 해서 우리 구단을 흉내 내기 시작한 구단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의 얼굴을 보니 대부분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짐작한 것 같았다.
'팀을 떠나지 말아라.' 같은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할 거다.
뭐,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공짜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일단, 직원 측의 사정으로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을 때, 우리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는 데 필요한 보상금을 20%가량 인상할 겁니다."
몇몇 직원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불만족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의 급료를 다 인상해줄 계획입니다. 세계적인 빅클럽이 되려면 여러분이 받는 돈도 그 정도는 돼야겠죠? 안 그래요?"
내 물음에 다들 벙쪄서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나는 운영팀 직원들을 갈아서 만든 <다른 빅클럽이 직원들에게 얼마만큼의 급료를 지급하는지>에 대한 추정 자료를 손에 들며 말했다.
"여기에는 빅클럽들이 각 직책에 어느 정도 주급을 주는지 적혀있습니다. 물론, 최고 수준의 주급도 적혀있죠. 이 자료를 준비하느라 고생하신 운영팀 직원분들에게 잠깐 박수 주시고···."
직원들은 급료 인상이라는 말 때문인지 내 능청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머쓱해져서 계속 말했다.
"우리는 최고 수준의 급료대비 20% 인상한 금액으로 전부 재계약을 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약하는 실력 있는 직원들에게도 그 정도 급료를 지급할 거고요."
보너스나 휴가, 급료도 많이 챙겨주긴 했지만, 우리 구단이 급격히 성장한 만큼 선수들과는 다르게 직원들의 급료는 빅클럽들과 꽤 차이가 났다. 나는 그 간극을 메꾸려고 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선수나 코칭스태프와는 다르게 은퇴할 때까지 한 구단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투자 가치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적어도 돈 때문에 떠나는 구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팅엄을 노팅엄답게 만들어주는 분들이죠.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일할 수 없을 때까지 노팅엄에서 부려먹고 싶습니다."
할리가 말했다. 우리 구단이 최고면 다 떠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급료 외의 다른 분야에서 우리 구단이 빅클럽들에게 절대로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딱 급료만 충분히 준다면 정말 비이상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우리 구단을 떠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슬슬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직원들이 환하게 웃었다. 급료 늘어나는 데 슬퍼할 사람은 없으니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때, 한 직원이 외쳤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이어서 다른 직원들도 따라서 비슷한 말을 했다.
직원들은 서로 끌어안고 하이파이브하기도 하며 기쁨을 나눴다.
나는 오래오래 이런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 68. 노팅엄 신드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