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레오와 로드 (1) >
"너희들 왔구나. 왜 이렇게 늦었어."
레오, 존, 조, 잭.
노팅엄 유소년 팀의 실세인 넷이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로드가 반기며 말했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지금 행사 중이라서."
레오와 쓰리 제이(존, 조, 잭)는 어미 새를 따르는 아기 새들처럼 로드 뒤를 졸졸 따라가며 왜 늦었는지 불평하기 시작했다.
"내기 게임에서 지는 바람에 훈련장 정리하고 오느라 늦었어요. 망할 한국인들. VR 게임도 너무 잘해요. 걔네는 한국에서 게임만 하다 온 게 틀림없어요."
레오의 한 서린 말에 쓰리제이들 또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로드는 고개를 돌려 전우진, 송민재, 김율, 그리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해외 유학 프로젝트 2기 멤버 두 명이 모여있는 테이블을 찾아냈다. 그들과 불과 두 테이블 거리였다. 그들은 레오와 쓰리제이를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장난을 걸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송민재의 말에 승부욕에 불타오른 것 같은 잭이 말했다.
"다음에 다시 해. 다른 거 내기 걸고."
"그래그래. 많이 연습해라. 아, 이따가 포켓볼 내기할래? 저기에 포켓볼 대가 두 개나 있더라."
"좋아. 이번에는 내일 훈련 도구 세팅하는 거 걸고?"
"오케이."
넷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국인 유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드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유소년 팀원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게 느껴져서.
로드와 네 명의 유소년은 테이블에 도착했다.
먼저 앉아있던 할리가 유소년들에게 인사했다.
"왔냐. 너희들 전, 송, 킴한테 VR 게임 5-0으로 졌다면서?"
"그게 벌써 퍼졌어요?"
"응."
넷이 고개를 떨궜다. 할리와 할리 옆에 앉은 라이언이 그 모습을 보며 큭큭 웃었다. 풀이 죽은 넷은 주저앉듯이 그들의 옆에 차례로 앉았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이번에는 노팅엄 FC에서 브라우니 재단에 후원금을 전달하겠습니다. 두 분 나와주세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도운이 1,000만 파운드(약 151억 원)라고 적힌 사람 몸통만 한 판을 들고 무대로 나갔다.
"나도 갔다 올게."
라이언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비넥타이를 가다듬고, 무대로 나갔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라이언 브라우니는 12월 1일부터 오늘 23일까지 6경기에서 전부 승리했고, 7골 2어시스트 4 MOM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달성했습니다. 원래는 950만 파운드인데 단장님께서 50만 파운드 올려 딱 1,000만 파운드를 맞춰 주셨습니다. 단장님에게 박수 한 번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무대 위로 올라와 1,000만 파운드라 적힌 판을 들고 있던 김도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잭슨 감독님. 이거 라이언을 공격수로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6경기 7골이잖아요. 감독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어지는 사회자의 능글맞은 물음에 반대쪽 테이블에서 잭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미할리스, 할리, 제롬, 썬, 알버트 모두 긴장해야 할 겁니다."
잭슨의 능수능란한 대답에 방금 언급된 사람들만 빼고 다들 웃었다. 함께 웃던 레오는 뻣뻣하게 굳은 할리에게 말했다.
"할리, 농담하시는 거잖아요. 왜 그렇게 긴장해요."
"하하, 그렇겠지? 라이언 쟤 요즘 폼이 너무 좋아서 무섭다고."
이어서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김도운이 라이언에게 1,000만 파운드라 적힌 판을 건넸다. 그리고 둘은 판을 함께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레오와 쓰리제이는 열심히 손뼉을 쳤다.
그렇게 짧은 행사가 끝났고, 사람들은 다시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라이언은 김도운과 함께 이들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로드, 할리, 라이언, 존, 조, 잭, 레오.
김도운은 일곱 명이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보며 신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잡담이나 하려고 따라 왔는데··· 여기 성골 테이블이었네. 나 앉아도 되냐?"
"성골이 뭔데요?"
로드의 물음에 김도운은 한국어랑 영어를 섞어 썼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설명해줬다.
"한국에서 쓰는 말인데 한 집단에서 완전히 순혈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야. 스포츠에서는 한 팀에서만 뛴 선수들을 비유적으로 성골이라고 불러."
"프랜차이즈 스타랑 비슷한 말이네요."
"그렇지."
다들 어색한 발음으로 성골, 성골 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레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김도운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아니네요."
시무룩해지는 레오 때문에 김도운은 순간 당황했다. 레오는 첼시에서 유소년 선수로 뛴 적이 있었다.
그래도 김도운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금세 깨달았다.
"열다섯 살 전에 여기 왔으면 성골이지."
"정말요?"
"응, 정말."
레오의 기분은 금세 풀렸고, 본격적으로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선수들과 직원들은 각종 과자, 음식, 음료를 즐기며 놀기 시작했다. 테이블은 점점 더 난잡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다른 테이블로 놀러 가기도 하고 파티장 구석에 마련된 포켓볼 대나 탁구대로 향했다. 다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인팀 선수들이 놀이기구들을 다 쓰고 있었기 때문에 유소년 선수들은 대부분 테이블에 남아 있었다. 아니면 성인팀 선수들이 노는 걸 구경하거나.
참고로 탁구대에서는 할리와 테오가 축구공을 가지고 머리만 써서 탁구를 하고 있었다. 김도운은 둘이 무려 30번이 넘는 랠리를 주고받는 걸 구경하다가 옆에서 음료수를 홀짝거리고 있는 레오에게 말을 걸었다.
"성인팀 선수들이랑 같이 파티하는 거 어때? 의견 좀 주라. 다음 파티에 반영하게."
새 호텔이 세워지고 파티장도 그만큼 넓어졌기에 유소년 선수들도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할 수 있었다.
"재밌고, 음식도 맛있어요. 그런데 놀이기구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오케이. 추가해 줄게."
테오와 할리는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로도 날렵한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최상위권 팀에서 왜 뛰는지 증명하는 둘이었다.
김도운과 레오는 둘의 승부에 빠져들었다.
"오, 오오."
"와아아아!"
그리고 결국 키가 좀 더 큰 할리가 신체적인 이점을 이용해 승리했다. 김도운은 감탄하고, 레오는 소리를 질렀다.
승자인 할리는 다음 상대로 유소년 선수인 잭을 지목하고 있었다.
잠깐 소강상태가 이어졌기에 김도운과 레오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김도운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레오와 계약 때 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노팅엄에서 생활하는 건 어때? 즐거워? 여기 오면 즐겁게 축구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약속했잖아."
레오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답할 수 있었다.
"네, 정말 즐거워요. 빨리 퍼스트 팀 선수들이랑 함께 뛰어서 완벽한 노팅엄의 성-골이 되고 싶어요."
레오의 두 눈에는 유소년 선수들과 성인팀 선수들이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노팅엄의 분위기는 정말 최고였다.
쓰리제이도 좋았고, 전우진을 비롯한 한국인들도 재미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렇지만, 레오는 최근 성인팀에 데뷔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같이 웃고 떠들지 몰라도 노팅엄의 성인팀 선수들은 전 세계 축구계에 큰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레오는 나중에는 전설로 불리게 될 선수들과 함께 뛰어보고 싶었고, 자신의 실력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성인팀 훈련에도 함께하고 있고, 유소년 경기는 유소년챔피언스리그에만 참가하고 평상시에는 성인팀 2군 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실력이 늘거나 감독님의 눈에 들면 성인팀에서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레오는 요즘 좀 초조해지고 있었다.
김도운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된 레오에게 말했다. 선수들을 워낙 많이 보다 보니 이제는 무슨 고민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요즘 잘한다고 코치님들이 칭찬 많이 하더라. 지금처럼만 하면 금방 데뷔할 수 있을 거야."
"그럴까요?"
김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천천히 하면 되겠지, 이제 애들이랑 놀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찾아왔다.
유소년 팀 감독, 알피였다.
"킴, 레오를 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잭슨 감독님이 찾아서요."
"레오를요? 당연히 상관없긴 한데···."
레오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알피는 무척 들떠 보였다.
알피는 레오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직접 듣는 게 좋을 거다."
레오는 갸웃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알피를 따라갔다. 알피가 데려다준 테이블에는 성인팀 감독 잭슨을 비롯한 성인팀의 코칭스태프들이 있었다.
"여기 앉아라."
잭슨은 자신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레오는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기에 잭슨의 옆에 앉았다.
잭슨은 레오를 빤히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왜 불렀는지 궁금하다는 얼굴이구나."
"네···."
속마음이 들켰다는 사실이 레오는 부끄러웠다. 잭슨의 눈을 잠시 못 마주쳤다. 그리고 그때, 잭슨이 충격적인 제안을 해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마. 다음 경기에 널 선발로 쓰고 싶은데··· 몸 상태가 어떻지?"
*
시끌벅적한 파티장이었지만, 이 테이블만큼은 조용했다.
대답해야 할 레오가 당황한 나머지 입만 뻐끔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에 모인 모두는 진지한 얼굴로 레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유소년 감독 알피는 레오의 대답을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레오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물었다.
"왜요?"
참 멍청한 대답이었지만, 잭슨은 무척 친절하게 답해줬다.
"칼이 오늘 경기에서 발목을 삐어 박싱데이 동안 뛸 수 없게 됐다. 나는 칼의 자리에 널 쓰고 싶어서 네게 몸 상태를 물은 거다. 참고로 너도 알다시피 오른쪽 풀백인 한스가 햄스트링 부상 중이지. 그래서 테디를 올려 쓸 수는 없다."
잭슨은 숨을 고르고 말을 계속했다.
"훈련에서 왼쪽 윙인 루앙과 요한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실험을 몇 번 해보긴 했는데··· 제 기량을 못 내고 오히려 경기 흐름을 망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느닷없이 찾아온 성인팀 선발 기회에 레오는 무척 기뻤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잭슨의 다음 말은 그런 레오에게 정말 와닿는 말이었다.
"너를 땜빵 선수로 쓰려는 게 아니다. 박싱데이 첫 경기 상대인 아스톤빌라를 상대할 때, 너 같은 스타일의 중앙침투형 크랙이 있어야 더 완벽하게 이길 수 있다. 너는 2선을 다 볼 수 있고, 칼과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통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감독이 되어가고 있는 잭슨이 자길 인정해주고 있었다.
첼시 유소년으로 뛸 때, 슈퍼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뻤다.
레오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저 몸 상태 최고예요. 그렇죠?"
레오는 유소년 감독 알피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알피 또한 그렇다고 답했다. 잭슨은 그걸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내일부터 넌 주전 선수들과 훈련하게 될 거다. 학교는 어떻게 할 거지?"
"내일부터 방학이에요!"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박싱데이였다. 학교는 내일부터 짧은 방학이었다.
"잘 됐군. 그럼 내일 아홉 시까지 드레싱룸으로 출근해라."
"네!"
갑작스러웠지만, 프리미어리그 데뷔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레오는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힘차게 답했다.
*
"버스 좋지?"
로드의 물음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는 침대처럼 푹신했고, 넓어서 뒤척여도 상관없었다.
레오는 지금 구단 버스를 타고 아스톤빌라 원정을 위해 버밍엄시로 향하고 있었다.
"잠을 자도 좋은데 너무 깊게 자면 안 돼. 컨디션 망가지니까."
"네! 어차피 안 졸려요."
레오는 옆자리의 로드에게 씩씩하게 답했다. 정말 정신이 맑았다. 두근거려서 어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말이다.
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이어폰을 꼈다.
레오도 의자에 깊게 누우며 스마트폰을 켜 SNS를 뒤적이다가 가장 화제인 글 하나를 발견했다.
<원정 명단에 포함된 레오, 선발 출전하나?>
원정 명단의 구성으로 봤을 때, 자신의 선발이 유력하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레오는 자연스럽게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아무리 아스톤빌라가 강등권이라지만 이건 너무 오만한 거 아닐까? 레오는 너무 꼬맹이잖아.
-요한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되는 거 아냐? 쟤 선발로 못 나올걸?
-우리 첼시 선수였는데 T_T
-잭슨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노팅엄 지금 무패행진 이어가고 있는데 그걸 깨고 싶겠냐?-우리는 노팅엄을 믿는다!
긍정적인 댓글과 부정적인 댓글이 뒤섞여있었지만, 레오의 눈에는 노팅엄이 오만한 게 아니냐는 댓글만 보였다. 저 사람이 봤을 때는 자신의 실력이 프리미어리그 급에 못 미치니까 한 말일 거다. 좋아요도 많이 달려 있었다.
레오는 잭슨이 직접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잭슨은 자신이 프리미어리그에 통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만 시작되면 이 댓글을 단 사람이나 이 댓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시선을 바꿀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될 걸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레오는 아스톤빌라의 홈 경기장에 도착할 때까지 SNS를 계속 뒤적였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고 염려하는 글을 찾아 전부 스크랩했다.
레오는 이번 경기가 끝난 후, 이 부정적인 반응이 놀라움과 긍정적인 반응으로 바뀌어 있는 걸 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활약을 펼쳐야 했다.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프로 데뷔전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펼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건 유소년 선수라면 누구나 꿈꿀만한 일이었다.
레오는 반드시 해내겠다며 의욕을 활활 불태웠다.
잠시 후, 버스가 아스톤빌라의 홈 경기장에 도착했다.
옆자리의 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레오에게 말했다.
"나가자."
< 74. 레오와 로드 (1) > 끝